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화염의 신전 및 일부 퍼즐 메커니즘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젤다' 시리즈에게는 '숙제'가 있다.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이하 <야숨>)은 시리즈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기존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이하 <시오>)가 만들어 낸, 정교한 퍼즐을 풀어내는 던전 탐험에서 벗어나 오픈월드로 시리즈의 축을 옮긴 것이다. 변화는 성공적이었다. 전문 매체는 호평 일색이었고 수많은 플레이어는 새로운 시대의 '젤다'를 찬양했다.
하지만 <야숨>의 성공 이면에는 기존 '젤다' 팬들의 아쉬움도 있었다. 오랜 시간 머리를 싸매며 제작자가 만들어 낸 퍼즐을 풀어내기 위해 고민하다가 기어이 풀어내었을 때 쾌감은 <야숨>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막의 신수 ‘바⭑나보리스’처럼 플레이어의 사고력을 요구하는 고난도 던전도 있었으나, 구작에 비해 가짓수나 던전의 길이가 현저히 줄었다.
과거부터 '젤다'를 좋아하던 팬들은 <야숨>의 성공을 환영하면서도 구작의 퍼즐이 돌아오기를 원했다. 개인적으로도 <야숨>은 훌륭한 게임이었지만, 적어도 퍼즐 부분에서 만큼은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난이도를 높이자니 퍼즐에 관심 없는 플레이어들이 걸렸을 것이다. 닌텐도는 어려운 문제 해결을 원하는 기존 팬덤과, 쉬운 퍼즐을 원하는 신규 플레이어 사이에서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닌텐도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이하 <왕국의 눈물>)을 발매했다. 결과물은 놀라웠다. <야숨>의 상호작용을 월등히 뛰어넘는 다양한 환경 상호작용, 개선된 편의성과 전투, 기존의 비선형적 진행은 유지하면서도 더 친절해진 스토리텔링 등. <야숨>과 비교하여 거의 모든 게임의 요소가 발전했다. <야숨>은 <왕국의 눈물>에 비하면 그저 시작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남은 건 퍼즐이다. <왕국의 눈물>은 새로운 '젤다'를 위해 기존 팬덤을 버리는 선택을 했을까? 아니면 기존 팬덤과 새로운 '젤다' 팬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해답을 기적적으로 찾아냈을까? <왕국의 눈물>은 시리즈 전통의 퍼즐을 어떤 식으로 풀어냈을까?
<야숨>의 신수 바⭑나보리스의 내부 지도. (출처: '젤다' 던전)
이번 작품에서 주인공 링크는 총 7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중 직접적으로 퍼즐 풀이에 사용하는 능력은 3개로 좁혀진다. 염력처럼 원거리에서 물체를 들어 옮기거나 물체끼리 결합하는 ‘울트라핸드’, 링크의 머리 위 천장을 향해 상승하여 통과하는 ‘트레루프’, 지정된 물체의 시간을 역으로 돌리는 ‘리버레코’다.
위 능력들은 매우 강력하며 능력 간 시너지가 딱딱 달라붙는 인상을 준다. 리버레코는 화면이 보이는 구간까지는 전부 사거리에 포함된다. 능력의 지속 시간도 넉넉하게 주어져서 멀리 있는 물체라도 얼마든지 능력을 사용한 다음 능력의 지속시간 하에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특히 울트라핸드와의 궁합은 찰떡이다. 바닥에 용암이 깔려 있어서 링크가 지나갈 수 없는 지형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울트라핸드를 사용하여 평평한 물체 하나를 바닥에 두고, 도착 지점까지 울트라핸드로 물체를 옮겼다가 링크가 있는 지역까지 끌어당긴다. 그 다음 리버레코를 사용하면 울트라핸드로 물체를 옮긴 지점까지 물체가 이동한다. 그사이에 링크를 조종하여 물체를 타면 도착 지점까지 자동으로 움직이는 이동 수단이 된다.
