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플랫폼에서 MMO는 흔치 않은 장르다. 대규모의 게임월드를 짜임새 있게 구현해야 하는 장르 특성상 많은 인력과 기술력이 요구되지만, VR 게임 개발사 중에는 ‘대기업’이 드문 편이기 때문.
1월 28일 출시한 <제니스: 더 라스트 시티>(이하 <제니스>)는 ‘희귀 장르’인 VR MMO에서 두각을 나타낸 신작이다. 소규모 개발사인 ‘라멘 VR’은 참고할 만한 선례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도 VR 유저들의 흥미를 끌 만한 타이틀을 만들어낸 듯하다. 출시 첫날 스팀 전체 판매 게임 중 2위를 기록했고, 평가를 남긴 2,484명의 유저 중 88%가 게임을 추천하고 있다.
<제니스>는 VR만의 장점과 특성을 어떻게 MMO에 녹여내고 있을까? 특별한 한계나 단점은 없을까? 몸을 짓누르는 만성피로를 이겨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체험해봤다.
VR은 비교적 첨단 기술이고, VR MMO는 더욱더 첨단 개념이지만, <제니스>는 2000년대 MMO를 다시 플레이하는 듯한 첫인상을 준다.
이는 낮은 퀄리티의 올드한 그래픽 탓이 가장 크다. VR 게임은 눈에 가까운 렌즈에 영상을 송출하는 까닭에 비교적 고해상도, 고프레임이 요구돼 사양을 많이 타는 편이고, 그래서 그래픽 퀄리티를 희생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여러 명이 동시 접속해야 하는 MMO 장르의 특성까지 생각하면, 제작진이 원활한 플레이를 위해 미려한 그래픽을 포기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다.
그렇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색감이나 UI 등 그래픽 사양과는 크게 관계없는 여러 미감적 선택에서도 <제니스>는 다소 실망스럽다. 알아볼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 없다는 듯한 투박한 글꼴과 정직한 사각형 버튼, 서로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배경 오브젝트의 배색 등을 보고 있노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독자적인 스타일을 통해 퍼포먼스와 비주얼 사이의 적절한 절충안을 찾은 다른 VR 혹은 PC 인디 게임들을 참고했다면 어땠을까. 안드로이드 기반 퀘스트 2에서 구동되는 저사양 VR 슈터 <피스톨 윕>, 로우폴리곤으로 구현했지만 촌스러운 느낌을 주지는 않는 <딥 락 갤럭틱> 등이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제니스>의 MMO적 측면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도통 새로움이 없다. 2000년대를 연상시키는 그래픽과 마찬가지로, 게임 디자인적 측면에서도 고루한 면이 상당히 많다.
특정 몬스터 퇴치, NPC 말 걸기 등 단순한 활동을 요구하는 퀘스트 구조나 탱/딜/힐로 구분되는 전통적 직업구조, 마나와 스태미너를 사용하는 스킬 시스템, 특정 자원을 소모하여 이뤄지는 장비 제작, 강화 시스템, 맵 곳곳에 숨겨진 특별 아이템을 모으는 탐험 시스템 등은 모두 익숙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활동들이 VR을 만나면서 일반 MMO에서 접해보지 못한 특별한 경험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예컨대 대부분의 MMORPG에서 몬스터 퇴치 미션이 흥미롭지 않은 이유는, 요구되는 ‘잡몹’의 퇴치과정 자체가 지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VR의 양손 컨트롤 시스템을 접목한 <제니스>의 전투 시스템은, 평범한 몬스터 사냥에조차 나름의 재미를 부여한다.
전사 클래스의 경우, 적이 휘두르는 칼을 타이밍과 각도에 맞춰 막고, 반격할 수 있다. PC에서는 마우스 클릭에 불과했을 행동이 <제니스>에서는 몸으로 펼치는 액션이 되는 셈이다.
VR의 특성을 고려한 적절한 난이도 밸런싱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VR 게임에서는 검의 공격속도를 시스템적으로 제어하기 힘들다. 플레이어가 팔을 휘두르는 속도가 곧 공격 속도가 되기 때문. 그렇다고 인게임 캐릭터 속도를 유저와 다르게 제한하면 VR의 핵심인 ‘몰입’이 깨지기 쉽다.
이 문제를 <제니스>는 ‘충전’ 시스템으로 해결했다. 검의 기운이 완전히 충전됐을 때 휘둘러야 온전한 대미지를 입힐 수 있게 함으로써 ‘난타’를 방지하고 있다.
전투 이외의 콘텐츠에서도 제작진은 VR적 재미를 활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숨겨진 아이템을 찾는 ‘탐험’ 콘텐츠는 수직적인 이동 메커닉을 최대한 요구하도록 설계됐다. 양손으로 벽을 타며 고지대에 오른 뒤, 양팔을 벌리고 글라이딩하며 공중을 미끄러지는 경험은, PC에서와는 전혀 다른 쾌감을 준다.
요리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일반적 MMO에서 요리 시스템을 상세하게 구현한다면 그저 귀찮은 요소를 추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VR게임인 <제니스>에서는 다소 맥락이 다르다. 직접 밀가루 반죽을 공중에서 뒤집고, 오렌지를 칼로 썰어내는 등의 과정이 아기자기한 재미를 준다.
문제는 이러한 탐험, 요리 콘텐츠가 개별적 재미를 줄 뿐, 게임의 핵심 시스템인 전투, 성장, 퀘스트 등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게다가 양팔의 조작 실력이 승패와 직결되는 전투에 비해, 이들 콘텐츠는 일정한 시간만 소모하면 누구나 같은 결과를 획득할 수 있다. 수행과정의 긴장감과 흥미가 떨어진다는 점에서 VR 콘텐츠로서의 깊이도 마냥 충분하지는 않다.
VR 경험은 까다롭다. 고가의 장비와 충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유 외에도, 신체적 피로감, 악명높은 VR 멀미 등 유저로서 감수하고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 보통 게임 경험보다 많은 편이다. 그런데도 VR이 일정 수준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은, 아직은 VR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의 현장감 넘치는 경험 덕분이다.
10여 명으로 구성된 ‘라멘 VR’은, 그 이름에 드러난 것처럼 VR의 고유한 매력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기존의 VR 게임들을 벤치마킹해 요소요소에 ‘인게임 활동’으로 배치해둠으로써, 흡사 ‘VR 놀이터’를 방문한 것과 같은 재미도 준다.
아쉬운 것은 MMO과의 결합에 있어 새롭고 신선한 시너지를 발견하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익숙함과 익숙함이 만나 ‘누구나 예상할 만한’ 재미를 창출하는 것에 그치며, 여기에 익숙해지는 순간 게임에도 흥미를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낮은 그래픽 퀄리티, UI/튜토리얼의 엉성함, VR 특유의 피로감은 이런 ‘퇴색’을 가속할 만한 또 다른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