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스팀에 출시된 <바나나>라는 게임이 있다. 무료게임으로 현재 스팀 '최다 플레이 게임' 3위에 올랐다. 기사를 작성 중인 시점에 스팀 유저 20만 명이 <바나나>를 플레이 중이다. 개발자의 공지에 따르면, <바나나>는 스팀에서 65만 다운로드를 달성했다. 이 간단한 게임은 열풍을 일으키면서 투기와 풍자 사이에 화두를 던지고 있다.
<바나나>는 대단히 간단한 클리커 게임이다.
화면 중앙에 등장하는 노란 바나나를 계속 클릭하면 된다. 20만 명 넘는 스팀 유저들이 이 게임에 빠진 이유는 단순하다. 3시간마다 랜덤한 확률로 노란색 바나나가 색깔을 바꾸어 특이한 바나나로 변신하고, 그 바나나를 스팀 커뮤니티의 '장터'에서 사고팔 수 있기 때문이다. 개발진은 오토클릭 프로그램을 막지 않고 있기 매크로를 통해 게임을 켜놓는 것으로 컬렉션을 모을 수도 있다.
<바나나>의 부활은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엑시 인피니티> 등 NFT게임의 부활을 보는 듯하다. 희귀한 수집물을 모으고, 거래한다는 콘셉트에서 <바나나>의 바나나들은 <엑시 인피니티>의 생명체 엑시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몇 가지 지점에서 차이점이 존재한다.
하염없이 바나나를 클릭하는 것이 게임의 전부이다.
먼저 <바나나>에는 어떠한 블록체인 기술이 담겨있지 않으며, 그에 따라서 특정 가상자산에 연결되지도 않았다. <바나나>에서 쓰이는 돈은 스팀 지갑에 충전된 현금으로 한국에서는 KRW를 사용한다. 즉, <바나나>는 스팀 페이지에서 서비스되는 중앙화된 게임이다.
<바나나>의 아이템 상점에서는 해크드 바나나(Hacked Banana), 디스코나나(Disconana) 등의 아이템이 350원에 판매 중이다. 장터에서는 <바나나>의 바나나들이 거래 중인데, 6월 10일에는 1,378달러에 '스페셜 골든 바나나'가 거래됐다. 스팀 지갑에 충전된 금액으로 바나나를 수집할 수 있고, 반대로 게임에서 수집한 바나나를 팔아서 스팀 지갑을 채울 수 있다.
<바나나>에서 정가로 판매 중인 아이템 상점. 일단 매집한 뒤에 후에 가격 인상을 노려볼 수 있다.
개별 아이템 페이지에서는 '크립틱나나' 전체 물량이 25개, '다이아몬드 바나나'는 1:100,000 확률로 등장과 같은 식으로 안내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아이템은 '더 이상 아이템샵에서 살 수 없다'고 쓰여있다. 아이템마다 제각각이다 개수, 확률, 인게임 내 획득 가능 여부 등이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 혼동이 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장터에서 <바나나>의 바나나는 거래되고 있다.
그렇게 낙찰받은 바나나 아이템의 쓸모도 기존 NFT게임과 다르다. 수집물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나나>는 솔로잉 클리커 게임으로, <엑시 인피니티>처럼 바나나를 모아서 강화하는 등의 기능이 없다. 심지어 이 게임은 종료 후 재실행하면 클릭 횟수가 초기화되며, 모은 바나나를 통해 새로운 바나나를 여는 등이 없다. 현재로서는 '브리딩(교배)'을 통한 강화 또한 발견되지 않는다.
<바나나>의 거래 시세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바로 환금 여부다. <바나나>를 두고 유저가 돈 버는 게임으로 보기에는 애매한 측면이 있다.
<바나나>는 스팀 생태계 안에 담겨있고, 앞서 알아본 것처럼 바나나 아이템을 판매한 금액은 스팀 지갑에 저장된다. 밸브는 스팀 지갑에 충전된 돈을 환불해 주지 않고 있다. 한번 스팀 지갑으로 들어간 돈은 다시 나가기 어렵다. 유저는 대신 다른 게임이나 다른 게임 아이템을 사는 데 사용할 수는 있다. 환금을 하고 싶다면 스팀에서 선물용 게임 키를 구한 뒤, 리셀 마켓에서 거래할 수 있겠지만 권장되는 방법은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F2P게임 <바나나>에서 거래가 될 때마다 밸브와 개발자가 수수료 명목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다. 밸브는 스팀 장터에서 아이템이 거래될 때마다 최저 0.01달러까지, 아이템 가격의 5%의 수수료를 가져간다. 스팀의 FAQ를 읽어보면, 통상적으로 게임 개발사들은 장터에서 거래되는 아이템에서 10%의 수수료를 가져간다.
<바나나> 개발진이 가져가는 수수료의 요율을 10%로 가정해 보자. 플레이어가 하루 종일 <바나나>를 켜놓고 거래한 돈으로 100원을 벌었다고 치면, 밸브가 10원, <바나나> 개발진이 10원을 수집물 거래로 벌게 되는 셈이다. 똑같은 조건의 유저를 전 세계에서 1만 명만 모아도 밸브와 <바나나> 개발진은 하루에 각각 10만 원씩을 벌게 된다.
<바나나>의 인기가 지속된다면, 밸브는 거래의 장을 제공하는 것으로 <바나나> 개발진은 NFT 시장이 그러했듯이 희귀한 바나나를 계속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추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이렇게 랜덤하게 드롭되는 바나나 아이템을 놓고 거래가 펼쳐지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이 투기심을 유발하고 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바나나> 유저는 돈이 아니라 스팀 지갑의 크레딧을 벌지만, 밸브와 개발자들은 진짜 돈을 번다.
내가 <바나나> 열풍에 동참하며 귀여운 판다나나를 구매하면 스팀과 개발진은 돈을 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은 참가자들을 커뮤니티에 모아놓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다. <바나나>에는 20만 명 이상의 플레이어들이 존재한다. 절대다수의 스팀 게임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경지를 <바나나>는 달성한 것이다.
지금 이 게임에 참여 중인 참여자들의 심리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바나나>는 2020년대 초를 강타한 NFT게임 열풍과 게임스탑과 도지코인에서 볼 수 있었던 '밈 투자'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물론 스팀 장터를 바탕으로 한 거래 행위마저도 가상자산 거래에 대한 풍자일 수 있다. 개발자 계정이 없는 개인이 실물화폐로 스팀 지갑의 돈을 환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은 변함없다. 포브스의 시니어 기고자 폴 타시(Paul Tassi)는 스팀의 바나나 열풍을 보도하면서 "그저 기괴하다(Just bizarre)"며 "이것이 돈 복사기라면, 봇의 파밍으로 인기를 얻고 있을 때 스팀에 의해 중단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고 봐야겠지만, 대단히 이상하다(very weird)"고 분석했다.
게임의 개발자 스카이(Sky)는 <바나나>의 공식 디스코드 채널에서 "투자 삼아 아이템을 구매하는 것을 추천하지 않으며, 그것은 우리 철학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다음과 같이 스팀 보관함에 바나나가 들어오는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