울트라핸드로 땡긴 후에
시간을 돌리면 물체가 울트라핸드 궤적을 따라 이동한다
울트라핸드+리버레코 조합은 <왕국의 눈물>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조합이다. 여기에 머리 위 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트레루프까지 사용한다면 상당히 많은 퍼즐 해결 방법의 가짓수가 생겨난다. <왕국의 눈물> 곳곳에 위치한 사당이나 신전에서 개발자가 의도한 ‘정석’ 루트가 있지만, 기본 능력만 잘 조합해도 정석 루트를 스킵하고 사당이나 신전 클리어가 가능하다. 추가로 ‘튤리’같은 고성능의 영걸마저 얻게 되면 해결의 수단은 더욱 늘어난다.
<왕국의 눈물>의 전체적인 퍼즐 의도나 경향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던전은 ‘4대 신전’일 것이다. 전작의 ‘4대 신수’ 던전에 해당하는 <왕국의 눈물>의 메인 던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기사에서는 4대 신전 중 하나인 ‘화염의 신전’을 대상으로<왕국의 눈물>의 퍼즐 설계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돌 수 있는 '4신전' 중, 처음 화염의 신전에 입장하면 중앙에 5개의 고리가 걸려있는 문이 있다. 고리를 풀기 위해서는 맵 곳곳에 위치한 5개의 징을 울려야만 한다. 신전의 구조는 5층으로 되어있으며, 몇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다. 플레이어는 각기 다른 위치에 있는 징들을 울리기 위해 신전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한다.
신전의 선택 자체는 자유지만, '일반적으로' 링크가 신전에 입장하면 그 안에서 모든 구역을 자유롭게 오갈 수는 없다. 복층 구조의 신전에는 층계를 오르내리는 계단이나 엘리베이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갈래로 나뉜 섬들은 용암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접근하기 어렵다.
다른 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광차를 만들어서 섬과 섬 사이를 잇는 선로를 타야 한다. 문제는 선로가 처음부터 모든 섬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원하는 섬에 닿기 위해서는 맵 곳곳에 위치한 오브젝트를 조종하여 선로를 바꿔야 한다. (굳이 표현해) '정석'대로라면, 플레이어는 선로를 조종하면서 맵의 변화를 파악해야 목적지인 징에 도착할 수 있다. 선로 조종은 화염의 신전 전체를 관통하는 메인 기믹이자 퍼즐이다.
노란색 원에 표시된 오브젝트가 선로를 바꾸는 오브젝트 중 하나다.
신전의 규모가 크고 선로 조종에 따른 맵의 변화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기에 <왕국의 눈물> 전체에서도 상당히 까다로운 던전에 속한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반드시 선로를 타야 할 이유는 없다. <왕국의 눈물>에서는 하나의 퍼즐 해결을 위해 다양한 수단을 준비해 놓았다. 어떤 수단을 써서 클리어할지는 플레이어의 역량에 달렸다.
우선 맵 주변에 있는 로켓을 방패에 붙여서 꼭대기 층인 5층까지 단숨에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튤리’ 영걸을 가지고 있다면 바람을 타고 패러세일로 목적지 근처의 벽까지 날아가 기어올라가는 방법도 있다. 조나우 기어 몇 개를 조합하여 비행기를 만들고 공중으로 날아다닐 수도 있다. 아니면 아예 광차를 버리고 링크를 조종하여 살금살금 선로 위를 이동하여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식도 있겠다. 이외에도 해결 방법은 수없이 많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자. 화염의 신전을 1층부터 5층까지 광차로 이동한다고 가정했을 때 본 기자가 찾아낸 이동 루트는 다음과 같았다. 맵 중앙에서 출발 -> 6시 -> 12시(2층) -> 중앙(3층) -> 8시(4층) -> 다시 중앙 -> 10시(5층)의 순서였다. 경로가 제법 복잡한 데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오브젝트를 조종하면서도 변화하는 선로를 파악해야 5층까지 이동할 수 있다.
불의 신전에서 5층까지 가는 경로. 파란색 별은 출발, 빨간색 별은 도착이다.
