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리자드가 개발, 1998년 출시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널>은 게이머들에게 이정표와도 같은 타이틀입니다. 그 시절 우리는 홀린 듯 PC방으로 달려가 친구들과 '로스트 템플', '헌터 무한' 등을 즐겼고, 집에 돌아오면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를 보며 임요환, 홍진호 등 많은 스타 선수들을 응원했죠.
어느덧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된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특히 오늘(9일)은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널>이 국내에 출시된 지 정확히 23년째 되는 날인데요. 기념비적인 날인 만큼, 수많은 스타리그 명장면 중 3개를 골라 함께 돌아보려 합니다. 치킨이 오기도 전에 끝났던 '3연벙'부터 모두를 친구로 만들었던 최후의 스타리그까지, 그 시절 스타리그 속으로 떠나보시죠. / 디스이즈게임 이형철 기자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 선수가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을 꼽으라면 단연 임요환과 홍진호일 텐데요. 테란과 저그, T1과 KTF 등 두 선수는 종족부터 소속팀까지 모든 것이 대척점에 서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두 선수는 대회에서 만날 때마다 명경기를 만들곤 했죠.
그중 가장 유명한 경기가 바로 에버 스타리그 2004, 4강전이었습니다. 설령 <스타크래프트>를 모르는 사람도 안다는 그 '3연벙'이 등장한 경기죠.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최고의 라이벌이 정상을 두고 맞붙는 만큼, 팬들의 기대치는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경기는 다소 허무한 3-0, 임요환의 승리로 막을 내렸는데요. 단순히 스코어만 일방적이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임요환은 3세트 내내 경기 초반 소수의 마린과 SCV를 활용, 벙커를 짓고 승부수를 거는 '벙커링'으로 빠르게 홍진호를 제압했는데요. 경기 내내 단 하나의 전략으로 승리를 따낸 겁니다. 반대로 말하면 홍진호는 같은 전략에 세 번이나 당한 셈이죠.
당시 세 경기의 시간을 모두 합쳐도 불과 '22분 42초'에 불과했기에, 팬들 사이에서는 많은 말이 오갔습니다. '치킨이 도착하기도 전에 게임이 끝났다', '경기보다 광고 시간이 더 길었다'라는 이야기가 쏟아졌죠. 또한, 테란의 초반 벙커링 대처법에 대한 의견과 토론이 여러 커뮤니티를 뒤덮기도 했습니다. 많은 이가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에서 가장 임팩트 있었던 순간으로 3연벙을 꼽는 이유입니다.
3연벙은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를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출처: OGN)
2004년 펼쳐진 SKY 프로리그 결승전은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에 있어 또 하나의 이정표에 해당합니다. 당시만 해도 e스포츠 결승전은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등 주로 수도권에서 열렸는데요. 아무래도 지방에서 경기를 펼치기엔 관중 동원이 어려울 거라는 목소리가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려 속에 부산 광안리에서 개최된 2004 SKY 프로리그 결승은 말 그대로 '대박'이었습니다. 주최 측 추산 무려 10만 명의 구름 관중이 광안리에 몰려들었고, 순식간에 모래사장이 가득 찼습니다. 탁구대에서 시작된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가 바닷가까지 무대를 확장한 셈입니다.
양팀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출처: OGN)
몰려든 관중 수에 걸맞게 한빛 스타즈와 SKT T1의 결승전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으로 흘러갔는데요.
두 팀은 나도현, 강도경, 박영민(한빛 스타즈)과 임요환, 박용욱, 최연성(SKT T1) 등 수많은 스타 선수가 포진된 만큼, 결승 내내 치열한 공방전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경기는 4:3, 한빛 스타즈가 창단 후 첫 번째 프로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막을 내렸죠. 다만, 한빛 스타즈는 이후 웅진 스타즈로 다시 태어나기까지 오랜 시간 결승에 오르지 못하며 긴 암흑기를 견뎌야 했습니다.
여담으로 이날 성공적으로 결승을 소화한 광안리는 2005년 전기리그부터 프로리그 08-09까지 꾸준히 프로리그 결승 개최지로 선정되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광안리를 두고 'e스포츠의 성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죠. 훗날 블리자드는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런칭 이벤트를 광안리에서 진행하며 그 상징성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는 서서히 마지막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리그 오브 레전드>가 국내에서 상당한 반응을 얻고 있었던 데다, 블리자드가 <스타크래프트 2>를 출시하면서 조금씩 무대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 와중에 펼쳐진 게 '최후의 스타리그'였던 2012 티빙 스타리그입니다.
이 스타리그는 유독 '슬픔이 묻어났던' 리그로 회자되는데요. 해설진들은 경기 중 마지막 스타리그라는 이야기를 자주 내뱉었고, 심지어 허영무와 김명운의 4강전 도중 김태형 해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죠. 그만큼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아쉬움은 팬들은 물론 관계자들마저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2012 티빙 스타리그는 허영무의 3:1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그보다 더 팬들의 가슴에 남았던 장면은 결승 종료 후 무대에 올라온 엄재경, 김태형, 전용준 중계진의 인사였는데요.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의 상징과도 같은 이들이 전하는 '작별'은 모든 팬을 울렸습니다. 특히 엄재경 해설의 멘트는 지금도 많은 <스타크래프크> 팬들의 가슴에 남아있죠.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 친구 한 명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친구는 무엇이냐. 친구는 같이 노는 거다. 같이 노는 애들이 친구다.' 여러분과 13년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놀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정말 감사드리고, 우리는 뭐 그래도, 앞으로도 계속 '친구'일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 엄재경 해설
13년의 역사를 이어왔던 스타리그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물론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가 완전히 소멸된 건 아닙니다. 비록 2019년 폐지되긴 했지만, 블리자드가 직접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e스포츠 대회 '코리아 <스타크래프트> 리그'를 운영하기도 했죠. 현재는 아프리카TV가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를 활용한 'ASL'을 운영하며 국내 유일의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입니다.
스타리그가 사라진 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만큼, e스포츠 역시 그때에 비해 훨씬 구체화됐습니다. 스타리그 시절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형 기업들이 e스포츠를 후원하기 시작했고, 누구나 알법한 스포츠 브랜드가 e스포츠 팀 유니폼을 만드는 세상이 도래했죠. 심지어 한 명의 스타 선수가 수억 원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질 정도입니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부분은 현 e스포츠의 출발점에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냉정히 말해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를 지금도 '주류'로 분류하긴 어렵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 <배틀그라운드> 등 전 세계를 강타한 게임들이 e스포츠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훨씬 많은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e스포츠의 출발과 뿌리에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가 있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겁니다. 탁구대에서 시작된 스타리그는 광안리를 거쳐, 대한항공 격납고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실행에 옮기며 'e스포츠'를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만약 스타리그가 없었다면 게임에 '스포츠'라는 단어가 붙는 것도, 이토록 구체화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죠.
오늘은 유독 그때 그 시절, 기자를 울고 웃게 했던 스타리그가 그리운데요. 오랜만에 '최후의 스타리그'인 2012 티빙 스타리그를 보며 맥주나 한 캔 해야겠습니다. '친구'를 만나러 갈 시간이 된 것 같으니까요.
스타리그가 있어 너무나도 행복했다 (출처: O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