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6일 미항공우주국(NASA)이 ‘쌍 소행성 궤도수정 실험’(DART)에 성공했습니다. 2021년 11월 말 지구를 떠난 DART 우주선을 1,000만 km 거리에 떨어져 있는 소행성 ‘다이모르포스’에 정확히 충돌시킨 겁니다. 실제로 궤도가 바뀌었는지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전문가들은 소행성 충돌에서 지구를 방어할 잠재력을 갖추게 됐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업적에도 막상 지구가 안전해졌다는 느낌을 받기란 어렵습니다. 먼 우주의 위협은 막아냈는지 모르지만, 정작 지상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서입니다. 예전 같으면 자유롭게 즐겼을 온갖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들이 더 이상 가볍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요즘 자꾸만 현실을 기웃거리는 게임 속 ‘멸망 시나리오’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코로나19 판데믹이 발발하기 2년 전 세계보건기구(WHO)가 미지의 감염병 범유행 가능성을 경고했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WHO는 인류가 이전에 만나보지 못한 신종 전염병인 ‘질병 X’가 얼마든 현실이 될 수 있으며, 각국은 전혀 이에 대비가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빌 게이츠 또한 이 가능성을 미리 예의주시하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일각에서는 이미 예견 중인 일이었기에, 코로나19 이전에도 범유행 상황을 현실적으로 묘사한 매체가 종종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학계 조언을 받아 만들어진 영화 <컨테이전>이 대표적입니다. 개봉 당시에는 ‘지루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코로나19 유행 이후 이 평가는 ‘소름 돋게 리얼하다’로 급반전됐습니다.
유비소프트의 <톰 클랜시의 디비전> 시리즈도 ‘달러 플루’ 범유행의 공포를 현실적으로 그려냅니다. 확산 초기 속출한 사망자들이 도심 공원에 임시로 안치되는 장면, 불안을 느낀 시민들이 무차별 폭동과 약탈을 벌이는 등의 모습은 일부 국가에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디비전>에서와 같은 본격적 시스템 붕괴가 일어나지 않았을 뿐, 코로나19로 인해 사회 안전망은 곳곳에서 무너졌고 전쟁에 버금가는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2022년 10월 6일 기준, 전 세계 코로나19 사망자는 총 652만 명으로 집계됩니다. 집계에 소홀한 국가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사망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번 여름 연속적인 기후재난이 세계를 덮쳤습니다. 기록적 폭우와 가뭄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중국에서는 6월부터 8월까지 가뭄이 지속해 양쯔강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미국의 경우 세계에서 가장 건조하다고 알려진 데스밸리 국립공원에 1,000년 만의 폭우가 발생했고, 미주리, 일리노이, 켄터키 세 개 주가 대홍수를 겪었습니다.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세계 각지 빙하 손실이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됩니다. 스위스 알프스, 캐나다 로키산맥, 독일, 미국, 그린란드, 북극과 남극에서 빙하가 재앙적 수준으로 녹아내린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대기 중 수분의 양이 많아지면 전 지구적 물 순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과학자들은 설명합니다.
게임이 흥행하지 못한 탓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기후재앙은 <배틀필드 2042>의 주요 테마 중 하나입니다. 기후변화로 기근이 발생하고 전 세계 경제가 붕괴하는 등 문제가 겹치면서 각지에서 군사 분쟁이 발생하는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패권 국가인 미국과 러시아는 끝까지 살아남아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나라를 잃은 비송환자(No-Pats) 용병들이 양국의 대리전을 치른다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기후 위기는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국가를 더 먼저 위협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올해 여름 폭우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긴 파키스탄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9월 24일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뉴욕 유엔총회 연설에서 “이 재앙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파키스탄은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1% 미만을 차지한다”며 부국들에 책임을 물었습니다.
9월 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네츠크,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 등 우크라이나 4개 주에서 주민 투표를 통한 자국 영토 편입을 확정 지으면서 국제 사회의 불안이 커지고 있습니다. 푸틴이 “영토 수호를 위해 모든 방법을 불사하겠다”고 발언했기 때문입니다.