하지만 광차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5층까지 이동하는 루트는 어땠을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냥 1층부터 기어올라가는 거였다. 스태미나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5층까지 갈 수 있다. 중간에 트레루프를 쓸 수 있는 구간도 있어서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개발진 측에서 막으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기어오르는 구간을 가로로 튀어나오게 만들어서 도저히 기어올라갈 수 없게 막으면 된다. 섬 간의 이동을 막고 싶었다면 섬 위치만 멀찍이 떨어뜨려 놓아도 충분하다. 링크의 패러 세일로 닿을 수 없을 만큼만 거리를 두면 된다. ‘비행기’를 제조할 조나우 기어가 없는 플레이어라면 어쩔 수 없이 광차를 이용하여 목적지에 도달할 방법을 궁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개발진은 일부러 ‘틈’을 만들어 놓았다. 우선 선로로 이동하는 경로를 만들고, 플레이어의 재량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신전을 올라갈 수 있도록 한 것으로 풀이된다.
왜 이런 디자인을 만들었을까? 기자는 <야숨> 이후 나왔던 일부 딜레마-그러니까 퍼즐 요소가 약하다는 불만-에 대한 <왕국의 눈물>의 파훼법이라고 해석한다. ‘정석’에 해당하는 기믹과 풀이법을 따로 만드는 대신, 다양한 능력을 주고 의도적으로 레벨 디자인을 느슨하게 만든다. 굳이 일반적인 풀이가 아니더라도 퍼즐을 해결할 여지를 만들어 놓는 방식이다. 비단 화염의 신전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전이나 사당에서도 상당수 유사하게 퍼즐이 풀린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야숨>에서도 플레이어의 역량에 따라 정석 이외의 방법으로 퍼즐이 풀리는 사례는 있었다. 가령 지정된 위치에 두 개의 전기공을 위치시켜 전류를 통하게 하는 구간이 존재한다. 여기서 다른 해결 방법도 있다. 한 개의 전기공만 놓은 상황에서 전도 물질인 무기를 다량 연결한다. 그렇게 다른 전기공 위치까지 도달하게 만들면 한 개의 전기공만으로도 두 군데의 전류를 통하게 만들어 퍼즐을 풀어내는 식이다.
<야숨>도 하나의 퍼즐, 나아가 게임 내 흩어져 있는 문제(몬스터, 길 찾기 등)에 대해 다양한 해결 방식을 주는 철학 자체는 같았다. 그러나 <왕국의 눈물>에 비해 그 수단이 한정적이었고, 있더라도 론칭 초기 일반 플레이어가 활용하기에는 어려웠다. 반면 <왕국의 눈물>에 와서는 링크가 가진 능력이 강화되면서 퍼즐을 풀어내는 방식이 전작보다 자유롭고 유연해졌다. 일반 플레이어들도 약간의 창의성만 발휘한다면 얼마든지 기존 풀이 의도와 다르게 퍼즐을 스킵할 수 있다. (그래서 통나무 이어 붙이기가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왕국의 눈물>의 퍼즐 디자인에 대해서는 플레이어마다 의견이 갈리는 추세다. 우선 퍼즐을 해결하는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더 즐거워졌다는 말이 나온다. 우선 “전작에서는 퍼즐을 푸는 방식이 정해져 있다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어서 자유도가 올라갔다고 느꼈다”는 의견이 있었다. 또 “자신의 창의력으로 뭐든지 할 수 있게 만든 게 <왕국의 눈물>의 콘셉트”이라는 언급도 있었다.
아쉬운 목소리도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상당수의 퍼즐이 개발진의 의도를 무시하고 풀리는 데다가, 풀이법을 생각하기도 쉽다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리버레코나 로켓방패로 ‘날먹’할 각이 보이는 퍼즐이 있는데 굳이 의도대로 풀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라는 불만이 있었다. “번개의 신전은 트레루프로 기존 루트 거의 무시하고 올라갈 수 있는데 이건 자유도가 아니라 퍼즐 설계가 허술한 거 아니냐”는 입장도 있었다.
대중성을 위해 타협한 결과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야숨> 시작의 대지 퍼즐조차 어렵다는 사람이 많은데 구작처럼 풀이법을 정해 놓고 어렵게 만들면 대중의 인기를 얻기 어렵다”는 언급이 있었다. <왕국의 눈물> 퍼즐의 방향성을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외에 <왕국의 눈물>의 퍼즐 디자인을 이해하면서도 아쉬워하는 의견이 많았다. 커뮤니티의 이런 반응들은 '젤다'가 그만큼 뜨거운 관심을 받는 시리즈라는 방증으로 보인다.
과연 닌텐도는 다음 '젤다'에서 어떤 '문제 해결'을 보여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