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4>는 전편으로부터 50년 후의 이야기다. 3편에서 성역의 인간들은 천사 ‘말티엘’의 독단적 판단에 의해 9할이 사망한다. 고대의 힘을 일깨운 주인공 ‘네팔렘’들에 의해 말티엘은 저지되지만, 피해는 복구되지 않았다. 타격을 입은 천상은 인간과의 연결을 끊었고, 인간은 멸망 직전에 몰린 채 간신히 명맥만을 이어 왔다.
좌절한 인간들 가운데, 어느 날부터 성역의 창조자인 악마 릴리트를 소환하려는 시도가 확산한다. 주인공 ‘방랑자’는 일군의 마을 사람들이 벌인 소환 의식의 희생자가 될 뻔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그 과정 중에 마신 릴리트의 피로 인해 릴리트와 부분적으로 연결,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된다.
릴리트의 현현이 실제로 벌어졌으며, 이것이 성역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방랑자는 그를 추적하기 위해 몰락한 대(對)악마 집단 호라드림의 일원 ‘로라스 나르’에 도움을 구하고, 두 사람은 성역을 구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인간 세상에 횡행하는 악의 힘을 소재로 삼아 온 <디아블로> 시리즈의 이야기는 내내 어두웠다. 하지만 초기 두 작품에 비교해 지나치게 장대하고 화려했던 3편의 분위기는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그 반동에 의한 것인지, 이번 작품은 시리즈 사상 가장 어둡고 고어한 타이틀로 기획되었다는 게 제작진의 설명이다.
베타 테스트에서 공개되었던 초반 컷씬은 게임의 확 바뀐 톤을 잘 드러내며 화제를 모았다. 소박했던 시골 교인들이 악마의 꾐에 넘어가 잔학한 내면을 드러내고 목회자를 살해하는 장면은 ‘액션 게임’에는 미처 기대 못 한 수준의 섬뜩함을 안겨 줬다.
다만 실제 스토리라인을 끝까지 플레이해 보면 이 컷씬은 아쉽게도(?) ‘기선 제압’에 가까운 일회성 장면임을 알 수 있다. 문제의 컷씬은 릴리트가 지닌 타락의 힘과 그 잠재적 위협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이야기의 성격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줬으나, 이어지는 수십 시간의 캠페인에서 유사한 결의(오컬트 호러물에 가까운) 장면은 거의 만나보기 힘들다.
하지만 ‘어두운 작품’이라는 광고는 허언으로 치부할 수 없다. <디아블로 4>의 이야기는 여전히 음울하고, 가혹하다.
<디아블로 4>의 인게임 컷씬은 잘 조형된 인물들과 그에 어울리는 대사, 성우진의 탁월한 연기에 더해 스토리텔링 효과를 키우는 유용한 장치다.
아이소메트릭 ARPG 장르에서 인게임 그래픽을 이용한 컷씬은 몰입을 오히려 해칠 때도 적지 않다. 캐릭터와 카메라 사이의 기본 거리가 먼 장르 특성상 오브젝트와 캐릭터 모델링 디테일이 비교적 부족한 편이고, 모션이나 표정 구현에도 자원을 아끼는 경우가 많아 결과물이 타장르 수준에 못 미치기 쉽다.
반면 <디아블로 4>는 이러한 관행을 많은 부분 극복하고 인게임 컷씬을 스토리텔링의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 특히 다양한 구도와 컷 편집을 동원해 직접적인 ‘위력 과시’ 없이도 릴리트를 위압감 넘치는 메인 빌런으로 각인시키는 연출은 엔딩에서 그를 직접 맞상대할 때의 카타르시스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퀄리티 높은 애니메이션은 인물의 내면 묘사에도 유용한 장치다. 극적 상황에 인물들이 드러내는 회한, 공포, 분노, 슬픔의 표정과 몸짓을 자주 확인시켜 주면서 정서적 몰입을 유도한다.
이처럼 인게임 컷씬으로 퀄리티 높은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역량은, ‘라이브 서비스’를 표방하고 있는 <디아블로 4>의 향후 행보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블리자드는 본 게임에서 다뤄지지 않은 성역의 다양한 인물, 장소, 사건을 만나볼 수 있는 짧은 스토리 콘텐츠를 시즌마다 선보일 예정이다.