막강한 핵전력을 가진 러시아가 ‘모든 방법’에서 핵무기를 제외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핵 사용 빌미를 만들기 위해 의심스러운 절차를 통해 합병을 서둘렀다는 분석도 제기됩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가 헤르손 주 일부를 수복하고, 루한스크주로 진격하면서 우려는 더욱 커지는 상황입니다.
핵전쟁 이후를 다룬 ‘뉴클리어 아포칼립스’ 창작물은 전부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냉전 시기 지속한 미국과 러시아의 경쟁적 핵무기 개발, 그리고 쿠바 미사일 위기 등 실제 상황이 대중과 창작자 모두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결과로 풀이되고는 합니다. 게임계에서는 <폴아웃> 시리즈가 대표 사례로 꼽힙니다.
엄밀히 따졌을 때 <폴아웃>이 핵 위기를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지는 못합니다.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핵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대체현실을 다루면서, 실제 역사의 궤적과는 다른 이야기를 선보이기 때문입니다. <폴아웃>의 인류 문명은 핵기술에 열광합니다. 당연히 핵무기는 도처에 즐비합니다. 인류멸망을 초래한 핵전쟁은 그 원인조차 불분명합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시작했다’고 전해질 뿐입니다.
그런데, 핵의 내재한 위험은 외면한 채 그 힘에 경도되고 만 <폴아웃> 속 인류의 모습이 우리와 과연 아주 다를까요? 미국과학자연맹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미국과 러시아 두 나라가 보유한 핵무기는 도합 약 11,300여 개로 추산됩니다. 최근 러시아에서 행방이 묘연해져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는 ‘핵 어뢰’ 포세이돈은 히로시마를 초토화한 원폭의 6,250배에 달하는 파괴력을 가진 것으로 전합니다.
앞선 예시들과 달리 인공지능(AI)은 인류를 당장 위협하는 사례는 아닙니다. 오히려 산업/과학 연구의 방법론으로써 획기적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고안된 AI를 ‘약인공지능’으로 부르며, 약인공지능은 그 유용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게임 등 창작물에서 인류 멸망의 원인이 되는 AI들은 대부분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강인공지능’, 혹은 인간을 뛰어넘은 역량의 ‘초인공지능’입니다.
이런 AI가 등장하는 게임으로는 휴고상을 받은 동명 SF 소설 원작 <난 입이 없지만, 비명을 질러야 한다>(I Have No Mouth, and I Must Scream)가 있습니다. 원작자 할란 앨리슨이 직접 게임 스토리 집필과 목소리 연기로 참여한 것으로 유명한데, 다소 난해한 게임 디자인으로 인해 흥행에는 실패했습니다.
작중의 메인 빌런인 인공지능 AM은 이름을 통해 우연히 자아를 발견한 뒤, 인류에 증오를 품고 단 5명만을 남긴 채 멸종시킵니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장르인 게임은 남은 5명의 시점으로 AM이 마련한 지옥 같은 상황을 마주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무시무시한 설정이지만, 이런 ‘강인공지능’ 이상의 AI 개발은 아직 요원합니다. 따라서 당장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최근 미술계에 벌어진 일대 파란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 방안을 제도적으로 모색할 필요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AI 그림’은 현재 미술계의 심각한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AI의 보조로 그려진 작품이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거머쥔 데 이어, 손쉽게 이용 가능한 각종 AI 그림 툴의 ‘사용례’가 온라인 공간에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AI 툴에 적절한 키워드와 참고가 될 이미지를 입력하면 상업적 퀄리티의 그림이 쏟아집니다. 특정 인물의 외형이나 유명 아티스트의 화풍을 따라 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둘러싼 논란은 다각적입니다. 업계인들의 일자리 위협, 더 나아가서는 산업 구조의 재편 가능성까지 여러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특히 ‘노벨 AI’ 툴의 경우 이미지 무단 게재 사이트 ‘단보루’의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AI를 학습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더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동의 없이 수집된 이들 이미지를 AI가 새로운 그림으로 합성해내면서, 원작자들의 저작권이 침해됐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제도 정비에 힘쓰지 않으면 ‘약인공지능’도 충분히 인간에 크고 작은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