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 오브 레전드>의 '탑'은 중요한 오브젝트로 꼽히는 '드래곤'과 가장 멀리 떨어진 라인입니다. 게다가 탑은 1, 2차 타워 사이의 거리도 넓음은 물론, 홀로 상대 라이너와 정글러의 갱킹을 받아내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싸워야 하죠. 따라서 <리그 오브 레전드>의 탑은 '고독함'과 '패기'를 상징하는 라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리그 오브 레전드> 초창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라인별 연대기 4번째 시간, 국밥처럼 든든한 챔피언부터 칼끝 위에서 노는 승부사 기질까지 갖춘 '고독한 승부사', 탑 라인 변천사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객원 기자
본 콘텐츠는 디스이즈게임과 오피지지의 협업으로 제작됐습니다.
탑 라인은 <리그 오브 레전드>에 제대로 된 포지션 개념이 생기기 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형태로 운영됐습니다. 효율적인 미니언 분배를 위해 유저 중 한 명은 정글에 가야했고, 드래곤이 있는 바텀에 힘을 주기 위해 두 명의 라이너가 배치됐습니다. 그렇게 탑은 자연스레 '홀로' 서는 라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런 경향은 포지션이 정립된 이후에도 그대로였습니다. 특히 탑은 홀로 라인을 서야 하는 만큼, 1:1 교전 능력이 강하거나 팀의 든든한 전위를 맡을 수 있는 브루저, 탱커류 챔피언이 선호됐는데요. 서포터와 정글러에게 탱킹을 맡기기엔 성장력이 부족했고, 원거리 딜러나 미드 라이너에 해당 역할을 맡길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절 랭크 게임 밴픽률 1위를 고수하며 모두가 인정하는 'OP' 챔피언이 있었는데요. 바로 '쉔'입니다.
당시 쉔의 위상은 엄청났습니다.
패시브 '기의 일격' 덕분에 쉔은 체력 아이템만 갖춰도 꽤 쏠쏠한 딜을 뿜어냈고, '날카로운 검'의 체력 회복으로 인해 라인 유지력도 좋았죠. '그림자 돌진'의 도발 범위도 지금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특히 궁극기 '단결된 의지'는 자신에게도 보호막을 씌울 수 있는 무시무시한 스킬이었습니다.
따라서 쉔은 전략전술이 부족했던 <리그 오브 레전드> 초창기, 다른 라인에 있다가도 궁극기를 통해 순식간에 전장에 합류하는 플레이로 인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챔피언으로 꼽혔습니다. 과거 랭크 게임에서 실수로 쉔을 상대에게 내주는 순간, 팀원들의 따끔한 질책이 이어질 정도였으니까요. 또한, 쉔은 낮은 티어에서 아무무, 말파이트, 블리츠크랭크와 함께 '4대 거석 신앙'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쉔의 위력은 프로씬에서도 드러났는데요. 쉔은 최초의 롤챔스, '아주부 챔피언스 스프링 2012'에서 무려 152회나 밴 됐고, 출전한 경기에서도 4승 1패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쉔은 스프링 시즌과 윈터 시즌까지 항상 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OP'의 자리를 굳건히 하게 됩니다.
잠시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보자면, 당시에는 정말 다양한 챔피언이 탑에 등장했습니다. 지금은 정글로 활용되는 '자르반 4세'나 '리 신', '올라프' 역시 탑 라인을 주름잡은 시기가 있었죠. 특히 리메이크 전 '이렐리아'와 '잭스'는 모두가 인정하는 숙명의 탑 라이벌이었습니다. 당시 커뮤니티를 달군 단골 주제가 '이렐리아와 잭스 중 누가 더 강한가'였을 정도니까요.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현재 고정 스펠처럼 쓰이는 '텔레포트'가 당시에는 잘 활용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프로 선수들도 점화를 선택하는 걸 당연시 여겼죠. 덕분에 당시 탑 라인은 지금과 달리 솔로 킬이 자주 일어났고, 프로 경기에서도 혈투가 펼쳐지곤 했습니다. 특히 '막눈' 윤하윤과 '건웅' 장건웅의 올라프 미러 매치는 지금도 손꼽히는 명장면입니다.
2013년은 체력이 높은 탱커 챔피언들이 급부상한 시기로 꼽히는데요. 당시 '워모그'와 하위 아이템 '거인의 허리띠' 효율이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탑과 봇 라인을 바꾸는 일명 '라인 스왑' 메타가 유행한 것 역시 탱커 챔피언들의 입지를 단단히 만들었습니다. 자연스레 탑에는 2:1 구도를 버틸 수 있고, 성장이 더뎌도 탱킹력이 보장되는 탱커 챔피언들이 주를 이뤘죠.
덕분에 '레넥톤'과 '쉬바나'는 탑 라인의 절대 강자가 됐고, '문도 박사' 역시 '오염된 대형 식칼'을 통해 2:1 라인전에서도 원활히 파밍 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세 챔피언은 무난한 라인전 능력과 탱킹력을 가진 대신, 상대를 솔로 킬할 힘까진 없었습니다. 따라서 탑 라인은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는 장소에서 서로 방치된 채 지루한 파밍을 반복하는 '쉼터'로 변했죠. 유저들은 이를 두고 '또바나-레넥똔-문또'라는 별명을 붙여 비판했지만, 다른 챔피언들을 탑에서 쓰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탱커 챔피언 강점기는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여세를 몰아 프로씬까지 지배했던 '쉬바나', '레넥톤', '문도'는 2014 롤챔스 스프링을 기점으로 조금씩 픽률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현재는 레넥톤 정도만 협곡에 등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결국 라이엇은 워모그 등 탱커용 아이템을 너프하며, '또바나-레넥똔' 구도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빈자리를 리메이크된 '피오라'와 '다리우스', '럼블' 같은 챔피언들이 차지하면서 또다시 브루저 챔피언들이 탑 라인을 지배하기 시작했죠.