※ 이하 게임 주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디아블로>의 내러티브는 늘 천사와 악마, 천상과 지옥에 밀접히 연관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에 대응하는 성역과 인간들의 이야기다. <디아블로 4>에서 이러한 주제의식은 심화해 선악 대립 구도의 원초적 신화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성의 조건을 질문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디아블로 4>의 이야기 구조가 단편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메인 빌런 릴리트의 목표에서 일차적으로 드러나는데, 릴리트는 성역이 아닌 지옥의 지배권을 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의 아버지 메피스토의 힘을 흡수하려는 과정에서 성역 곳곳에 분란을 야기한다. 그렇지만 이는 모두 성역의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릴리트는 주장한다.
한편 릴리트의 아버지 메피스토는 이야기를 추동하는 핵심 미스터리를 조장하는 존재다. 메피스토는 게임 초반부터 늑대의 형상으로 주인공에게 접근, 함께 힘을 모아 릴리트를 저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인공과 일행은 릴리트가 말하는 ‘성역 해방’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릴리트와 메피스토 각각에 대한 신뢰도 문제를 두고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으며 혼란을 빚고, 이 혼란은 플레이어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그 결과 최종장에 이를 때까지 유저는 메피스토와 릴리트 둘 중 누가 더 인류에 위협이 될 지, 양쪽의 속내는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며, 이는 선형적 이야기 속에서도 호기심을 잃지 않은 채 몰입감을 유지하게 해주는 장치가 된다.
주인공 일행은 호라드림의 마지막 일원 ‘로라스’, 호라드림의 비밀 지식을 연구하던 학자의 딸 ‘네이렐’, 호라드림의 자리를 오래전 내려놓은 ‘도난’ 등이다. 호라드림이라는 공통 분모로 엮여 하나의 목표를 추적하지만 각자 사연과 가치관을 지닌 일행은 여러 사건에 의견과 반응을 달리하며 입체성을 드러낸다.
게임 플레이에는 전혀 필수적이지 않은 장면과 대사를 동원해 캐릭터의 입체감을 살려낸 점을 높이 살 만하다. 마을 경비병들이 요구하는 ‘정화 의식’을 가볍게 무시하는 로라스의 행동은 그의 실용주의를, 장성한 아들 ‘요린’의 출정을 마지못해 허락하는 도난의 태도는 그의 부성애를 명료하게 전달한다.
두꺼운 인물 묘사는 수십 시간에 달하는 <디아블로 4> 캠페인이 늘어지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이다. 주·조연 캐릭터 단위의 완결성 있는 이야기를 여러 개 엮어 종장으로 안내하는 구조는 연속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릴리트의 자취를 따라 인물들과 상호작용하며 플레이어가 마주치게 되는 건 다종다양한 비극이다. 그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성역의 인간들은 내면의 악에 굴복하여, 혹은 외부의 악의 저항하다가 꺾이고 부러진다. 주인공이 개입해 만든 승리들은 그저 다음 환란을 만나기 전 잠깐의 시간을 벌어줄 뿐인 듯하다
ARPG에서의 일반적 전개와 달리 주인공을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두지 않는 이러한 연출은 무한한 분쟁과 갈등에 놓인 성역의 현실을 강조한다. 또한, 이는 엔딩 이후에도 전투를 계속 벌여야만 하는 인게임 시스템과도 잘 어울린다.
정답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은 더 나아가 성역을 창조한 천사 이나리우스와 악마 릴리스가 성역을 대하는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이를 통해 게임은 삶의 불완전성과 투쟁의 가치를 조명한다.
이나리우스와 릴리트는 오래전 천상과 지옥의 끝없는 분쟁에 지쳐 함께 도피처가 될 ‘성역’을 만들고 ‘네팔렘’들을 낳았다. 천사와 악마 이상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던 초월적 존재 네팔렘은 세대를 거듭하며 약화하여 현재의 인간이 되었다. <디아블로 4>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소산인 성역과 인간을 부정하는 부부의 증오를 중심으로 뻗어 나간다.
이나리우스의 증오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성역 때문에 천상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된 상황을 후회하고 바로잡고자 한다. 그는 릴리트를 제거함으로써 천상의 호의를 얻어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릴리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 번째 인간 ‘라트마’가 내놓은 예언-‘천상의 빛이 증오의 심장을 꿰뚫으리라’-때문이다. 예언 속 ‘빛’이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나리우스는 릴리트를 처단하기 위한 계획에 돌입한다.
