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여진 소설을 앉은 자리에서 완독한 경험이 있으신가? 아무리 글보단 영상이 대세가 된 세상이라지만, 경험을 빗댐에 있어 책이 빠지면 뭔가 아쉽다. 잘 만든 게임은 어떠한가? 플레이하는 동안 몰입감이 뛰어난 작품도 있을 것이고, 신선한 설정과 매력으로 충격을 주는 경우도 있다. 동시에 "끄고 나서 자꾸만 생각나는 게임"도 있다. 그 세계가 재밌어서, 인물들이 궁금해서, 남겨진 여지를 붙잡고 있게 된다.
국산 인디 추리 게임 <There is NO PLAN B>는 그렇게 여운이 긴 게임이었다. 아구몬과 피카츄의 혼종인 '아구-츄' 도난 사건으로 시작되는 '유쾌하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부터, 무능한 방구석 탐정 'B'의 '종잡을 수 없는 매력', 자칫 삭막할 수 있는 근미래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 서로에게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주는 '인물 관계'까지. 게임은 흥미로운 물음표들을 플레이어의 품에 남겨뒀다.
궁금증의 꼬리를 타고 올라가 슈퍼웨이브 스튜디오 윤창식 대표를 만나봤다. 5명의 인원이 2년 동안 "아트와 스파인2D 그래픽을 '깎아 가며' 만들었다"는 데모. 추리 게임 주인공이 이렇게 허당이어도 괜찮은 걸까? 히키코모리인데 친구가 많은 주인공 'B'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암울한 사이버펑크 세계관과 범죄 사건 사이에서, 어떻게 먹고 사는 일상에 집중한 "소프트코어 사이버펑크"가 탄생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름부터 웃긴 '아구-츄'는 일회성 개그 소재도 아니고 사건의 핵심에 등장하는데, 아무 탈이 없는 것일까? 주인공 'B'가 그랬듯, 오늘 기자 또한 그 많았던 물음표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디스이즈게임 김승준 기자
※ <There is NO PLAN B>는 현재 잇치 아이오에 에피소드 1의 중후반까지 무료 데모를 공개한 상태입니다. 데모를 플레이하고 인터뷰 기사를 읽으신다면 더 재밌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차후 개발 일정
에피소드 1 완결 무료 공개: 2024년 10월
에피소드 3+에필로그 최총 출시: 2026년 10월 목표
스팀 정식 출시 예상 가격: 30달러(약 4만 원)
<There is NO PLAN B>는 꽤나 독특한 게임이다. 추리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도 아구몬의 머리와 엉덩이에 피카츄의 귀와 꼬리가 달린 '아구-츄'(?)를 빼앗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몸싸움으로 추정되는 흔들림 끝에 여성의 가방에서 바닥으로 쏟아지는 다마고치. 용의자는 피해자의 지갑과 다마고치만 훔쳐 달아난다. 2070년 근미래 배경인데, 다마고치라니? 아니 일단, 저작권 문제는 괜찮은 걸까?
당연하지만 기획 초기부터 저작권 문제는 확인하고 도입한 설정이라고 한다. 윤창식 대표는 "사이버펑크라는 키워드는 모순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미래인데, 레트로 요소도 많은 게 이 장르다. 아직도 벽돌 다마고치를 쓰는 아날로그적이고 값비싼 취향은, 물음표를 한 번 찍는다. 엉뚱한 동시에,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다. 하찮은 사건이지만 해결에 대한 기대감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인공 'B'와 여러 인물들은, 다소 가볍게 시작되는 사건에 발을 들인다. 하지만, 전개되는 서사나 추리의 깊이는 전혀 얕지 않았다. 안드로이드와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평범한 음식 대신 '영양팩'을 주식으로 먹어 온 소울 시티 '슬럼'의 사람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능한 '히키코모리'지만 우여곡절 끝에 사건의 진실에 도달하는 'B'까지. 상식을 넘어서고, 클리셰를 거부하는 설정들이 이어진다.