이 외에도 탑 라인에는 아주 큰 변화가 생겼는데요. 바로 '텔레포트 메타'가 도래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2014년까지만 해도 절대다수의 탑 라이너는 점화를 선택했었는데요. 3월 20일, 순간이동을 아군 포탑에 사용할 경우 쿨타임이 100초 감소되는 버프가 진행됨에 따라 '텔레포트 시대'가 탑 라인에 도래하게 됩니다. 그들만의 라인전을 펼치는 대신, 필요한 순간에는 텔레포트를 통해 아군에게 합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셈입니다.
'텔레포트 시대'를 호령한 대표적인 탑 라이너는 SKT T1에서 활약했던 '마린' 장경환인데요. 마린은 한 때 전 세계를 지배하며, 전성기 SKT T1를 이끈 최강의 탑 라이너로 평가되는 선수입니다.
사실 마린의 데뷔 초는 꽤 암울했습니다. 그는 솔로 랭크 1위를 달성하며 많은 이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팀 게임에서는 별다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심지어 챔피언 폭도 좁았습니다. 특히 쉬바나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건 마린의 치명적인 단점으로 꼽혔죠. 하지만 마린은 2014년 등장한 '텔레포트 메타'에 완벽히 적응하는 한편, 특유의 오더 능력을 마음껏 선보이며 기량을 폭발시켰습니다.
2015년은 그야말로 '마린'의 해였는데요. 마린은 당시 롤드컵 MVP에 선정될 정도로 메타를 주도했습니다. '피오라'를 선택해 라인전부터 상대를 찍어 누르는가 하면, '나르'나 '럼블'을 골라 갱킹을 회피하고 텔레포트를 통해 격차를 벌리곤 했죠. 특히 CJ와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상대의 진입을 막기 위해 미니언을 지운 장면은 그가 얼마나 텔레포트 메타에 능한 선수인지를 잘 보여주는 명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미드상륙작전'으로 불린다 (출처: OGN)
쿠 타이거즈에서 활약한 '스멥' 송경호 역시 텔레포트 메타를 통해 진면목을 드러낸 선수입니다. 스멥은 '피오라', '리븐', '다리우스' 등 브루저 챔피언을 능숙히 다루며 '탑 캐리'의 진수를 선보였는데요. 특히 리븐으로는 롤챔스 최초로 '탑 라이너 펜타킬'을 달성하기도 했으며, 2016 롤드컵에서는 케넨으로 G2의 모든 챔피언을 지워버리는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탑 라인은 어떤 구도로 흘러가고 있을까요. 현재 <리그 오브 레전드>에는 다양한 버프를 제공하는 '원소 드래곤'과 빠르게 타워를 철거할 수 있는 '공허의 전령'이 핵심 오브젝트로 꼽힙니다. 그만큼 탑 라이너의 라인전 능력과 텔레포트를 활용한 타 라인 개입도 더욱 중요해진 상황입니다.
따라서 탑에는 라인전에서 상대를 찍어 누르는 한편, 이를 토대로 경기를 굴릴 수 있는 '공격적인 챔피언'이 대세로 떠오르게 됩니다. 반면 공격적인 챔피언들이 라인전에서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면 힘이 빠지는 경향이 다분하기에 국밥처럼 든든한 '탱커 챔피언'에 대한 수요도 여전한 상황이고요.
이런 흐름은 2020 롤드컵에서도 잘 드러나는데요. 롤드컵 직전 펼쳐진 서머 시즌만 하더라도 많은 선수들은 탑 라인에서 공격적인 챔피언을 활용하며 상대와의 격차를 벌리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반면, 롤드컵에서는 '오른', '쉔'과 같은 탱커 챔피언들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오늘(21일) 기준, 2020 롤드컵 밴픽률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탑 챔피언은 오른(92%), 레넥톤(73%), 카밀(69%), 볼리베어(45%), 쉔(41%)입니다. 이 중 속칭 '칼챔'에 해당하는 레넥톤과 카밀을 제외하면 오른, 볼리베어, 쉔은 사실상 탱커에 해당하죠. 많은 선수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택하기보다, 다소 성장에 어려움을 겪더라도 1인분을 할 수 있는 챔피언을 선호한 셈입니다.
탑은 1:1 라인전이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데다가 다른 라인에 비해 경기 중 고립되는 비율이 높은 라인입니다. 따라서 게임을 캐리 할 수 있는 여건이 잘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죠. 때문에 많은 탑 라이너가 게임의 승패보다 상대방과의 라인전에만 집중하는 듯한 플레이를 펼쳤고, 이에 속칭 '탑신X자'라는 웃지 못할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텀과 아군 정글러가 상대에 쫓겨 협곡을 헤매고, 미드조차 라인전에서 밀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잘 성장한 탑 라이너가 한타를 지배하는 것만큼 멋진 장면은 없습니다. 모두가 탑의 존재감을 잊어갈 때쯤, 가장 먼 곳에서 내려와 팀을 리드하는 모습이 마치 영화 속 '슈퍼 히어로'를 연상케 하죠.
탑 라이너 여러분, 모쪼록 오늘도 여러분이 주도하는 '고독한 상체 게임'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탑 캐리가 힘들다 하더라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일만큼 멋진 건 없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