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애니쿠라를 아십니까?"
'서브컬처'를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 및 게임 관련 오프라인 행사라고 하면 언제부터인가 '약방의 감초'처럼 존재감(?)을 드러내는 무리가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캐릭터가 그려진 옷을 입고, 양손에는 불빛이 번쩍이는 펜라이트를 들고(혹은 맨손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군무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춤을 추며 몸을 흔드는 이들을 말하는데요. 실제로 'AGF' 같은 서브컬처 행사에서 펼쳐진 장관은 SNS에 공유되어 화제가 되기도 합니다.
애니메이션/게임 음악에 맞춰 마치 클럽에 온 것처럼 몸을 흔들고, 또 음악을 즐기는 '디제잉 이벤트'를 가리켜 일본에서는 '애니송 클럽'. 줄여서 '애니쿠라'(혹은 아니쿠라) 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는 연간 개최 수가 수 천 건이 넘어가고, 참여하는 관람객의 단위도 수십 만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나름 자리를 잡은 서브컬처 문화 중에 하나입니다. 단순히 애니메이션/게임 음악을 트는 것을 넘어서 유명 성우나 아티스트가 DJ로 참여해 무대를 이끌기도 하는데요.
이런 '애니쿠라'는 한국에서도 개최됩니다. 일본에서 애니쿠라를 접한 서브컬처 마니아들이 한국에서도 클럽이나 체육관 등을 대여해서 많아봐야 수십 명이 모여 행사를 개최한 것이 시작일 정도로 그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점점 규모가 커졌고, 수백 명이 참여하는 나름 큰 규모의 행사도 개최되기 시작했는데요.
오늘 이야기해볼 '김치쿠라' 또한, 그렇게 규모를 키워온 한국의 애니쿠라 행사 중에 하나입니다. 무엇보다 '코미야 아리사', 'fhána' 등 서브컬처를 좋아하는 유저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성우/아티스트 들의 내한을 이끌어내 주목을 받은 이벤트죠. 지난 5월 13일에는 10번째 행사를 굉장히 성공리에 개최해서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한국에서 이런 이벤트를 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고,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이끌어가는 것은 더더욱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사를 주최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또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행사를 개최하는 것일까요?
디스이즈게임은 한국에서 진행되는 애니쿠라 행사 중 가장 주목 받는 행사라고 할 수 있는 '김치쿠라'의 주최자를 만나서 여러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Q. 디스이즈게임: 먼저 간단하게 자기 소개, 그리고 김치쿠라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A. 장자민 김치쿠라 회장: 안녕하세요. 현재 '김치쿠라'에서 총괄 운영을 맡고 있는 장자민이라고 합니다.
김치쿠라는 지난 2016년부터 진행한 애니쿠라 이벤트이고, 코로나로 인해 개최하지 못한 최근 약 3년을 제외하면 꾸준하게 개최한 행사입니다. 애니메이션 음악이나 게임 음악, 각종 인터넷 밈 등 '서브컬처'를 좋아하는 마니아라면 누구나 편하게 와서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행사를 목표로, 2023년 5월에 10번째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Q. 일본은 애니쿠라가 자주 개최된다고 쳐도, 한국에서 이런 이벤트는 여러 의미로 희귀한데요. 김치쿠라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A. 장자민: 한국에서도 지난 2010년 중반대부터 <아이돌 마스터>나 <러브라이브> 같은 여러 '가상 아이돌물' 들이 인기를 끌면서, 각 IP를 좋아하는 팬들을 중심으로 스튜디오나 영화관 등을 대여해서 음악을 즐기는 문화가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김치쿠라도 정말 순수하게 '어떤 IP를 좋아해서' 모인 사람들끼리 "우리나라에서 애니쿠라 같은 이벤트를 해보면 어떨까?" 같은 식으로 이야기가 나온 것을 '실제로 감행했다가' 일이 커진 케이스인데요.
그렇게 시작한 이벤트이기 때문에 실제로 주최진들은 첫 시작 때만해도 8~10명 정도인 데다가, 그 이전까지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각자의 본업이나 주변 환경도 정말 제각각입니다. 저처럼 본업이 서브컬처와는 완전히 관계없는 사람부터 평범한 직장인, 학생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직 관심분야가 겹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 열정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바로 김치쿠라 입니다.
