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해외로 이주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중국의 유력 게임 퍼블리셔 X.D.네트워크 대표 황이멍(黃一孟)이 자신의 트위터에 남긴 말입니다. 상하이에서 자신의 일가를 이룬 황이멍은 최근 공산당이 시행하는 강력한 '제로코로나' 정책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나갔더니 물을 주지 않아 화초가 말라 죽었다던가, 미용실에 갈 수 없어 아들의 머리를 직접 잘라주는 모습을 SNS에 올렸습니다.
회사를 세우고 이끈 CEO가 외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황이멍 대표는 사내 공지 시스템을 통해서 '내년 여름 휴가 이후 거처를 옮길 수도 있다'라는 내용의 메모를 X.D. 전 직원에게 보냈습니다. 여기서 '거처'가 CEO의 집을 의미하는 것인지, 회사가 일하는 사옥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황 대표는 SNS상에서 혹자의 물음에 "가족과 일을 마찬가지로 중히 여기기 때문에 중국 밖에서 살고 싶다"라며 "X.D.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다국적 기업이 될 것이기에 향후 해외 사업이 우리에게 더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거처'를 옮기든, 최근 중국의 부자들이 해외 이민을 알아보고 있는 것처럼 탈출에 합류하든, X.D.에게 해외 사업이 국내 사업보다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X.D.는 <소녀전선>의 퍼블리싱으로 일약 강자로 거듭났고, 이후 <벽람항로>, <라이프애프터>, <제5인격> 등의 퍼블리싱을 맡으며 그 몸집을 불렸습니다. 중국에서는 유력 앱마켓 탭탭(Taptap)을 운영 중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X.D.는 <몬케이지>, <주시 렐름> 등 스팀 게임도 다수 유통하고 있습니다
황이멍 대표의 "향후 해외 사업이 우리에게 더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는 말을 계속 곱씹게 됩니다. 왜냐면 중국에는 14억 명의 인구가 있기 때문에, 중국 게임사가 내수만 신경써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중국 게임 산업은 해외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22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2008년 이후 처음으로 중국 게임 시장이 감소세를 그리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비디오게임 시장의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8% 감소했으며, 게이머 수는 약 6억 6,657만 명에서 6억 6,569만 명으로 소폭 감소했습니다. 멈출 줄 모르고 성장하던 중국의 게임 산업은 이제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됐습니다.
혹자는 한국 게임에 판호가 잘 나오지 않고 있는데, 중국 게임이 아무런 문제 없이 국내에 수입되고 있는 현실을 더러 불공정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게 볼 여지가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 명제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판호 자체가 전에 비해서 잘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산 게임은 물론 중국산 게임도 판호를 받기 어려운 게 현재 조건입니다.
중국 내 게임 서비스 권한인 판호는 2021년 7월부터 2022년 4월까지 약 9개월 동안 사실상 발급이 중단됐던 적 있습니다. 매달 갱신되는 중국의 판호 발급 리스트에 텐센트와 넷이즈 게임은 좀처럼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절찬 서비스 중인 <던전앤파이터 모바일>은 원작의 인기 덕에 중국에서 초 기대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만, 아직 현지에서 출시 일정도 못 잡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만 18세 이하의 중국 게이머는 일주일에 3시간 이상 온라인 게임을 플레이할 수 없습니다. 게임에 한참 유입되어야 할 연령대인데, 그들에게 게임으로 가는 길을 막아버린 것과 다름 없습니다. 한국은 지난한 논의 끝에 셧다운제를 없앴는데, 중국은 고위층들의 결정에 재빨리 셧다운제가 결정, 도입되었습니다. 중국 게임사 중 어느 누구도 항의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게임은 제대로 찍혔기 때문입니다. 작년 한 중국 관영매체는 게임을 더러 '아편'이라고 찍었습니다. 중국 현대사에서 아편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무게를 이해한다면, 실로 섬뜩한 기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극적인 단어 선택 탓에 기사는 수정되었지만, 대신 CCTV에서 아침 뉴스에서 계정 대여, VPN 우회 등의 방법으로 당국의 눈을 피해서 <왕자영요>, <화평정영> 같은 인기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저격했습니다.
