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파 21>은 설명이 필요 없는 게임이다. <피파 20>, <피파 19>, <피파 18>처럼 축구 게임이고, 팀이나 선수를 조작해 상대편 골대에 골을 많이 넣으면 된다. <피파 20>부터는 VOLTA(볼타)가 추가되면서 축구 게임이면서 동시에 '길거리' 축구 게임이기도 하다. 1990년대부터 지금껏 스포츠 게임의 명가 EA가 만들고 있다.
이번에도 버릇처럼 <피파 21>을 플레이하고 있다. 풍부한 라이선스를 갖춘 건 EA의 <피파>뿐이고, 가장 매끄러운 축구 '플레이' 게임도 <피파>가 된 지 오래다. (축구 '매니지먼트' 게임은 <FM>이다) 매치 엔진, 멀티플레이 인프라, 얼굴, 육성 등등... <피파>의 퍼포먼스는 매년 대단하다.
<피파>는 축구 게임의 최첨단이다. 이번 작품에는 정말 많은 발전 요소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불만도 들었다. 게임에 묘하게 광고가 들어간 느낌이다. 선수 오버롤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피파 얼티메이트 팀(이하 FUT)은 이번에도 석연치 않다.
일단 좋은 점부터 이야기하자. <피파 21>의 게임 플레이는 <피파 20>보다 훨씬 발전됐다.
기자는 '월드클래스' 난이도 정도로 설정하고, 시도 때도 없이 똥볼을 날리는 캐주얼 게이머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조심스럽지만, 분명 전작보다 플레이가 섬세해졌다고 본다. 공격수의 침투 방향을 설정하는 커맨드(L1+오른쪽 스틱)가 추가됐다. '에자일 드리블링' 기술도 추가됐는데 공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재빠르게 수비수를 제치는 기술이다.
또 크로스 옵션이 꽤 많아졌다. 빠르게 휘어 머리로 날아가는 휘핑 크로스, 허리 위치로 쏴서 발리 슈팅을 할 수 있게 돕는 드라이븐 크로스 패턴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크로스를 막는 수비수들도 능동적으로 대응했다. <피파 20>에서는 스루패스로 뒷 공간 터는 게 '본좌'처럼 느껴졌는데 <피파 21>의 AI 수비수들은 더욱 전략적으로 스루패스를 끊어낸다.
AI는 전작보다 빠르게 플레이어를 압박하고, 전술 설정하는 대로 바뀌는 포지션을 보는 재미도 있다. 전에 없던 선수 애니메이션들도 추가됐는데 내가 선택한 선수가 달릴 때 옆으로 비켜주는 모습이나 경합 때 몸을 감싸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메시, 포그바, 판 데이크 등 월드 클래스 선수들이 AI 상태에서 능동적으로 좋은 움직임을 보여준 것도 흥미로웠다.
여담으로 경기를 불러올 때마다 등장하는, 곧바로 스킵할 수 없는 미니게임은 커맨드 입력에 익숙해진 이후부터는 지루했다.
<피파 21>에서 커리어모드는 눈에 띄게 진화했다.
감독이 되면 <FM>에서 보던 바둑판 모양의 '양방향 매치 시뮬레이션'을 통해 게임에 적절히 개입할 수 있다. 전에 없던 기능이다. 이제 감독은 시뮬레이션 중 게임을 아예 넘겨버릴 수 있고, 여러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전술적 지시를 내리거나 교체할 수도 있으며, 특정 구간에는 아예 게임으로 들어가 실력으로 게임을 뒤집어버릴 수도 있다. 매니지먼트와 플레이 사이의 접점을 잘 잡았다.
또 선수의 성장도 파라미터로 나타냈기 때문에 굉장히 눈에 잘 들어온다. 활동 관리 시스템을 통해 선수의 훈련 스케줄도 짤 수 있게끔 세분됐는데, 선수에게 휴식을 부여할 수도 있다. <FM>에서 좋았던 기능을 잘 빌려 온 모양새다.
이적 시장도 할 만했는데, 임대 후 이적 조항과 스왑딜이 추가됐다. 늦었지만 요즘 마켓의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 라이벌 구단에 선수를 보내지 않거나, 수준이 낮은 클럽에 월드클래스 선수가 오지 않는 부분도 구현됐다. <피파 21>의 육성과 이적 시스템은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팀을 운영하는 재미를 준다.
선수 모드는 <피파 20>에서 이렇다 할 발전은 없었다. 애초에 선수 육성 쪽은 볼타의 스토리모드 '더 데뷔'에 더 무게를 둔 느낌이었다. 길거리 축구팀의 에이스로 두바이에서 열리는 볼타 대회에 우승하기 위해 정진한다는 내용의 '더 데뷔'는 저니 모드의 부재를 달래주는 한편, 11 대 11 축구만 알았던 이들에게 볼타를 안내하는 모드였다. (물론 기자는 저니 모드가 더 좋다.)