Q. 그럼 정말 완전 아마추어들끼리 뭉쳐서 시작한 행사라는 의미인데, 어려움이 많았겠네요
A. 장자민: 다들 열정을 가지고 '배워가면서' 행사를 이끌어왔다고 설명할 수 있을 듯해요. 기본적으로 행사 개최나 섭외, 홍보에 있어 전문 지식을 쌓은 후 행사를 진행한 것이 아니라, 정말 다들 이 일에 대한 '열정' 하나 만으로 이벤트 시작부터, 장비 대여나 관련 업무 등등을 하나하나 배워갔습니다.
그나마 주최진들 모두 김치쿠라에 참여하기 전에 서브컬처 관련 이벤트에 많이 참가해봤기에 기본적으로 행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습니다. 또 신기하게도 적재적소에 필요한 능력을 가진 멤버들이 모이다 보니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잘 이끌어 왔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여유가 있는 크루원이 법인도 설립하고, 정말 제대로 진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 근데 하필이면 행사 이름이 '김치' 쿠라란 말이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행사명인데, 굳이 행사명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A. 장자민: 내부에서도 여러 후보가 있었고, 솔직히 말해서 행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지금은 행사명에 대해 조금 후회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웃음)
일단 당시 행사명을 이렇게 지은 것은 '한국에서 열리는' 애니쿠라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김치'를 넣은 것이었습니다. 이름을 짓고 나중에 알게된 건데, 우리 시선으로 봤을 때 '김치' 라고 하면 참 여러 의미를 생각하게 하지만, 외국인의 시선에서 보면 뉘앙스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그래서 지금의 '김치쿠라'로 행사명을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Q. '애니쿠라'라는 놀이 문화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소개를 하자면?
A. 장자민: 애니쿠라는 '애니메이션 음악', 혹은 '게임 음악' 같은 다양한 서브컬처 기반 음악과 디제잉 클럽을 결합해서 말 그대로 '즐기는' 문화입니다. 무언가 규칙, 규제, 방법이 있는 놀이 문화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즐겁게 즐기는 콘텐츠라고 생각하면 돼요. 특히 다른 이벤트에서 보기 힘든 점인데, 애니쿠라는 서브컬처와 관련된 인터넷 밈을 반영하는 것도 빠른 편입니다. 결국 서브컬처에 대한 애정만 있다면 애니쿠라에서 재미를 느낄 준비는 된거라고 생각해요.
참고로 일본에서는 성우들이나 연예인들이 직접 DJ로 나서기도 하는데요. 김치쿠라 또한 이런 배경 때문에 일본의 유명 성우와 DJ들을 초청해서 함께 즐기는 콘텐츠로 기획했습니다.
Q. 잘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무언가 '괴상한 춤'을 배워야 하는, 굉장히 하드코어한(?) 놀이 문화라는 인식도 있는데요.
A. 장자민: 소위 말하는 '물품 보관소' 영상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박혀서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것 같아요. 애니쿠라는 꼭 오타게를 배워야 할 필요가 없고, 격렬하게 춤을 추지 않는다고 눈치를 주는 곳도 아닙니다. 그냥 자기가 아는 음악이 나오면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되고, 모르는 음악이 나오면 잠깐 쉬면서 '둠칫둠칫'만 해도 됩니다. (웃음)
물론 서로서로 배려하고 매너를 지키는 마음가짐은 필요합니다. 애니쿠라는 기본적으로 가상 아이돌부터 옛날 애니메이션, 게임 등 온갖 분야를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모이는 행사이기 때문에 저마다 음악을 즐기는 문화도 조금씩 차이가 있거든요. 이에 대한 '존중'만 할 수 있다면, 누구나 정말 재미있게, 또 쉽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이벤트라고 생각합니다.
