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PD의 뇌피썰] 기술이 발전하며 '영화 같은 게임'이라는 표현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니게 됐습니다. 또한 게임이 대중화되며 게임 요소를 녹인 영상 콘텐츠도 많이 시도되고 있죠. 게임과 영상은 서로 빠르게 장점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맞아, 게임 속 각종 영상 기법, 비디오 콘텐츠 속 각종 게임 요소, 혹은 게임 영상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코너를 준비했습니다. 그동안 저희 지면엔 '게임'에 무게를 둔 기사가 많았는데, 이번 코너는 (게임을 좋아하는) '현직 영상 PD'가 글을 쓰는 만큼 영상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릴 예정입니다. 재밌게 읽어 주세요.
[람자는 누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D&D>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게임 매니아이자 Mnet, Cookat, 라이엇 게임즈 등의 회사에 근무하며 10년째 비디오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숙달된(?) 방송 영상 PD입니다. 'Show me the Money'를 비롯한 각종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K-pop 토크쇼, 그리고 '위클리 매드무비/코멘터리/뉴스피드', 'SNL', 2020·2021년 'LCK 결승전 오프닝쇼' 등의 영상 콘텐츠를 연출하고 제작했습니다.
매일 매일 같은 패턴으로 작업하고, 던전에 출근해서 몇 시간 동안 몬스터(고블린 0/35)를 잡거나 곡물을 수확(도토리 0/50)하는 일들에 지치셨습니까? 의미 없는 ‘광클’에 비싼 게이밍 마우스를 몇 개씩 바꾸곤 하셨나요?
1시간가량의 즐겁고 짜릿한 대규모 레이드를 위해서 몇 달 동안 장비를 갖추고 몸을 키우느라 고단하셨나요? 크리에이터의 게임 플레이 풀버전을 보면서 언제 재밌는 장면 나오나 목 빠지게 기다리셨다구요?!
짜잔! 자동전투 RPG 게임의 등장은 대단한 논란을 동반하긴 했지만, MMORPG 유저들은 더 이상 반강제의 투잡을 강요받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콘솔 게임과 PC게임, 모바일 게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액션, RPG 장르의 대작 게임들은 예전처럼 앉은 자리에서 무의미한 이동 혹은 성장을 강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게임을 직접 하기보다 크리에이터의 플레이 영상을 통해 간접 체험을 즐기는 시청자들은 꼭 풀버전을 몇 시간 동안 시청하지 않아도 편집된 영상으로 재미있는 부분만 쏙쏙 즐기며 게임의 대리체험을 충분하게 하고 있죠. 짜잔!
일상의 반복되는 부분은 '패스트 포워드(Fast Forward) ▶▶ 빨리 감기'로 돌려버리고, 지루한 부분은 '컷(Cut) ✂️'으로 잘라내 버립니다. 재밌던 부분은 오히려 '리와인드(Rewind) ◀◀ 되돌려 보기'로 몇 번이고 재생합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처럼 일상과 실시간, 리얼타임을 어그러뜨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방식. 새롭진 않죠. 영화, TV, 다큐멘터리 등등…. 흔한 영상 콘텐츠에서 볼 수 있었던 영상 문법이니깐요.
우직한 느낌을 줄 정도로 '꼼수'를 지양하고 '실시간', '리얼타임'의 게임 플레이 시간을 기반으로 하며 시간적 순행(順行)을 중요한 플레이 요소로 여기던 '게임'.
이렇게 시간을 어그러뜨리는 방식과 결합하며 '리얼'보다는 '리얼리티'가 되어가고, 유저의 피와 땀을 갈아 만든 우리들의 '스토리' 보다는 '텔링'과 '리-텔링'이 강조되는 듯한 모습들을 볼 때마다, 레벨업과 경험치를 시간과 바꿔본 올드 게임 유저들이라면 다들 '라떼는!'을 한 번씩 외쳐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더 현실감 넘치고 일상을 빼앗도록 콘텐츠가 발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로 돌아가다니. 그렇다면 게임 속에서 느끼던 우리의 소중한 ‘리얼’의 콘텐츠 경험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 극과 리얼 버라이어티는 '출연자의 몰입도'가 다르다
지난 글에서는 우리가 즐기는 ‘리얼’의 흔적을 OTT 및 PP를 통해 절찬리 유통되는 '방 탈출형 게임 예능 리얼리티 프로그램', 그리고 '슈퍼스타K'의 시절 이후 최근 다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리얼리티 오디션 쇼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콘텐츠 장르는 새롭게 등장했거나 혹은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특징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것들인데 어떤 면에서 그런지 먼저 한번 살펴보시죠.
아무래도 요즈음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방 탈출형 게임 예능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누가 뭐래도 '대탈출' 시리즈입니다. 보드게임과 체험형 게임을 가상의 세트 안에서 긴장감 넘치게 그려냈던 '더지니어스' 시리즈 제작진이 벌써 네 번째 '대탈출' 시즌을 만들어 몇 년째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대탈출' 프로그램은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하게 느껴지지만, 유사한 장르인 '크라임씬', '여고추리반', '범인은 바로 너'가 등장했을 때는 다소 위화감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느꼈던 위화감의 핵심적인 이유는 이 게임 예능들의 출연자(혹은 등장인물)가 프로그램 중 몰입도가 굉장히 깊다는 데 있었습니다.
