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욕도 많이 먹었죠"
인터뷰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흑역사'를 웃으며 꺼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게임(현 NHN엔터테인먼트)을 떠나 스타트업에서 인생의 제 2장을 펼치고 있는 정욱 넵튠 대표는 그게 가능한 사람이다.
호탕해 보이는 웃음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실패를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분야든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다. 특히 게임 사업에서 성공을 보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는 회사 대표의 역할이 실패한 다음을 대비하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두 번째 벤처 열풍이라고 불리던 2012년 당시, 정 대표는 대기업 수장 자리를 뒤로 한 채 스마트폰 게임 시장에 뛰어들었다. 남들이 다하는 RPG 대신 캐주얼 게임으로 글로벌 시장을 통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오는 10월 코스닥 상장까지 바라보며 제 2장 2막을 준비 중이다. 올 하반기 어느 때보다 더 바빠질 정욱 넵튠 대표를 디스이즈게임에서 만났다.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송예원 기자
# 한게임의 수장에서, 독립 개발사의 대표가 된 지 5년
2012년은 본격적으로 스마트폰 게임 열풍이 불던 해다. 2009년 아이폰이 발매 2년 5개월 만에 국내에 상륙했고, 그로부터 또 2년이 지나서야 애플 앱스토어 내 게임 카테고리가 오픈됐다. 그리고 2012년, 카카오톡에서 게임센터가 열렸다.
많은 인력과 비용이 필요한 온라인게임과 스마트폰 게임은 달랐다. 3~4명으로 구성된 10명 이하 소규모 인력으로도 게임을 개발하는데 충분했다. 선데이토즈, 넥스트플로어 같이 수백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도 등장했다. 스마트폰 게임 열풍은 스타트업 열풍으로 이어졌다. 큰 게임회사 임원이나 고위 개발자들도 하나 둘 나와 자신의 회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봉에 한게임 정욱 대표대행도 있었다.
“일단 미신이 있으니 N자로 시작하고 싶었는데, 마침 점을 보니 물과 관련된 이름을 지으면 좋다 더라고요” 넵튠, 바다의 왕 포세이돈이자 해왕성을 지칭하는 이름의 회사가 등장했다. 공식 석상에서는 늘 정장이었던 그의 차림새부터 가벼워졌다. 청바지에 티셔츠, 제 2벤처 붐을 실감 나게 했다.
하지만 회사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다. NHN 일본 서비스 서비스 개발랩장 출신의 권상훈 CTO, 한게임 운영총괄을 지낸 조한상 COO 등 게임로프트, CJ인터넷, 삼성전자와 같이 내로라하는 IT 회사 전문가들이 한데 모였다.
일단 잘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부에는 한게임 출신이 적지 않았다. 정욱 넵튠 대표의 선택은 ‘야구’. 모바일은 처음이었지만, 개발자들은 게임 장르에 대한 노하우는 있었다. 8개월 만에 <넥슨 프로야구 마스터>라는 게임을 내놨다. 퍼블리셔는 스마트폰 게임에 첫 도전장을 내민 넥슨. 2년 뒤에는 <전서의 터치헌터>라는 RPG와 사천성 게임도 출시했다.
<넥슨 프로야구 마스터>는 먹고 사는데 보탬은 됐다. 지난 5년간 매출 약 100억 원. 하지만 ‘성공’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많이 아쉬웠다. 독특한 전투시스템을 장점으로 내세웠던 <전설의 터치헌터>는 사실상 실패였다. 그리고 정작 회사를 먹여 살린 건 캐주얼 ‘사천성’ 게임 <라인 퍼즐 탄탄>이었다.
<라인 퍼즐 탄탄>의 성공은 메신저 ‘라인’ 주 무대인 일본과 동남아 시장이었다. 매출 1위를 차지한 건 아니어도 2년 넘게 꾸준히 50만 명 이상이 게임을 즐기고 있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매출을 거뒀다. 물론 정욱 대표의 이력이라든지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 성적을 감안하면 고개가 갸우뚱할 수 있지만, 회사 입장으로서는 ‘성공’이었다.
