<원신> 채팅 검열이 이상한 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욕설은 물론 일상에서 자주 쓰는 은어, 중국 관련 단어도 검열 대상입니다. 별별 다양한 단어가 검열되는 만큼 <원신> 채팅 필터링 관련 루머도 정말 많습니다. 개중에는 ‘하나의 중국’ 이슈로 구설수에 오른 버츄얼 유튜버 닉네임이 검열된다는 이야기처럼, 꽤 그럴싸한 루머도 많지요. (실제로는 검열 안 됩니다.)
미호요 원신에서는 영어로 '홍콩'을 칠 수 없다
이번 사례는 황당합니다. 중국 게임이라 하더라도 이게 정상적인지 의문이 듭니다.
12월 7일 <원신>에서는 채팅으로 发票(영수증)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사전 의미와 다른 숨겨진 뜻이나, 공산당에 대한 비난이라도 담겨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조사를 시작하니 기자의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한국에서 ‘현금영수증’에 별다른 뜻이 없듯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욕설도 음담패설도 은어도 아닌데 검열될 리 없습니다. 평범한 단어가 검열된 원인은 생각보다 구질구질하고 황당합니다. 하루아침에 멀쩡한 단어가 필터링된 이유는 뭘까요? <원신>에 벌어진 황당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미호요 선생님, 저는 특정 도시나 국가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 12월 1일: 종려 가챠 시작!
발단은 신규 5성 캐릭터 ‘종려’ 때문입니다. 11월 진행될 패치에 종려가 추가된다는 소식은 많은 <원신> 유저를 설레게 했습니다. 게다가 메인 퀘스트로 종려에 대한 이야기를 공들여 묘사한 직후라 더더욱 많은 유저가 종려를 기다리고 있었죠.
종려에 대한 기대감은 매출로 반영됩니다. 12월 1일부터 종려를 뽑을 수 있는 ‘산야의 시조’ 가챠가 시작되자, 게임 출시 시즌에 준하는 매출이 단기간 발생합니다. <원신>이나 <페이트: 그랜드오더> 같은 가챠 게임은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 성능에 대한 기대가 곧 매출로 반영됨을 생각하면, 그만큼 많은 사람이 종려를 기다려 온 셈입니다.
외모는 합격이지만 성능이 문제였습니다. 4성 캐릭터보다 못한 성능, <원신> 현행 메타와 동떨어진 운용 방법에 많은 유저가 실망했습니다. 엔드 콘텐츠와 멀티플레이에서 활용할 방안이 마땅히 없어 캐릭터 의도를 모르겠다는 평가가 주를 이룹니다. 게다가 테스트 서버에서 나쁘지 않았던 스킬 계수가 정식 서버에서 대폭 하향되어 출시됐습니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 <원신> 커뮤니티에서 ‘종려가 너무 약하다’는 불만이 나온 이유입니다.
종려를 강화해도 스킬이 바뀌지 않는 버그까지 발견됐습니다. <원신>은 캐릭터 스킬 강화를 하기 위해서 같은 캐릭터를 획득해야 합니다. 문제는 5성 캐릭터 뽑기 확률은 기본 0.6%에 불과해, 같은 캐릭터를 뽑기 위해선 거금을 투자해야 합니다. 힘들게 뽑은 캐릭터가 성능도 약하고 버그도 가지고 있다는 소식에 중국 유저들의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오고 맙니다.
종려 형...
# 12월 6일: “종려를 되찾자!"
“미호요가 커뮤니티를 통제하고 있다”는 루머에 중국 여론이 극도로 악화합니다. 중국 게이머들은 미호요가 항의 게시글을 삭제하고, 종려와 무관한 글로 커뮤니티를 채우고 있다며 주장합니다. 일촉즉발의 상황, 평범한 방법이 통하지 않자 몇몇 유저가 미호요에게 ‘직접적으로’ 항의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미호요에게 구매 내역 영수증을 요청합니다. 중국 법률상 상품 구매자는 회계용 영수증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판매자는 정해진 양식에 따라 상세한 거래 내역을 기재한 뒤 회사 직인을 날인해야 하죠. 이렇게 회계용으로 사용되는 영수증을 파피아오(发票)라고 부릅니다.