플레이어는 'B'의 1인칭 시점에서 게임을 진행한다. 그리고 'B'라는 인물부터 전형적인 추리물의 주인공들과는 다르다. 소울 시티 안에 있는 700명이 넘는 사설 탐정 중에서도 600등 밖에 있는 무능한 탐정. 거기다 사건 현장에 직접 가지도 못하는 방구석 히키코모리다.
'B'가 사건 의뢰를 수락하게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친구 '닐'의 도움으로 투자에 성공해 거액의 돈을 벌게 되는 주인공은 입금이 되기도 전에, 버츄얼 유튜버에게 거액의 도네이션(?)을 해버렸다. '닐'은 투자금을 챙겨 도시에서 행적을 감췄고, 사기에 당한 주인공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건을 받는다. 도시 안에서 욕만 먹던 경찰 집단 'SCPD'의 뭔가 미심쩍은 수사 협력 계약서에 싸인을 하며, '아구-츄'를 찾아 나선다.
꼭 유능하고 똑똑해야 탐정을 하란 법은 없다. 윤창식 대표는 "글은 그 사람의 거울이다. 저는 천재인 척해봐야 천재가 아닌 사람이고, 천재가 삽질하고 있는 건 모양새도 이상하다. 사기를 당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었는데, 사기를 당하는 주인공이 천재인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럴 바엔 조금 부족해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는, 최근엔 좀처럼 보기 어려워진 성장해나가는 주인공"을 상상했다고 한다.
직접 나가진 못하지만 로봇 'A.I'의 도움과 네트워크 접속 등으로 사건 현장 조사를 진행하는 주인공 'B'. 가장 결정적인 무기는 바로 주변 인물들이다. "처음부터 여자 주인공으로 세팅했지만, 글을 쓰는 자신의 성향처럼 틱틱거리는 사람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던 윤창식 대표는 "히키코모리지만 인간 관계가 넓은" B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 또한 의도한 물음표 중 하나였다. 'B'는 왜 밖으로 나가지 않고, 왜 주변 사람들은 'B'에게 잘 대해주는가. 일반적인 경우처럼 사회적 결여성을 가진 인물도 아니지만, 과거의 일들로 인해 마음의 문제가 있어서 못 나가는(동시에 안 나가는) 것이다. 유진, 키, 미사토, 골든핸드 등 매력적인 인물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가까워진다."
그는 이런 "유대와 인연"이 게임의 주제 의식과도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부족한 'B'라서 해줄 수 있는 이야기들, 'B'라서 주고 받을 수 있는 도움을 통해, 엔딩을 본 사람들이 빚이 많은 'B'도 빛을 봤는데 나도 'B'처럼 열심히 살아봐야지-라는 위로를 받길 원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이런 관계의 중요성은 <There is NO PLAN B>만의 독특한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 그 빛을 발한다.
다음 의문은 자연스럽게 "어떻게 히키코모리인 'B'의 주변에 여러 인물들이 모일 수 있는가"로 귀결된다. 주인공 'B'를 비롯한 다수의 등장인물들은 '고아원' 출신으로 묘사된다. 소울 시티는 상류층이 사는 '어퍼'와 주인공이 사는 빈민가 '슬럼'으로 나뉘는데, '슬럼'에 사는 사람들은 실제 음식, 요리, 생물을 본 기억이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도시의 뒷편에서 강한 힘을 가진 '골든핸드'의 부탁(?)으로 인해 주인공 'B'의 집에는 '유진'이라는 인물이 함께 지내고 있는 상황. '대한제국' 황실 수라간 나인 출신이라는 '유진'은 요리에 능통해, 흩어진 인물들을 '요리'로 한 데 모은다. '영양팩' 외엔 커피도 계란도 접해본 적 없던 인물들은 생경한(누군가에겐 추억인) 음식을 매개로 시간과 경험을 공유한다.