# “원래 게임 사업의 성공은 얻어 걸리는 거예요”
<라인 퍼즐 탄탄> 이야기가 나오자 정욱 대표가 꺼낸 첫마디다. 다시 말해 성공을 위한 장르의 선택이라든지 시장타깃팅이라든지 대단한 전략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넥슨 프로야구 마스터>, <전설의 터치헌터> 등 이른바 미드코어 장르 게임들의 줄지은 부진에 이어 등장한 <라인 퍼즐 탄탄>을 두고 일각에서는 넵튠은 캐주얼게임 하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시기를 보면 그럴싸했다. 그 후로 이렇다 할 신작도 없었다는 점도 설득력을 높였다. 지난해는 <탄탄 사천성 for Kakao>를 내놨고, 올 하반기 예고한 라인업도 ‘카카오 프렌즈’ IP를 만난 사천성 게임이다.
하지만 정욱 대표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사천성’으로 회사가 먹고 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그였다. “게임을 잘 준비한 건 사실이지만, 모든 걸 완벽히 준비했다고 해서 성공하라는 법은 없어요.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은 딱 게임 사업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한게임 시절 <테라>는 최고 실력의 개발자가 모여 최고 수준의 마케팅 지원을 받으며 출격했지만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당장 넵튠에서는 야심차게 준비했던 <전설의 터치헌터>에서 큰 실패를 맛봤다. 그리고 <라인 퍼즐 탄탄>은 성공했다.
결국 게임의 흥행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결국은 늘 실패를 염두에 두고 그 다음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따라서 한 회사가 한 게임 ‘올인’하는 일반적인 개발사의 모습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게임 사업은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지 못해요. 성공한 게임은 손에 꼽고 70% 이상은 실패한다고 봐야 하죠. 저만 해도 그렇고요. 그런데 게임 하나에 수십억 원의 투자를 받으며 회사의 사활을 건다? 이 건 게임 사업의 본질하고도 다르다고 생각해요”
# “유행 좇아 가는 게임 중에 크게 성공한 게임이 있나요?”
다양한 게임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을 선호하는 정 대표지만 그에게도 확고한 원칙이 하나 있다. ‘절대 트렌드를 쫓지 않는다’
2012년 <넥슨 프로야구 마스터>를 만든 이유는 PC플랫폼에서는 흥행한 야구 시뮬레이션게임을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설의 터치헌터>를 만들 때도 조작부터 전투 방식까지 다른 게임과의 차별점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뒀다. 지금 사천성에 집중한 것도 일본의 그 많은 퍼즐게임 중 사천성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 정 대표의 마음을 흔든 탓이다.
모바일게임시장은 이미 과포화 상태다. 매출순위 1위~10위에는 웬만해서 새로운 게임이 진입하는 일이 없다. 선점을 뺏긴 레드오션에서 뒤늦게 후발주자로 뛰어들었는데 유행하는 장르에까지 도전하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라는 게 정 대표의 주장이다.
“온라인게임 시장도 마찬가지였어요. 밀리터리 FPS가 숱하게 나왔지만 <서든어택>, <아바>, <스페셜포스>를 넘은 게임이 없었고, MMORPG는 <리니지1. 2>,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지금까지도 인기를 얻고 있어요.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후발 주자들보다 더 오래 말이죠.”
현재 넵튠이 사천성을 내세워 해외 시장에 주력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세계적으로 3매칭 퍼즐 게임은 몇 조 단위로 시장이 형성돼 있지만 사천성 시장은 거의 없어요. 특히 북미 유럽에서는 <상하이 마종>이라는 이름 정도로 아는 게 고작이죠. 심지어 퍼블리셔들이 꺼려할 만큼 생소해 해요. 이건 허들이 될 수도 있지만, 그만큼 가능성도 높다는 거에요. 그래서 사천성 시장을 키워서 3매칭 퍼즐의 1/10만 규모를 만들어 보는 게 목표에요.”
온라인게임을 경험한 많은 개발자나 사업관계자들은 모바일게임 시장을 어려워했다. 게임의 장르, 규모, 퀄리티까지 어느 것 하나 성에 차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고사양 컴퓨터에서도 간신히 돌아가는 MMORPG를 만들다가 작은 화면에 심지어 오토플레이까지 가능한 모바일 RPG는 게임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수백억짜리 프로젝트만 보다 퍼즐이나 러닝게임 등을 보면 너무 작아 보였다.