파피아오(发票)
중국은 샤오피아오(小票), 쇼우쥐(收据), 파피아오(发票) 3가지 영수증을 사용합니다. 샤오피아오(小票)는 흔히 편의점이나 식당 등에서 사용하는 계산서입니다. 쇼우쥐(收据)는 전자상가나 도매상에서 발급하는 수기 영수증입니다. 앞의 이 둘은 정해진 양식과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반면 파피아오(发票)는 중국 세무국과 연결되어 발행됩니다. 회계 및 세금 신고에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영수증이기에 세율 및 구매 금액 등이 자세히 기재됩니다.
중국 커뮤니티는 파피아오의 번거로운 발행 과정을 무기로 꺼내 든 겁니다. 미호요의 수고를 늘리기 위해 전자 영수증 대신 서면 영수증을 택했습니다. 재화 결제 내역 하나하나에 대한 영수증을 요청하는 치밀함(?)까지 보였죠.
‘파피아오 공략글’마저 올라왔습니다. 중국은 파피아오 활성화를 위해 세무국 혹은 지방 세무서에서 복권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파피아오마다 기입된 고유번호를 통해 상금을 추첨하는 방식이죠. 중국 게이머들은 공략글을 퍼 나르며 다른 이들에게도 “복권 당첨되면 종려에 쏟아부은 돈도 되찾는다!”며 파피아오 발행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공략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12월 7일: 더 악화되는 여론...
이런 항의 방법이 효과적일까요?
2018년 <던전 앤 파이터> 중국 서버에서도 같은 방식이 사용된 바 있습니다. 업데이트 때문에 장비 강화가 극도로 어려워지고 운영으로 인해 논란이 발생하자, 파피아오 발급을 요구하며 항의에 나섰죠. 유저들 사이에선 “오늘 영수증 발급했어요? (今天的发票开了吗?)” 같은 말도 유행했죠. 영수증 발급에 지친 운영사 텐센트는 유저들에게 ‘GG’를 선언하며, 건의사항을 수용하기로 합니다.
이렇듯 항의 방법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파피아오 발급은 운영사에 항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문제 여지도 없으며, 운영사에서 발급을 거부하면 탈세 혐의로 신고도 가능하죠.
상황은 미호요가 파피아오를 검열하며 더 나빠집니다. 인 게임 채팅과 자기소개, 공식 홈페이지 포럼 등에서 ‘发票’를 작성할 수 없게 됐습니다. 아시아 서버 역시 해당 단어가 필터링 됩니다. 다만 검열은 어디까지나 중국어 发票에 해당합니다. 중국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로는 ‘영수증’을 문제없이 입력 가능합니다.
여론이 들끓자, 미호요가 종려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12월 7일 오후 10시 중국 웨이보에 작성된 공지사항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종려 스킬 구성이 탱킹과 서포팅에 치중된 점은 의도된 바다.
② 대미지 능력치를 추구하지 말고 HP를 강화해야 된다.
③ 현 성능은 유저 피드백과 테스트를 통과한 결과물이다.
④ 종려 버그는 12월 10일 수정과 보상 진행하겠다.
종려에게 남은 건 기둥 세우기 뿐... 유저 반응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미호요가 작성한 공지사항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다는 평이 대다수입니다. 서포터로 쓰자니 4성보다 못한 성능이 발목을 잡고, 육성 방향을 어떻게 잡아도 특별할 것 없이 어정쩡한 성능은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미호요가 대처를 잘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들은 과격한 항의를 수용했다간 좋지 않은 선례만 남을 것을 걱정합니다. 또한 게임을 구매하고 즐기는 건 유저지만 게임을 만들고 다듬어가는 건 결국 개발사인 만큼, 개발사가 언제나 유저 의견을 따라가야 될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12월 8일, 지금도 중국 <원신> 커뮤니티는 종려와 관련된 글로 게시판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파피아오 발행은 계속 진행 중입니다. 게임에서 파피아오(发票)는 여전히 검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마다 항상 그렇지만, 이번 주 내로 만족할 답변이 없으면 환불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종려 유저들의 바람대로 밸런스 수정이 이뤄질까요? 파피아오 발행은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호요와 중국 게이머의 자존심 싸움,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