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PD의 뇌피썰] 기술이 발전하며 '영화 같은 게임'이라는 표현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니게 됐습니다. 또한 게임이 대중화되며 게임 요소를 녹인 영상 콘텐츠도 많이 시도되고 있죠. 게임과 영상은 서로 빠르게 장점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맞아, 게임 속 각종 영상 기법, 비디오 콘텐츠 속 각종 게임 요소, 혹은 게임 영상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코너를 준비했습니다. 그동안 저희 지면엔 '게임'에 무게를 둔 기사가 많았는데, 이번 코너는 (게임을 좋아하는) '현직 영상 PD'가 글을 쓰는 만큼 영상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릴 예정입니다. 재밌게 읽어 주세요.
[람자는 누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D&D>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게임 매니아이자 Mnet, Cookat, 라이엇 게임즈 등의 회사에 근무하며 10년째 비디오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숙달된(?) 방송 영상 PD입니다. 'Show me the Money'를 비롯한 각종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K-pop 토크쇼, 그리고 '위클리 매드무비/코멘터리/뉴스피드', 'SNL', 2020·2021년 'LCK 결승전 오프닝쇼' 등의 영상 콘텐츠를 연출하고 제작했습니다.
# 컷신이 나타났다! 당신은(는) SKIP을 눌렀다!
<릴렌트리스>(Relentless. Little Big Adventure란 이름으로도 유통됨)란 게임을 아시는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쿼터뷰 시점의 풀 폴리곤 그래픽으로 굉장히 수려한 그래픽을 자랑하던 액션 RPG였습니다. 약간의 오픈월드 성격도 가지고 있었는데, 맵 디자인이나 퍼즐·액션의 적절한 조화, 그리고 나름의 깊이가 있었던 세계관까지 정말 흥미로웠던 게임이었습니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당시 느낌으로는) 마치 <토이 스토리>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멋진 컷신(cutscene)이 곳곳에 포진돼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수려한 폴리곤이라고는 했지만 동그라미와 점으로 이루어진 듯한 주인공 트윈센의 인게임 그래픽과는 달리, 컷신에서 트웬센은 눈을 깜빡이기도 하고 '데헷' 하는 모션을 취하기도 하면서 아주 재간둥이 같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컷신에서는 인게임과 달리 주인공을 조작하거나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그저 살아 숨위는 주인공 트윈센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답니다.
그런데 제 동생은 달랐습니다. 이 게임의 컷신은 ESC를 눌러서 강제 종료할 수 있었는데, 동생은 매번 이 컷신을 강제종료하고 빠르게 다음 맵에서 플레이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유는? 컷신을 보는 시간이 아깝고 내가 컷신이 나오는 동안 뭘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득력이… 있어!!!
하지만 저는 그렇게 과감하지 못했습니다. 엄청난 공력이 들어간 애니메이션 '작품'을 보지 못한다는 점과, 상상력을 발휘해야 몰입 가능했던 인게임 그래픽을 초월 해석하는 '디테일'을 확인하고 싶었던 점, 그리고 컷신이 게임 진행에 따른 마일스톤으로써의 보상 개념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점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독자분들은 어떤 타입이세요? 컷신을 게임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즐기시나요, 아니면 게임의 흐름을 끊는 고퀄의 방해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UI/UX부터 음악, 효과음, 폰트 하나하나까지 모두 게이머의 좋은 경험을 위해 노력하는 게임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이런 극과 극의 두 반응이 나온다는 자체가 좀 서운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믹스미디어가 대세인 요즘, 영상과 콘텐츠 제작업을 하는 제 입장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연구 거리가 생긴 셈이긴 합니다. 만약 게임과 컷신에 대해 흥미가 생기셨다면, 지금부터 조금 더 깊은 뇌내망상 연구작업에 함께 들어가 보시죠.
<스트리트 파이터 2>에서 춘리의 색다른 모습은 엔딩에서만 볼 수 있다. 이 엔딩 신도 컷신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
# 플레이 하는 순간 이미 당신은 몰입 되어 있다 - 1인칭·3인칭 백뷰 시점
먼저 '시점'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인게임의 시점과 컷신의 시점은 보통 매우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인게임의 시점은 고정적인 것이 보통입니다. <오버워치>나 <발로란트>와 같은 FPS 게임이라면 전통적으로 유저가 조작하는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이 인게임의 시점이 됩니다.
조금 더 넓은 시야를 제공하기 위해서 주인공 캐릭터를 약간 멀리서 조망하는 3인칭 시점을 제공하는 <배틀그라운드>나 <GTA5>와 같은 게임도 여럿 있습니다.