윤창식 대표는 "아트를 담당하는 친구가 <고독한 미식가> 등 요리와 관련된 콘텐츠나 자료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또 저희 어머니를 포함한 한국 사람들 모두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을 흔히 하지 않는가. 중요한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는 건 소중하고 편안한 시간이고, 그런 시간을 게임에 넣고 싶었다. 또한 글로벌 출시를 염두에 둔 게임이다 보니, 한국적인 요소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There is NO PLAN B>를 "소프트코어 사이버펑크"라고 소개했다. "<사이버펑크 2077>이 인간들은 다 죽어가고, 돈만 추구하는 하드코어라면, 저희는 움울하고 박살난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서로 밝게 돕고 사는 이야기를 다룬다"고 말했다. 그런 지점에서 이 게임이 선택한 수위와 방향성은 조금 독특하다. 사이버펑크 장르의 기본 문법은 따르면서, 이들이 해석한 희망을 보여주는 모습이랄까.
"피해자 모니카 씨가 쓰러져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고 지나간다. 치안이 붕괴된 사회, 인간의 노동 가치가 안드로이드보다 낮은 것을 포함해 '어퍼'와 '슬럼'은 극과 극, 파멸을 향해 치닫는 세상이다. 모든 사람들은 어퍼에 입성하길 원하고 있는 디스토피아. 이런 세계를 다루려면 19세가 맞을지도 모른다다. 인간성의 말로를 다루는 건 자극적이니까. 하지만 우리 게임에 맞게 선택한 중간 지점은 15세 이용가였다."
인게임 캐릭터들은 약간의 노출이 있는 의상을 입고 있기도 하고, 감정이 격한 상황에서 욕설도 사용한다. 하지만 독특한 점은 텍스트가 블러처리 되어 있다는 점인데, 설명에 의하면 그 안에 숨겨진 글자는 모두 '와'로 통일되어 있다고 한다. 당연히 욕설로 읽히지만, 이 또한 플레이어의 해석이었다는 것이다. 의상 또한 세계관과 캐릭터의 성격이 반영된 것으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설명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흔한 남녀 연애 코드가 등장하지 않는 점 또한 독특했다. 그는 "서로 보듬어주면서 싹트는 인연이 있다. 10년 동안 지냈는데 친구의 특별한 점을 알게 되는 순간도 있고. 이걸 연애로 풀어내면 호감작에만 집중하게 된다. 또 사이버펑크 세계에서는 성별 개념이 무뎌진다고도 생각했다. 골든핸드씨의 성별은 골든핸드랄까. 외형이 여자지만 그 안에 아저씨가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라고 설명했다.
2070년의 소울 시티는 독특한 세계다. 365일 중에 340일 동안 비가 온다. 의수, 의족과 같은 '의체'를 착용하고 있는 사람이 매우 많은데, 인공 폐는 그 중에서도 접근성이 좋은 의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세상이다. 단순히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비와 담배가 등장한 게 아니다. '추리'로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의수를 착용한 사람, 안드로이드는 지문이 없다. 당연하지만 로봇은 DNA 또한 없다. '추리'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의 영역에서 생물학적 흔적이 부족한 상황이다. 매일 비가 내리는 바람에 사건 현장은 제대로 보존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때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사람들이 피우는 '담배'의 흔적을 추적하는 '니코틴' 조사와 사건 현장을 3D로 다시 살려내는 기술이다.
현장 조사를 시작하면서 게임은 3D로 전환된다. 훼손된 실제 현장 그리고 복원된 가상의 현장을 오가며 'B'는 증거를 찾는다. 그리고 증거를 따라간 끝에는 용의자와 직접 대면해 정보를 취득하는 동시에 중요한 타이밍에 체포를 해야 하는 '긴급체포' 구간이 등장한다.
