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빈 인 더 우즈>는 핀트 어긋난 국내 마케팅에 희생된 영화로 꼽힙니다. 포스터, 광고를 보고 ‘정통파’ 공포영화를 기대하며 극장을 찾았던 관객 상당수가 황당한 전개에 당혹감을 느꼈다고 하죠. 심지어 일부 관객은 화를 내며 영화관을 떠나더라는 후일담도 있습니다.
사실 <캐빈 인 더 우즈>는 공포영화 클리셰를 잔뜩 버무려 만든 블랙 코미디입니다. 공포물에 일가견이 있고 패러디물을 좋아하는 관객들은 크게 호평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흥행에 자신이 없었던 국내 배급사가 웃음기를 싹 빼고 ‘블록버스터 공포물’이라는 애매한 홍보에 나선 것인데, 이런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이처럼 기대한 내용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는 많습니다. <디스아너드>, <프레이> 디렉터가 만든 ARPG <위어드 웨스트> 역시, 올해 나온 타이틀 중 가장 호불호가 명확히 갈릴 만한 게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수십 시간이 아깝지 않은 수작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불쾌한 경험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게이머에게 알맞은 작품인지 천천히 알아보겠습니다.
<위어드 웨스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라파엘 콜란토니오(Raphael Colantonio)는 <디스아너드>의 공동 디렉터이자, <프레이>의 디렉터였습니다.
<디스아너드>와 <프레이>는 둘 다 이머시브 심(몰입 시뮬레이터) 요소를 통해 인기를 끌었던 FPS입니다. 이머시브 심이란 플레이어가 창의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게임 디자인을 말합니다. <디스아너드>와 <프레이> 모두 유저 각자의 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위어드 웨스트>가 발매되기 전부터 창의적이고 정교한 전투 시스템을 기대하는 시각이 꽤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를 품고 접근한다면 안타깝게도 <위어드 웨스트>는 실망스러운 작품일 수 있습니다.
자세한 이유를 알아보기에 앞서 게임의 기본 구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위어드 웨스트>는 퀘스트, 탐험, 전투, 장비, 스킬 등의 요소를 두루 갖춘 RPG 포맷을 기초 삼고 있습니다. 스토리 설정은 ‘서부극’과 ‘오컬트’ 장르가 섞여 있습니다. 현상금 사냥꾼이 은행 강도를 쫓다가 늑대인간에게 습격을 당하는, 그런 세계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이 세계에서 마법, 저주, 몬스터는 초자연현상이 아닌 일상으로 취급됩니다.
월드는 클래식 RPG 스타일로 구현됐습니다. 2D 지도로 구현된 ‘월드 맵’ 상에 대저택, 마을, 탄광 등 여러 장소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퀘스트를 따라, 혹은 호기심을 따라 각각의 장소에 진입하면 탐험이나 전투를 벌이는 ‘지역 맵’이 펼쳐집니다.
지역 맵은 넓고 디테일한 3D 공간입니다. 각 장소의 테마에 어울리는 지형과 건물, 사물이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이 복잡성이 앞서 말한 ‘창의적인 전투’를 펼칠 수 있는 좋은 무대가 되어줍니다
갱단 두목을 제거하는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먼저 지형지물과 사각지대를 이용해 잠입, 표적과 호위병만 빠르게 제거한 뒤 빠져나가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적들의 순찰·이동 패턴이 조금씩 변해 약간 까다롭지만, 끈기만 있다면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물론 ‘정면 충돌’ 시나리오도 다양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샷건 탄환이 충분하면 좁은 통로나 옥상을 점거해서 접근하는 적을 차례로 제거해도 됩니다. 컨트롤과 스킬 활용에 자신이 있다면 대로를 활보하며 화려하게 싸워도 무방합니다.
더 나아가 맵에 널린 여러 오브젝트도 전략 구사의 폭을 넓혀줍니다. 폭약 통을 걷어차서 적들 사이에 떨어뜨리거나, 묶인 말을 풀어줘 적들을 분산시키거나, 광산 차 안에 숨어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등 흥미로운 수단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전투 경험을 위한 ‘판’은 잘 깔려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잔칫상에 재를 뿌리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카메라 구도, 조작감, AI 등 전투의 기본이 되는 시스템들입니다.
<위어드 웨스트>는 공중에서 사선으로 내려다보는 아이소메트릭 시점입니다. 여기에 줌인·줌아웃과 약간의 각도 변경은 가능하지만, 제한이 큽니다. 이런 카메라 구도가 주변 환경 파악을 크게 제약하면서, 플레이에 불쾌한 걸림돌이 됩니다.
예를 들어 건물에 바짝 붙어 창문을 열어도 카메라 각도상 안쪽을 살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폭탄 투척, 잠입, 사격 등 다음 행동을 연계하기가 어렵습니다. ‘억울’하거나 답답한 상황도 자주 연출됩니다. 이를테면 숨어서 투척한 다이너마이트가 보이지도 않는 천장 구조물에 부딪혀 주인공 바로 앞에 떨어지면, 좌절감은 상당합니다.