차세대 기기를 구매하면 <피파 21>에서 추가 비용 없이 플레이할 수 있게 한 점도 높게 평가할 만하다. 아직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9세대 콘솔로 <피파 21>을 하면 엔진의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거라 한다.
그런데 차세대 기기가 거실에 들어오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피파 22>가 나올 것이라고 보면 그렇게까지 좋은 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EA의 배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한국어 UI를 지원하는 점도 기록해둘 만하다.
<피파> 프랜차이즈엔 몇 년째 반복되는 광고가 있다. 가만히 예전 작을 즐기려고 하면 EA가 다가온다. "에헤이, 자네! 왜 아직도 옛날 겜을 하고 있어?"
EA는 이전 작 메인에 대문짝만 하게 차기작을 사라고 선전한다. 못 본 체 무시할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광고 아닌가? 내 돈 내고 산 게임에 차기작 광고가 들어가기를 수 년째다. 솔직히 말해서 <피파> 하는 사람들이 매년 신작 나오는 걸 모르겠나?
불과 1년 전 67,000원을 내고 <피파 20>을 샀는데, EA는 천연덕스럽게 전단을 내민다. "이제 FUT 하려면 <피파 21>로 와야 해!"
그렇지만 여유를 두고 예전 작품을 플레이하고픈 사람도 있을 것이다. EA는 자신들이 홍보하는 대로 FUT 말고 굉장히 다양한 모드가 있다. '실축'에서 은퇴한 선수를 (ICON 없이) 만나볼 수도 있고, 저니 모드처럼 최신 버전에서는 사라진 모드를 즐길 수도 있다. 그런데 EA는 자꾸 최신 버전으로 넘어오라고 재촉한다. 적어도 구작에서 신작 광고를 끌 수 있게 하면 좋겠다.
게임 속 요소도 마찬가지다. 바로 지난달, EA는 <UFC 4>에 노골적인 광고를 삽입했다가 비판받고 삭제한 바 있다. 7만 원짜리 게임 <UFC 4>에서는 아마존 TV의 드라마 시리즈가 광고됐다. 전대미문의 광고였다. <피파 21>에 그 정도의 광고는 없지만, 게임에는 라이선스 대상인 구단부터 각종 스폰서까지 각종 기업의 로고와 아이템이 있다.
서두에 쓴 대로 <피파>가 '축구 게임의 최첨단'인 이유는, 게임이 현실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의 메시가 빠르고도 정교하게 슛을 때릴 때, 레알마드리드의 쿠르투와가 긴 팔을 뻗어 공을 막아내는 장면을 가장 정교하게 구현하는 시뮬레이터는 당연 <피파>다. 그렇기에 유니폼 스폰서와 LED 광고 판넬의 펩시, 마스터카드 광고 같은 것들은 용인된다. 원래 축구가 그러니까.
하지만 EA가 제공하는 환경은 교묘하게 조작된 것이다. 펩시코와 마스터카드는 실제로 UEFA 스폰서지만, EA는 전광판에 계속 자기들 광고를 삽입한다. 게임을 하다 보면 광고판에 <피파 21> 로고는 물론 EA스포츠의 SNS를 팔로우하라, FUT에 동참하라, ICON 선수들이 출시됐다 같은 홍보가 실제 UEFA 광고와 섞여서 돌아간다.
<피파>는 수년 전부터 나이키, 아디다스 등 유명 스포츠웨어 브랜드의 쇼룸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들은 자기들의 새 유니폼은 물론 축구공, 축구화 같은 축구 관련 아이템과 슬리브, 집업 같은 일상적 복장까지 집어넣고 있다. <피파 21>에서 브랜드 패션 아이템은 '볼타 코인'으로 판매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게임의 현실성과 재미를 살려주는 기능이기도 하다. 보기에 따라서 게임의 핵심 요소가 아니므로 신경 쓰지 않는다면 넘어갈 만한 지점이다. 하지만 <피파 21>의 재현이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는 점은 짚어둘 필요가 있다.
<피파>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프로 축구 선수들도 자신들의 <피파> 데이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EA와 주요 구단들은 매년 스타 선수들을 불러놓고 자기 능력치를 예상하게 한 뒤, 결과를 보여주는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SNS를 통해 게임 속 자신의 모습까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며 강력하게 어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체흐 사례가 가장 유명하다.