'긴급체포' 구간의 템포는 매우 빠르고, 높은 텐션을 보여줬는데, 일상 대화 구간에서는 '비주얼노벨' 장르의 다소 차분한 문법을 따랐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그는 게임 템포를 더욱 빠르게 개선할 것이라 말했다.
"지금은 게임이 비주얼노벨에 가까운데, 다른 멤버는 더 액티브한 요소가 많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냈다. 사건의 시작을 지금보다 더 앞으로 옮기는 등 1챕터 구성을 재배치하면서, 좋은 요소는 살릴 생각이다. 궁극적으로는 1/2에서 1/3 분량으로 줄이는 게 목표로, 지금의 템포에서도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장점들은 최대한 살리고 싶다."
윤창식 대표는 <There is NO PLAN B>가 "<역전재판>, <단간론파>의 뒤를 잇는 재밌는 서브컬처 어드벤처 게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현재 공개된 데모 이후에 등장할 '용의자 검증' 구간은 <역전재판>의 법정 싸움과 유사한 구도가 될 것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질문해봤다.
"<역전재판>은 추리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게임이다. 교과서를 써놓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익숙함보다 낯섦이 많은 게 꼭 좋은 게 아니다. 그늘에서 피하려고 해봤자 못 피할 걸 알기 때문에, 큰 틀은 따라가되 우리만의 요소를 넣어서 다르게 만들었다. 우리 게임은 사건 수사를 하고, 범인을 잡아가서 시작하기 때문에 사전 정보가 많은 편이다. 여기서 또 반전이나 생각하지 못한 요소가 등장하는 구조가 될 것이다"
슈퍼웨이브 스튜디오의 전작은 <그 섬: 안개 속으로>라는 방탈출 미스터리 게임이었다. 윤창식 대표가 대학교 동아리 인원을 모아 만들었다던 이 게임은 지금의 <There is NO PLAN B>가 있게 해준 배경이었다. 그는 성우 녹음까지 했던 당시의 게임에 아쉬움도 많았지만, 그 때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기획이 진행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 섬>을 개발했던 인원 중 슈퍼웨이브 스튜디오에 남은 사람은 윤창식 대표 1명. 현재 <There is NO PLAN B>를 함께 만드는 멤버들은 <그 섬>을 보고 모인 사람들이다. 윤창식 대표는 PD, PM, 스크립트 작성의 역할을, 테크니컬 아티스트는 스파인2D 작업을 했다. 아트를 맡아준 인원도 있고, 프로그래머와 사운드를 담당하는 멤버까지 총 5명이 이 게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에피소드 3과 멀티 엔딩을 포함한 에필로그까지 <There is NO PLAN B>의 최종 출시 목표 일정은 2026년 10월이다. 총 4년의 개발 기간을 상정한 것.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아트, 그래픽, 사운드, 스토리, 설정 등에 크게 공을 들이는 이유에 대해 그는 "결국 인연의 힘이다. <그 섬> 이후 모르던 사이가 하나하나 이어져서 끝까지 가고 있는 것이고, 팀원들 모두의 능력을 담고 싶다"고 언급했다.
<그 섬> 시절부터 게임의 안팎에는 여러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검은방>, <회색도시> 시리즈로 유명한 '수일배' 진승호 디렉터는 전작과 이번 게임 모두 후원을 했었는데, <그 섬>에선 닉네임을 뒤집은 '배일수'라는 등장인물도 있었다고 한다. 음악을 만들어주고 있는 '카루트'나, 스토브 입점 전 아무런 인연이 없던 시절에도 토끼굴 개발 공간을 지원해준 스마일게이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인공 'B'가 주변 인물들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듯, 게임 또한 여러 사람들의 손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There is NO PLAN B>라는 게임 타이틀도, 주인공 이름 'B'만 기억하시던 어머니의 말실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유저 피드백을 반영하며 바뀌는 과정을 지켜보는 맛이 있는 게임, 최종적으로는 글로벌 출시를 하는 게 목표라 말한 윤창식 대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