이런 3인칭 시점을 제공하는 게임은 1인칭 시점의 확장판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주인공 캐릭터를 뒤통수에서 관찰하게 되죠. 이는 주인공 캐릭터의 시점을 플레이어의 시점과 최대한 일치시켜서 플레이어가 주인공의 감정과 상황에 빙의하게끔 만들어 게임에 몰입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는 설정입니다.
단순한 비디오 감상이 아니라, 내가 하려는 '마음가짐'이 비디오의 캐릭터에 반영되는 인터랙티브를 극대화하기 위함이죠.
# 세계와 환경, '시스템'을 살피다 - 쿼터뷰 시점
쿼터뷰(quarter-view) 시점을 제공하는 게임은 어떨까요?
제가 소싯적 플레이했던 <릴렌트리스>나 <울티마> 시리즈, 비교적 최근에 호평받은 RPG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와 같은 게임은 주인공 캐릭터 주변의 일부를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쿼터뷰 시점을 제공합니다. 얼핏 주인공 캐릭터에 몰입하기에는 1인칭보다 조금 불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쿼터뷰 시점 게임을 플레이할 때에는 주인공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 위험요소나 퍼즐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그 상황을 모면케 하기 위한 전략적인 판단에 깊이 빠져 듭니다. 즉, 쿼터뷰 시점은 또 다른 방식으로 몰입 요소를 제공하는 셈입니다.
또한, 쿼터뷰 시점은 고정적인 시점을 지속적으로 제공함으로써 플레이어가 해당 세계의 물리 엔진과 시스템적인 세계관을 주입식(?)으로 학습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역시 해당 게임에 대한 몰입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상황마다 달라지는 카메라 앵글 - 시네마틱 시점
고정적인 시점만 얘기했는데, 주인공 캐릭터가 이동하거나 특정한 배경으로 진입하면 매번 새로운 시점으로 변동되는 특이한 시점의 게임도 있습니다. 사실 특이하다고는 했지만, 예전에 절찬리(?)에 제작되었던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시점입니다.
<킹스퀘스트> 시리즈를 비롯해 <원숭이 섬의 비밀>, <윌리 비미쉬의 모험> 등의 게임은 마치 플레이어가 애니메이션 혹은 영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장면마다 커트(cut)로 연결된, 변화하는 카메라워크를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시점을 특별하게 지칭하는 용어는 확실치는 않지만, 일부 해외 문서에는 '시네마틱 시점'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네요. 영화적인 커트 연출이 가미되었다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
이 시네마틱 시점이 플레이어 몰입 면에서 어떤 장점이 있을지는 명확한 편입니다. 명작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인터랙티브한 참여를 함으로써 본인이 스스로 (주인공이기보다는) 연출자의 입장에서 게임을 이끌어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최근에는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이 예전만큼 많지 않지만 그래도 몇 작품은 이 시점을 충분하게 활용해 제작된 것이 있습니다.
<갓 오브 워3>와 그 전작들이 대표적일 것 같습니다.
플레이어가 정해진 카메라 연출을 따라가며 특정한 액션이 요구되거나 제한된 범위 내에서 플레이하게 되는 <갓 오브 워3>. 후속작에서는 고정된 숄더뷰 시점이 도입되었다.
# 몰입과 시점의 상관 관계
비디오 게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게임에 대한 플레이어의 몰입 카테고리를 크게 4가지 정도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용어는 각자 약간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다음의 내용으로 크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적인 몰입 - 플레이어가 조작한 것이 캐릭터의 움직임이나 의사 결정에 반영되는 체계나 그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보상이 몰입도에 영향을 줌
공간적 몰입 - 캐릭터가 존재하는 공간의 디테일이나 물리적 요소들, 인터랙티브한 장소나 소품들이 캐릭터를 이 세계의 일부로 인식하게 만들고, 이는 곧 플레이어의 몰입도에 영향을 줌
감정적 몰입 - 게임 속에 등장하는 많은 NPC와 등장인물 간의 관계, 혹은 MMO 장르 게임이라면 타인과 만나는 소셜 영역에서 주인공 캐릭터와 플레이어가 감정적인 교감을 이루고 이는 곧 몰입도에 영향을 줌
내러티브적 몰입 -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까’에 대한 궁금증의 연쇄가 게임을 지속적으로 플레이하는 동기와 몰입도에 영향을 줌
비디오 게임에는 디자이너가 의도해둔 수십, 수백 가지의 몰입 요소가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을 겁니다.
서론은 이쯤하고, 이어지는 글에서는 인게임의 시점과 컷신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컷신하면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컷신과 <디아블로> 시리즈의 컷신이 바로 생각납니다. 유튜브에는 이들 게임의 컷신들을 모아둔 영상이 큰 인기(?)를 끌만큼 별도로 감상해도 좋을 정도의 퀄리티인데요. 다음 글이 나오기 전까지 이 게임들을 플레이하거나 영상을 한번 감상하고 오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 '하'편이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