이런 콘텐츠는 대체로 '유머 자료' 정도로 소비되지만, 몇몇 항의는 진지하게 봐야 한다. <피파>의 선수 능력치 설정은 예전부터 도마 위에 올랐고,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EA는 선수가 조금만 나이를 먹어도 기하급수적으로 속도 숫자를 깎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북의 이동국은 <피파 21>에서 스피드가 32가 나왔는데, 게임에서 가장 낮은 수치다. 나이가 많은 선수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숫자다. 실제로 본인도 납득하지 않았다.
메시, 라모스, 노이어 등 30대 후반을 향해 가는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자기 위치를 지키는 현대 축구의 모습을 제대로 반영하고 못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언급한 선수은 국제적인 인지도가 높다 보니 높은 성적을 받았지만, EA는 기본적으로 나이 먹은 선수들의 스탯을 섬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저 "나이 한 살 더 먹었으니 스피드를 더 깎자"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명망 있는 선수들이라 하더라도 능력치 기준이 들쭉날쭉이다. EA는 <피파> 시리즈의 선수 데이터가 실제 축구와 연결된다고 주장하지만 의심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뮌헨 트레블의 주역 노이어의 오버롤이 89인데, 챔피언스리그에서 뮌헨에게 8골이나 헌납한 테어슈테겐의 오버롤은 91이다. 역대급 활약을 펼쳤던 손흥민의 오버롤이 87인데, 시즌 내내 부진했던 피르미누와 아자르도 비슷한 80점 후반을 받았다. 인테르의 루카쿠는 아예 트위터에서 EA의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스포츠의 감동을 주는 축구 선수들이 없으면 오늘날의 <피파>도 없다. <피파 21>의 현역 선수의 스탯 배분은 여러모로 의문부호를 남긴다.
여러 측면에서 <피파>는 풀 프라이스 게임의 가치를 되묻게 한다. 닌텐도 스위치 버전을 <피파 21> 라벨로 냈는데, <피파 20>에서 변한 점이 많지 않아서 IGN 리뷰어가 작년 리뷰를 그대로 '복붙'한 사건은 이미 유명하다.
돈 주고 게임을 사면 제대로 된 물건을 쓸 수 있으니, PS4 유저라면 NS 유저보다는 사정이 좀 더 낫다. 물론 플레이어가 멀티로 <피파>를 하려면 매년 신작을 구매해야 하고, PSN 플러스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하며, 선수 뽑기 비용도 들여야 한다.
그 결과 최근 <피파>는 굉장히 돈이 많이 드는 취미로 여겨진다. FUT의 선수 뽑기는 게이머 커뮤니티는 물론 유럽의 몇몇 국가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유럽 의회에서 '루트 박스'를 막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언급되는 게 <피파> 시리즈다. 이 기사에 언급된 아자르, 쿠르투와, 루카쿠가 국가대표로 뛰는 벨기에판 <피파 21>에는 선수 뽑기가 금지됐다.
코로나19로 친구들과 만나서 게임을 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피파>는 EA에게 많은 돈을 벌어다 줬다. 지난 상반기 EA의 게임 판매 매출은 37% 증가했고 일등공신은 단연 <피파>다. EA가 상반기에 무슨 게임을 냈는지 기억하는 사람 있나? 정답은 <C&C 리마스터>와 NS판 <번아웃 파라다이스: 리마스터>다. 신작 없이 매출 증가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리그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에서 <피파>는 엄청난 주목을 받았지만, 코어 유저들은 <피파 21>에서 작년에, 재작년에 했던 것과 똑같이 돈을 쓰게 생겼다. <피파 21>는 게임 자체로 보면 전작에 비해 눈에 띄는 변화가 많은 작품이지만, 수년 째 시리즈를 팔로우하는 팬 입장에서 보면 너무 매워서 눈물 나오는 기획이다. 메타스코어에서 <피파 21>의 전문가 리뷰는 73점, 유저 리뷰는 0.8점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기자도 오래도록 <피파>를 즐기고 있다. <피파> 유저들은 대체로 게임 안에 '전에 없던 엄청난 혁신'보다는 우리가 아는 축구를 얼마나 잘 담아냈는지를 볼 것이다. 내가 아는 축구는 <피파 21>에 얼추 잘 들어있다. <피파 21>은 EA 기술력의 결정체다.
그렇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멀티플레이의 공간이 'FUT'과 '볼타'로 한정되면서 <피파>는 괴물이 됐다. 많은 사람이 FUT을 하기 위해 <피파>를 하는데, 랜덤박스 모델이 들어간 풀 프라이스 게임이 매년 꼬박꼬박 나오고 있다. 윤리적, 상업적 문제를 떠나 순전히 플레이어로서 이 게임은 너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