<테라>, <메트로 컨플리트>, <킹덤언더파이어>, <프로젝트R1> 등 굵직한 온라인게임을 휩쓸던 N한게임의 선봉장까지 지냈던 그는 어떻게 눈높이를 낮출 수 있었던 걸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당시 진행했던 게임들이 모두 성과를 잘 냈더라면 저 역시도 대작만 찾는 마인드는 못 바꿨을 거예요. 회사도 나오지 않았을 테고요. (웃음) 정말 게임 사업은 진인사대천명이라니까요.”
# 적극적인 M&A, 목표는 IP
넵튠은 지난 22일 코스닥시장을 위한 예비심사에 통과했다. 오는 10월 정식 심사까지 통과되면 대신밸런런스제 1호를 통해 합병상장 된다. 먹고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는 회사지만, 상장이 된다면 회사는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여야 한다. 더 많은 수익이 필요하다. 돈을 많이 버는 RPG 등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
하지만 넵튠은 <넥슨 프로야구 마스터>나 <사천성> 외 라인업을 늘리지 않을 계획이다. 상장 후 더는 성급한 도전은 어렵다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 대표다. 대신 적극적인 M&A를 통해 좋은 파트너사와 함께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른바 ‘넵튠 패밀리’를 만들겠다는 것. 회사 차원에서는 안정적이면서도 획기적인 게임을 위함이다.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결정한 것을 열심히 할 때 가장 좋은 퍼포먼스가 나오더라고요.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팀에 기반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대표적인 사례가 소규모 개발사 아크베어즈다. 10명 규모의 이들이 서비스하고 있는 <블랙 서바이벌>은 <배틀로얄> 방식의 시스템을 적용한 웹 기반 모바일게임으로 주목을 받았다. 수익 측면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은 내지 못하고 있지만 꾸준한 업데이트와 더불어 OST 제작, 웹툰 연재 등으로 확고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당장의 성공보다는 오랜 서비스를 통해 고유의 IP를 만들겠다는 게 목표다. [관련기사] 카드뉴스- 게임 개발자가 언제 죽는지 아세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포켓몬 고> 같은 현상만 보더라도 장기적으로는 IP가 꼭 필요하다는 게 정 대표의 생각이다. “상장을 준비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VR, AR게임은 안 만드냐는 거였어요. 근데 <던전앤파이터>라면 아마 모바일이어도, VR이어도 될 거에요. <포켓몬고>의 <포켓몬스터>는 수십 년을 키우고 관리한 IP예요. 좀더 길게 봤을 때 그런 걸 만들고 싶은 거죠”
“꿈은 라이엇게임즈와 같은 회사를 만나는 거예요. 처음 <리그 오브 레전드>가 한국에서 수많은 퍼블리셔에게 거절을 당했었죠. 국내 게이머들이 북미 서버를 찾아가서 즐길 정도였지만, 당시 트렌드나 성공공식에서는 크게 벗어났었으니까요. 그런 회사를 패밀리로 만났으면 좋겠어요. 뭐, 이미 만났을지도 모르는 거고요”
# "지금 무서운 건 <검과마법>이에요"
하반기 넵튠은 쉴 틈이 없다. 당장 9월 <프렌즈 사천성>이 국내에 출시된다. <프로야구 마스터>는 일본선수협회 라이선스를 확보해 일본 시장에 진출한다. 이후에는 북미와 유럽시장에 <판다 퍼즐 마종>(PPM)이라는 이름으로 사천성 게임을 론칭할 예정이다. 중국에서는 파트너사 란투게임즈가 <짱구는 못말려> IP를 확보한 <리스킨한 사천성>이 출격을 앞두고 있다.
눈에 띄는 건 역시 ‘해외 진출’이다. <프렌즈 사천성>을 제외한 대다수 스케줄이 해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본격적인 글로벌 시장을 앞둔 정 대표는 중국 게임의 기세를 가장 염려했다. 단순한 물량공세의 문제가 아닌 기술력에서 이미 큰 격차가 벌어졌다는 게 정 대표의 설명이다. 그래서 그가 뽑은 '최근에 주목하는 게임'은 다름 아닌 <검과 마법>이다.
“최근 출시된 <검과마법>을 보고 너무 깜짝 놀랐어요. MMORPG가 단 290MB더라고요. 그래픽도 훌륭하고요. 그런데 업계를 둘러보면 이에 대해 충격을 받으시는 분들이 거의 없더라고요. MMORPG가 아니다, 중국 웹게임이다 이런 식의 폄하를 많이 하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국내에서 290MB짜리 MMORPG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한 회사가 얼마나 될까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에요.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