출연자 몰입도가 뛰어난 것이 왜 위화감이 드느냐구요? 두 가지 프로그램의 종류가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이 극작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Scripted 콘텐츠. 리얼버라이어티와 같은,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상황들을 중심으로 리얼하게 전개되는 Unscripted 콘텐츠가 그것입니다.
전자(극 콘텐츠)의 경우 출연자들은 대본을 중심으로 극 안의 배역과 상황에 완전히 몰입합니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면 극 안의 상황은 종료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죠. 얼마나 극 안의 배역과 상황에 깊게 몰입하느냐가 극작 콘텐츠의 생명이니깐요. 영화 '신세계'의 박성웅 배우는 당연하게도 사석에서는 그렇게 날 서 있는 모습이 아니겠죠.
반면 후자(리얼리티 콘텐츠)의 경우, 출연자들은 (물론 캐릭터화되긴 했지만) 촬영 중이나 촬영 전후나 몰입도에 큰 차이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를 들어, 유재석 씨는 '놀면 뭐하니'에서 그렇듯 평소에도 댄디하고 차분한 매력으로 분위기를 리딩할 것 같습니다. 조세호씨가 '유퀴즈'에서 뜬금 없는 코멘트들에 당황하는 모습들을, 평소 사석에서도 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다시 말해, 프로그램 내에서 극적 몰입도가 깊다는 얘기는 곧 출연자의 현실과 극 중의 모습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한도전', '돌싱글즈' 등의 리얼리티 류의 프로그램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혹은, 시청자들은 그렇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현실에서 받아들이고 인지하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또 촬영하는 것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재미 요소이자 성공 요소이기도 하니깐요.
이렇게 납득할만한 수준으로 이분법적인 콘텐츠 구분을 해보았는데, 정확히 이 구분을 무너뜨리는 콘텐츠가 바로 앞서 언급한 '대탈출'과 같은 콘텐츠입니다.
# 대탈출과 '전통적인' 게임 경험의 공통점
정신병원에 갇히고, 그곳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죽음을 맞을 수도 있고, 외계인이 남긴 암호를 해독하고, 좀비에게 물리지 않도록 갖은 방법을 사용하는 '대탈출'의 등장인물들. 너무 이상하지 않으세요?
콘셉트로 이루어진 세트 안에서, 특수분장을 한 연기자들일 뿐이고, 대단한 상금이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애쓴다? 극화된 상황에 몰입하고 있는 출연자들. 하지만 이것은 극작되지 않은 리얼리티라서 본인의 '찐텐' 그대로 참여, 심지어 시간을 뛰어넘거나 되돌리는 서사가 없이 리얼타임으로 진행되는 구성까지, '극화 or 리얼리티' 이분법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네요.
그런데 '대탈출'이 기존에 없던 TV 프로그램임은 확실하지만, 그 누구도 이 프로그램이 '이상하다'라고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출연자들에게도 '당신들은 이러 저러한 이유로 이 프로그램 콘셉트에 몰입해야 함과 동시에 리얼하게 행동하세요'라고 복잡하고 유치한 디렉션을 주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대탈출'은 출연자들과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콘텐츠 종류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게임'입니다.
슈퍼 고전인 요한 하우징어의 책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에는 매직 서클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놀이와 현실을 구분 지어주는 장벽이라는 개념인데요.
'대탈출'의 엄청난 규모의 세트와, 몇 가지 규칙, '탈출하라'라는 목표 지령은 출연자와 시청자들에게 이것은 게임이며 저 안이 바로 이 게임의 '매직 서클'임을 각인시켜줍니다. 출연자는 게임을 즐기는 것이고, 시청자는 그들의 게임 플레이를 시청하는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좋아하고 즐겨하는 게임 하나 정도는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리에이터의 게임플레이 방송이나 eSports를 즐겨보는 경험이 있기에, '대탈출'이 그려내는 요상한(?) 형태의 콘텐츠는 사실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대탈출'의 출연자들은 게임의 공간 속에서 우직하게 스테이지 하나 하나를 클리어해 나갑니다.
여담으로, '무한도전'과 같은 이전 세대의 예능에서 보여주었던 체험형 게임 콘텐츠의 문법과도 다릅니다. <무한도전>의 게임 편에서는 ‘알고보니 이렇다!’ 류의 서스펜스가 항상 뒷편에 가미되어서 영화적인 연출과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지는 것들이 많았죠.
반면에 '대탈출'류 콘텐츠에서 출연자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시간 왜곡 없이 시청자들에게 전달됩니다.
'대탈출'은 각 시즌 별로 출연자들이 실제 탈출 게임을 즐기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촬영 시간은 시작부터 탈출하기까지 체크되는 시간 약 9시간 전후로 보입니다. 총 회차는 일반적으로 12회가량으로, 회차당 1시간 정도라고 한다면 일반적인 '리얼리티쇼의 촬영 시간 대비 방송 분량'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십 시간을 촬영해서 한두 회차가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리얼리티의 제작 방식이라고 본다면 말이죠.
