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기사, 책에서는 많이 보는데 어쩐지 와닿지는 않는 ‘첨단 용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렵고 먼 얘기처럼 들렸던 그 단어들에 우리는 어느새 푹 젖고, 나중에는 그것들 없는 삶을 생각하기 힘든 단계에 이르고는 합니다. 인터넷이 그랬고 애플리케이션이 그랬습니다. 이런 신기술을 조금이라도 일찍 포착해 ‘앞서 나가려는’ 시도 또한 만연해졌죠.
국내에서도 메타버스를 적극적으로 표방하고 나서거나 메타버스 사업 진입을 예고하는 게임사들이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과거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온라인 게임들에 용어의 화제성만 덧입혀 홍보하려는 단순 상술이라는 비판도 제기됩니다.
변화에 가장 민감한 게임업계에서도 지각변동을 미리 포착하려는 탐색은 활발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게임계 최근 최대의 화두는 단연 ‘메타버스’(Metaverse)입니다. 텐센트가 기조발표에서 언급하고, 펄어비스가 신작 게임에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그것 말입니다.
메타버스는 유독 게임과 함께 언급될 때가 많아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기업과 매체들 모두 이런 ‘메타버스’가 세상과 게임판을 바꿔놓을 흐름이라며, 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일반 게이머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습니다. 기업들이 실체도 없는 무언가를 계속 내세우고 있지는 않나, 의심도 듭니다. 메타버스는 과연 무엇일까요? 게임과 메타버스는 무슨 연관이기에 유독 얽힐 때가 많을까요? 게이머들은 그저 ‘메타버스 시대’의 도래를 편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되는 걸까요? 게이머의 입장으로, 한 번 들여다봤습니다 / 디스이즈게임 방승언 기자
최근에서야 부각되는 경향이 있지만, 메타버스라는 어휘의 등장은 꽤 오래전입니다. 미국 소설가 닐 스티븐슨이 1992년작 <스노우 크래쉬>에서 처음 사용한 조어입니다. 소설 속에서도 지금 통용되는 의미와 비슷하게 ‘가상현실로 구현한 인터넷’으로 묘사됩니다.
완전히 낯선 개념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SF 작가들이 상상해낸 개념이 현실에서 그대로(혹은 유사하게) 보편화하면서 해당 명칭이 그대로 쓰이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사이버펑크 거장 윌리엄 깁슨이 82년 단편 <버닝 크롬>에서 처음 제시한 ‘사이버스페이스’(사이버공간) 같은 용어가 대표적입니다.
따라서 메타버스의 개념이 새롭게 ‘발명’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기존하던 개념의 잠재력이 전보다 훨씬 두드러지면서 여러 업계가 관심을 보이는 ‘핫한’ 테마로 부상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닐 스티븐슨의 <스노우 크래쉬> (출처: 아마존)
용어 자체를 뜯어보면 메타버스는 접두어 ‘메타(meta)’와 세상을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입니다. '메타'는 여러가지 정의가 있습니다. 영어 체계에서는 대략 '해당 카테고리 자체에 대한'이라는 의미입니다(예를 들어 '메타데이터'는 '데이터에 대한 데이터'를 뜻합니다). 어원이 되는 그리스어에서는 '초월', '넘어선' 등 의미가 있습니다. '메타버스'는 쓰임상 '초월적 세상’ 정도의 의미입니다.
조금 더 실용적인 설명을 찾아볼까요? 영문 위키피디아는 메타버스란 일반적으로 “유저간 공유되는 영구적인 3차원 가상 공간을 현실 세계와 연결해 만들어진 미래의 인터넷”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포트나이트>나 <로블록스> 같은 게임들이 ‘메타버스’의 일종으로 거론되는 이유가 별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둘 다 훌륭한 게임들이지만, ‘초월적 세상’, ‘미래의 인터넷’이라니요? 과도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메타버스의 정의가 생각보다 광범위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혼란입니다. 작동원리가 서로 매우 다른 기술인 AR과 VR, 심지어는 일반적인 비디오 게임까지 ‘메타버스’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 자꾸 함께 언급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포트나이트> 안에서 진행된 '트래비스 스콧'의 공연
퓨처인텔리전스그룹 CEO이자 미래학자인 캐시 해클은 메타버스의 도래를 예고하는 2020년 포브스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서문을 열었습니다.
“당신은 길을 걷고 있다가 갑자기 구매해야 할 물건 하나를 떠올린다. 그러자 당신 바로 옆에 자판기 하나가 나타난다. 그 안에는 생각하고 있던 물품이 종류별로 들어있다. 당신은 자판기에서 상품을 하나 골라 구매한다. 그러면 그 물건은 집으로 배송된다. 당신은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간다.”