Q. 5월 13일, 10번째 행사를 개최했는데 간략하게 성과를 정리하자면?
A. 장자민: 코로나 이전을 기준으로, 한 번 행사를 하면 보통 400~500명 정도의 인원이 참가했어요. 최근 진행한 10회 행사는 아무래도 오랜만에 개최된 데다 엔데믹 이후 열린 행사다 보니 다소 줄은 240 명 정도가 찾아주셨는데요. 하지만 굉장히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만큼 차차 나아질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Q. 이번 행사에서는 <러브라이브 선샤인>의 유명 성우 '코미야 아리사', 그리고 아티스트로 굉장히 유명한 fhána를 섭외해서 화제가 되었는데요. 김치쿠라는 특히 일본의 유명 성우/아티스트를 섭외해서 주목을 받는데 이 섭외력의 비결이 있다면?
A. 장자민: 사실 저희도 그 부분이 약간은 미스테리입니다. (웃음) 아니, 게스트의 섭외는 모두 제가 담당하거든요.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본업이 서브컬처와 전혀 관계없는 분야입니다. 그런 제가 어디 인맥이 있고, 비결이 있겠어요.
다만 추정을 하자면 섭외의 원동력은 역시 '신뢰'가 아닐까 싶어요. 저희가 해외 게스트의 초대를 처음 기획한 것이 2017년인데, 정말 운이 좋게 한국 시장에 관심이 많던 아티스트와 사무소가 응해주었거든요. 이 때 정말 잘하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아티스트 쪽에서도 만족하면서 좋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첫 스타트를 좋게 마무리하니, 이후에 게스트를 섭외할 때 이런 저희의 경험이 좋은 효과를 내고, 또 사무소 사이에서 입소문도 나면서 스노우볼 굴러가듯 많은 일본 사무소들이 저희를 믿어 주더라구요. 이제는 오히려 역으로 일본에서 아티스트를 추천해줄 정도로요. 결국 무언가 '비결'이 있다고 하면 이런 저희의 노력, 그리고 쌓아 올린 신뢰가 바로 비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Q. 조금 대놓고 말해서, 김치쿠라 같은 행사를 하면 수익이 나오나요?
A. 장자민: 저희는 정말 이런 애니쿠라 행사가 좋고, 서브컬처가 좋기 때문에 뭉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익은 고려대상이 아니고, 실제로 수익도 적자 운영이에요. 가끔 사인회나 굿즈 판매로 수익을 내지 않냐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런 부가행사는 어디까지나 관람하러 오시는 분들이 좋은 추억을 하나라도 더 가져가신다면 저희 역시 재미있을 것 같아서 기획하는 경우이지, 수익을 위해 개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적자인데도 왜 행사를 개최하냐고 그 이유를 물어보신다면... 직접 게스트분들을 보려고 일본에 가려면 적게는 몇 십만 원에서 많게는 백만원 단위로 쓰게 되잖아요? 금전적인 여유가 생기는 사회인은 시간이,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학생은 금전적인 여유가 없을 때에 저희 같은 행사가 하나 둘 생기면 한국에서 보다 편하고 활발하게 서브컬처 문화를 즐실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개최하고 있습니다. 겸사겸사 저희의 문화도 알리구요 (웃음)
또 다른 이유라면.. '취미의 연장선' 이기 때문이라고 답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들 자기가 정말로 즐겁고 좋아하는 걸 하면 돈이 얼마가 드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잖아요.
관객 여러분들이 저희가 기획한 행사로 인해 즐거워 하셨을 때가 저희가 가장 보람차기도 하니까요. 정말 저희는 김치쿠라 행사에 진심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이번 인터뷰를 통해 꼭 어필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A. 장자민: 코로나도 끝나고, 최근에는 여러 게스트 분들을 초대해 행사가 커지면서 저희 공연을 찾아주시는 분들도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애니쿠라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즐기고 싶은 분들부터, 초청 게스트의 무대를 보러 관람을 오시는 분들까지 새롭고 많은 분들이 김치쿠라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부디 모두가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이벤트가 되었으면 하고, 그런 이벤트를 만들기 위해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애니쿠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즐기는 행사인 만큼, 서로를 향한 존중과 배려가 특히 중요한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도 이렇게 성숙한 행사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으니, 저희 공연을 찾아주시는 관객분들께서도 저희의 의도를 이해해주시고 협조해주시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아마 다음 11번째 김치쿠라는 하반기에 진행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잘 준비해서 모두가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이벤트를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