바로 현실 시간으로 동량(同量)의 게임 성취도를 맞바꾸던 게임 경험과도 유사하군요.
몸으로 하나하나 부딪혀 만들어내는 게임 경험이 담긴 '리얼' + '스토리'가 바로 요기 있네요. 심지어 OTT 업체들은 구독자에게는 무제한 무료로 콘텐츠를 제공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 보았던 지난 시즌을 원하는 시간에 플레이하고 또 언제 틀어도 그 위치에서 볼 수 있도록 자동 세이브해 둘 수 있죠. 게임 경험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 콘텐츠들이 유난히 OTT에 많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뇌피썰이 그럴싸한가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무리수를 던져 볼까요. 최근에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는 오디션 리얼리티 쇼도 이런 원리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게임도 다시 '리얼'(≠리얼리티)이 대세가 될 수 있을까?
TV조선을 음악 프로그램 맛집으로 변신시킨 '내일은 미스트롯/미스터트롯' 시리즈는 사상 유례없는 히트를 기록하며 전국을 트로트 열풍으로 휘감는데 큰 기여를 한 오디션 리얼리티 쇼입니다.
오디션 리얼리티 쇼는 공정하고 생생한 오디션의 현장을 담아 내어 시청자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면서, 동시에 본인이 오디션의 심사위원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공연 품평을 하게끔 만드는 구성이 인기의 핵심입니다. 우리나라를 허각 파와 존박 파로 나뉘게 했던 '슈퍼스타K3', 인간 승리라는 키워드를 절감케 했던 <위대한 탄생>과 같은 프로그램은 정말 뜨거운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리얼'하지 못하다는 느낌은 곧 시청자들의 반응을 떨어뜨립니다. 오디션 리얼리티 쇼의 화려한 무대와 독특한 의상,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리얼하게 겨뤄 누가 진출할지 한치도 예상하지 못하는 오디션 현장은 바로 게임 공간이며, '매직 서클'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와중에 시간을 역행하거나 왜곡하는 편집 기법, 출연자의 비중에 따라 분량이 다르게 할당되는 非 리얼타임적 구성, 심사위원 자질 논란, 연출자가 불필요하게 개입한다는 공정성 논란 등은 시청자들이 '매직 서클'에 온전하게 몰입하지 못하게 한 요인이 된 것입니다.
'내일은 미스트롯/미스터트롯'은 그런 의미에서 기본에 충실한 요소들을 챙겨두었습니다. 3시간에 육박하는 회차별 러닝 타임에는 (거의 편집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의) 여과 없는 노래 무대들이 시간 순서대로 담겨 있으며, 사연이 담긴 리얼리티 편집물이나 시간 역행 등이 최소화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시청자들은 노래를 온전하게 듣고 스스로 평가하기에 충분한 기회를 제공받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심사위원이 펼쳐내는 평가 코멘트를 들으며 의외의 예상치 못한 리얼 반전의 짜릿함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한 명 한 명의 정성 어린 매력발산과 진지한 오디션의 기나긴 여정을 함께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매직 서클' 안에서 온전한 현실 시간을 투자해 얻은 시청자들의 몰입도는 프로그램이 진행될수록 깊어져 뒤로 갈수록 점점 더 높은 시청률로 이어집니다. 오디션 리얼리티 쇼가 단순히 시청 경험으로 즐기고 끝나는 콘텐츠라 그런 게 아니라, 시청자들에게 게임 경험과 유사한 체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싶네요.
한 땀 한 땀 수천 번의 마우스 클릭으로 밤새워서 캐릭터를 성장시키던 경험, 오락실에서 <던전즈앤드래곤즈> 아케이드 게임의 끝판 깨는 장면을 몇 시간이고 뒤에서 지켜보며 즐거워했던 경험, 스트리머의 5시간 켠왕을 지켜보며 채팅과 도네이션으로 응원하던 경험은 영영 없어지지는 않았네요.
'대탈출'이나 오디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서 유사한 기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깐요. 또 모르죠. 유행은 돌고 돌아 현실 시간을 캐릭터 성장으로 바꾸는 게임이 다시 주류가 될 수도 있겠죠.
'고블린(0/30)'을 하루 종일 때려잡고 '도토리(0/50)'를 눈 빠지게 줍는 것에서부터 '대탈출'과 '내일은 미스트롯/미스터트롯'까지 얘기를 확장해 보았는데요. 너무 황당한 얘기라고요? 이런 황당함이 뇌피썰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전에 천대 받던 '께임 그까이꺼'에서 ‘게이미피케이션’을 통해 콘텐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향력을 행사, 문화의 주류로 떠오른 '게임'의 높아진 위상이 실재하기에 저도 맘 놓고 뇌피썰을 풀어낼 수 있었던 겁니다.
게임은 영상 콘텐츠와 같은 인접 문화들을 받아들여 발전하고, 인접 문화들은 게임 경험과 문법을 적극 참고해 진화합니다. 이런 사례들을 좀더 찾아서 다음 회차에도 한번 뇌피썰로 풀어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