오브젝트를 활용한 액션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기묘한 조작감 때문입니다. 여러 오브젝트가 가까이 붙어있을 때 ‘원하는 물건’을 정확히 선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패드로 하면 사정이 조금 낫지만 완전한 해결은 아닙니다. 긴박한 순간에 엉뚱한 물건과 상호작용하게 되면 전투가 급격히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적과 아군의 AI도 종종 고장나 버립니다. 주인공이 고지대에 올라가 있으면, 상당수의 적이 올라오는 길을 쉽게 찾지 못해 한동안 방황합니다. 좁은 통로에서 캐릭터가 서로 끼어버리는 일도 자주 일어납니다. 불이 붙은 바닥, 독극물이 깔린 바닥을 과감히 돌파하는 캐릭터들도 많습니다. 마지막은 어쩌면 제작진이 의도한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별로 똑똑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약 <디스아너드> 등에서 경험한 ‘물 흐르는 듯한’ 전투를 기대했다면, <위어드 웨스트>는 이렇듯 실망을 느낄 만한 타이틀입니다. 여러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기본적 만듦새에 발목을 잡힌 형국이어서 아쉬움은 더욱 큽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위어드 웨스트>는 RPG에 기초한 게임입니다. 따라서 RPG 측면을 배제하고는 온전한 평가가 어려울뿐더러, ‘클래식 RPG의 재해석’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평가는 부분적으로 반전될 수도 있습니다.
<폴아웃> 등으로 대표되는 클래식 RPG는 퀘스트 해결에서 유저에 다양한 선택지를 주고, 거꾸로 유저의 선택이 월드에 변화를 준다는 측면에서 ‘이머시브 심’과 공통분모를 지닙니다.
<위어드 웨스트> 역시 ‘다양한 플레이스타일’을 적극 권장합니다. 단적인 예로 게임은 튜토리얼과 로딩 스크린 팁에서 ‘퀘스트 진행에 얽힌 주요 캐릭터를 죽여도 된다’고 반복해서 말해줍니다. 이것은 빈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숨겨진 단서를 찾거나 다른 NPC를 찾는 등의 대안이 거의 항상 마련되어 있습니다.
제작진이 직접 여러 가지 해결 루트를 구상하고, 관련된 요소를 맵과 퀘스트라인 상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수작업’이 꼼꼼하게 이뤄졌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듯 제작진은 다소 전통적인 의미의 ‘몰입 경험’을 선사합니다.
<위어드 웨스트>의 전투 콘텐츠가 완성도 측면에서 실망을 안겼다면, 반대로 이렇게 손수 만든 RPG 콘텐츠의 분량과 밀도는 감탄할 만합니다. 월드 맵을 수놓은 수많은 장소, 예상치 못했던 랜덤 인카운터와 서브 퀘스트, 곳곳의 비밀 공간과 숨겨진 아이템 등은, 오랜 시간 플레이에도 계속 새로운 콘텐츠를 기대하며 게임을 붙잡게 한 최대 장점입니다.
물론 RPG로서도 완벽하진 않습니다. 먼저 캐릭터 육성 측면에서 뚜렷한 장단점이 있습니다. <위어드 웨스트>는 챕터마다 주인공이 바뀌는 독특한 시스템입니다. 첫 주인공은 현상금 사냥꾼 ‘제인 벨’이지만, 이후 직업이나 종족이 다른 여러 캐릭터로 전환되는데, 각 캐릭터는 고유 스킬이나 기타 특성이 다릅니다. 고전적인 ‘직업’ 시스템을 변주한 셈입니다.
이전 캐릭터의 행동이 다음 캐릭터의 스토리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내러티브의 연속성은 확보됩니다. 또한, 서로 전혀 다른 처지에 놓인 여러 인물을 화자 삼으면서 여러 주제를 다루는 점이 신선합니다. 그러나 롤플레잉의 큰 재미 중 하나인 ‘캐릭터 육성’이 주기적으로 대부분 초기화되며, 때로 원하지 않는 플레이스타일이 강요될 수 있다는 사실은 호불호가 갈릴 만합니다.
장비 시스템도 단점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무기는 근접무기, 리볼버, 장총, 샷건, 활 등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같은 분류 안에서는 다양성이 떨어집니다. 또한, 특이한 효과나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는 장비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과도한 ‘장비 빨’로 인해 전투 콘텐츠가 지루해지는 상황을 막는 장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능은 제한하되 기능은 다양하게 마련해줬다면 더 다양한 성장이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매력적인 세계관, 독창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에 비해 다소 피상적인 스토리라인 역시 기대를 밑도는 요소입니다. 제목처럼 기묘한(weird) 월드 설정 덕분에 느껴지는 매력을 냉정히 떼어놓고 보면, 어떤 감흥을 주기엔 깊이가 부족한 이야기라는 점이 아쉽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