지난 1월 중국의 기업 조사 사이트 티엔안차(天眼查)에 따르면, 중국 내 소규모·독립 스튜디오 14,000곳 이상이 폐업 신고를 냈습니다. 직접 게임을 만드는 개발사는 물론 상품화, 광고 및 퍼블리시에 관련된 에이전시도 이 수치에 포함됩니다. 여기서 '에이전시'에는 대형 게임사들이 판호 발급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특수목적의 법인이 포함됩니다.
새 게임에 판호도 잘 내주지 않는데 밤에는 게임도 못 한다니, 중국에서 게임 장사하기 좋은 날은 다 지난 듯합니다.
'좋은 날', 1년에 20% 넘는 성장세를 기록했던 그날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련의 정치 일정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는 11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가 열립니다. 5년에 1번 열리는 대형 이벤트입니다. 시진핑 주석은 이 자리에서 3연임을 확정할 전망이며, 외교당국은 이 시기에 맞춰서 유럽 정상들의 베이징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위믹스 이코노미'를 주창하기 이전에는 중국 내 <미르> IP 사업을 이끌던 장현국 위메이드 대표는 바로 이 공산당 대표대회가 모멘텀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그때(대표대회)가 지나고 나면 경제적인 부분이나 사회적인 부분에서 안정 국면이 올 거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라고 말이죠. 3연임을 하게 된 시 주석이 그간 잠구었던 분야를 풀어주는 유화 정책을 펴면서 안정을 꾀한다는 기대입니다.
하지만 한 차례 빼든 칼날이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본 중국 게임사들은 '계란'을 열심히 '여러 바구니'에 나눠담고 있습니다. 텐센트는 '레벨인피니트' 레이블로 해외에 게임을 서비스하고 있고, 미호요는 '호요버스'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레벨인피니트와 호요버스 둘 다 법인을 지칭하는 명칭이 아닙니다. 미호요는 지금 한국에 '코그노스피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전에도 중국 게임사들이 해외에 진출하거나 투자하는 일은 있었습니다. 시장 조사기관 니코 파트너스(Niko partners)에 따르면, 2021년 텐센트가 인수합병하거나 투자한 게임 회사는 100개가 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 큰 손들이 해외에 스튜디오를 직접 세우거나 인수해 아예 게임 개발 자체를 외국에서 하는 추세가 자주 관찰되고 있습니다.
<원신> 등 중국산 게임이 해외에서 잘 팔리다 보니 해외 진출을 가속화하는 것인지, 당국의 규제와 통제 탓에 국경 밖으로 나가는 것인지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요 게임사들이 생산 기지 자체를 중국 밖으로 키우고 있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텐센트의 티미 스튜디오는 미국 시애틀, 로스엔젤레스, 캐나다 몬트리올에 스튜디오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넷이즈는 일본에만 사쿠라 스튜디오, 나고시(<용과 함께>의 그 이름 맞습니다) 스튜디오, 사쿠라 스튜디오를 유지 중입니다. 미호요도 이에 질세라 캐나다 몬트리올에 게임스튜디오를 설립했습니다. 게임만 수출되거나, 이미 잘 된 회사를 인수하는 게 아니라 중국의 자본으로 개발부터 시작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최근 텐센트가 한국게임산업협회 이사사에 최종 가입했습니다. 텐센트가 연락사무소에서 지사 법인으로 발전한 것은 2011년의 일입니다. 10년 넘게 협회에 가입하지 않고 잘 활동하던 텐센트코리아는 왜 이제서야 게임협회에 가입했을까요? 기자는 지금까지 정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현재 텐센트는 중국의 규제 속에서 정체 중입니다. 중국에서 '스팀 앱 대항마'라며 자랑스럽게 출시한 게임 플랫폼 '위게임' 모바일 버전의 서비스를 중단하며, 게임 방송 스트리밍 사이트 '펭귄 이스포츠'를 폐쇄했습니다. 텐센트는 최근 경영악화 속에서 직원 10%를 감원하기도 했습니다.
취재에 따르면, 텐센트뿐 아니라 코그노스피어(미호요)도 게임협회의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합니다. 복수의 중국 게임사들이 한국 게임산업 진흥을 위한 이권 단체에 가입서를 제출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텐센트의 게임협회 가입은 '대탈주'의 신호탄이 될까요? 함께 지켜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