이 SF적 묘사는 AR 장치를 통해 현실 위에 덧그려진 가상의 3D 개체와 상호작용하고, 이 상호작용이 실제 ‘물품 배송’으로 귀결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혼재하는 메타버스의 궁극적 형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시점’의 메타버스는 묘사된 내용에는 못 미칩니다. 현재 메타버스란 사람들이 디지털 아바타로 접속해 현실과 연결된 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가상의 온라인 세계를 지칭할 때 많이 쓰입니다.
일례로 건국대는 17일부터 3일 동안 ‘가상 캠퍼스’를 만들어 그 안에서 축제를 진행했습니다. 건국대학생들은 자신의 아바타를 만들어 학교를 거닐거나 친구들을 만나고, 캠퍼스 내에 마련된 방 탈출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활동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이와 유사한 메타버스는 적극적으로 시도되는 중입니다. 일각에서는 메타버스가 ‘뜨는’ 이유 중 하나로 코로나19 상황을 들기도 합니다.
범주를 조금 더 넓히면 줌 회의, VR 박람회, 온라인 공연도 광의의 ‘메타버스’ 사례에 포함됩니다.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가상 공간에서 현실에 밀접히 연관된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요. 결국, 메타버스는 마냥 낯설거나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개념만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출처: 건국대 총학생회 홈페이지)
지금까지의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듯, 메타버스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온라인 게임’과 개념상 많은 특징을 공유합니다. 실제로 몇몇 게임들은 메타버스의 실현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많이 인용된 게임으로는 에픽게임즈의 <포트나이트>가 있습니다. 막대한 유저 수를 자랑하는 <포트나이트>는 2020년 4월 인게임 상에서 가수 트래비스 스콧의 공연을 진행했습니다. 9월에는 BTS의 싱글 ‘다이너마이트’의 안무버전 영상이 게임 안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되기도 했고요.
그런데 팀 스위니 에픽게임즈 CEO는 <포트나이트>를 ‘메타버스화’ 하겠다며 조금 의아한 발언을 합니다. 최근 애플과의 법정공방에서 메타버스가 논쟁거리가 되자 스위니 CEO는 “<포트나이트>는 게임이 아니라 경험”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하나의 대표적 ‘메타버스 게임’ <로블록스>도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로블록스>는 최근 인게임 설명 및 공식 홈페이지에서 ‘게임’이라는 용어를 전부 ‘경험’으로 대체하고, ‘플레이어’ 등 게임과 연관된 모든 표현을 제거했습니다. <로블록스> 대변인은 좀 더 직접적으로 ‘탈 게임’ 움직임의 저의를 설명했습니다.
“경험이라는 단어는 메타버스를 향한 우리 기업의 인식을 반영해 기존 용어를 진화시킨 결과이다. <로블록스>는 사람들이 가상 공간에서 함께 활동할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이다.”
*다만, 이런 태도는 애플과 에픽의 법정공방에서 <로블록스>에 대한 애플 스토어 내 심의 기준이 쟁점화하자 나온 '궁여지책'이라는 관점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로블록스>
게임이라는 용어에서 탈피하려는 이들 시도에서도 알 수 있듯 해외 게임계에서 ‘메타버스’는 기업의 진취성을 강하게 어필하는 수단이자, '비 게이머' 소비자까지 폭넓게 끌어들이기 위한 마케팅 용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뿌리를 게임에 두고 있는 데다 아직은 완벽한 ‘가상세계’를 구현 못 한 상황에서, 이들 기업이 성급히 ‘게임’과의 관계를 끊어내려는 시도가 과연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그런 비판에서 벗어나려면 현실과의 분명한 연계를 보여주는 어떤 혁신이 있어야겠죠. 최근 펄어비스 정경인 대표이사는 실적발표에서 차기작 <도깨비>를 메타버스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요. 현재 게임계가 바라보는 '메타버스'에 대한 이해와 접근을 잘 함축하는 듯합니다.
“문화체험, 소셜라이징, 경제소비 활동 등의 높은 자유도를 부여함으로써 현실과 가상공간을 넘나드는 게임 장르가 메타버스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펄어비스는 기존의 MMO 개발과 서비스를 통해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도깨비>를 고퀄리티 메타버스 게임으로 개발해 대응할 계획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K 메타버스 게임'들이 앞서 말한 우려대로 이전의 MMO와 다를 바 하나 없는 '거품'이 될지, 아니면 정말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지는 게임이 실제로 나와 본 뒤에 판단할 수 있으리라 보입니다. 펄어비스의 경우 상세한 계획은 아직 수립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메타버스’는 MR(혼합현실), XR(확장현실) 등 기술이 완전하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적어도 당장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을 패러다임은 아닙니다.
그러나 흔한 오해와 달리 실체가 없거나 허무맹랑한 개념 또한 아닙니다. 게임 업계에서는 일상생활과 연계된 신선한 게임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산업 트렌드로 자리할 가능성도 엿보입니다. 얼마나 흥미로운 시도가 이뤄질지, 일단은 지켜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펄어비스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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