천상이 그가 응당 있어야 할 장소라면, 반대로 죄악(릴리트)과의 교합을 상징하는 성역과 인간은 부정돼야만 하는 존재다. 그렇게 완벽함과 이상향을 좇아 자신이 돌봐야 할 세계를 경시하고 혐오했을 때, 천사인 이나리우스의 곁에서도 지옥이 펼쳐진다.
지옥행 열쇠를 내어주지 않으려던 아들 라트마는 아버지에게 직접 죽임을 당한다. 충만한 믿음으로 이나리우스의 지휘 아래 지옥 토벌에 나선 기사단은 모두 처참하게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정작 이나리우스가 마침내 릴리스의 복부를 꿰뚫어 ‘예언’을 달성했음에도 끝내 천상은 응답하지 않고, 이나리우스의 날개는 릴리트에 의해 꺾이고 만다.
이나리우스의 대척점에 있는 릴리트는 표면적으로는 성역을 오롯이 사랑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릴리트는 상처입어 약해진 아버지 ‘메피스토’의 정수를 흡수해 지옥을 장악함으로써 성역을 ‘해방’하고자 한다.
릴리트가 말하는 ‘해방’이란 천상과 지옥의 분쟁, 즉 선악 사이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세계를 말한다. 하지만 그 '자유'가 과연 인류에 긍정적일지 주인공 일행은 쉽게 확신하지 못하고, 결국 릴리트의 계획을 가로막기 위해 노력한다.
릴리트가 꿈꾸는 해방된 성역의 모습은, 그가 지상에 야기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얼마간 유추된다. 릴리트에 현혹된 인간들은 모두 도덕적, 인륜적 제약을 넘어 욕망에 자신을 내어놓는다. 네이렐의 어머니는 지식 탐구를 위해, 도난의 옛 동료 아이리다는 민족의 중흥을 위해, 또 다른 동료 나파인은 적수를 없애기 위해 모두 릴리트에게 부복하며, 그 과정에서 다른 인간들을 희생시킨다.
릴리트가 인간들에게 부여하는 것은 주저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다. “나 자신이 원한 일이고, 릴리트는 그렇게 할 힘을 줬을 뿐”이라 말하는 아이리다의 이야기에서, 릴리트가 인간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성역에 대한 부부의 태도는 일견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다. 이나리우스는 세계를 버리고자 하고, 릴리트는 바꿔놓으려는 차이가 있을 뿐 둘은 모두 성역의 불완전함을 품지 못한다.
이나리우스가 종교적 이상으로 인간적 가치를 억압하던 고전적 도덕률을 닮아 있다면, 릴리트의 접근은 선악 개념에 대한 해체적 담론을 닮았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죄는 타고난 권리”라는 릴리트의 말은 “삶은 무죄”라는 주장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싸움이 없는 상태를 꿈꾸는 점에서 니체, 카뮈 등과는 외려 상반된다)
주인공 일행은 그러나 성역을 영원한 분쟁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릴리트의 제안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지막 전투에서 네이렐은 원래 계획이었던 릴리트 대신 메피스토를 영혼석에 봉인하기로 선택, 딸이 아버지를 흡수하지 못하도록 막고 주인공은 릴리트를 직접 쓰러뜨린다.
결전 이후 네이렐은 봉인된 메피스토를 품에 지닌 채 다른 대악마들에 맞서기 위해 홀로 머나먼 여정에 떠난다. 호라드림의 지식에 따르면 ‘영혼석’의 소유자는 그 안의 존재를 평생 감시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네이렐은 앞으로 영혼석 안의 메피스토가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
기나긴 싸움에서 승리한 네이렐이 끝내 쟁취한 것이 영광도, 평화도 아닌 ‘거대한 악에 계속 맞서는 삶’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삶의 불완전함을 끌어안는 것, 그래서 선악의 틈바구니에서 계속 투쟁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인간다움의 요건일지 모른다.
“당신과 도난의 모습을 떠올려요. 분명 ‘전지자 호라드림’이 아니었죠. 성격도 사납고, 확신도 없었고요. (중략) 그 불완전함이 제게 희망을 줬어요. 앞으로의 일을 마주하려면 그게 필요하고요. 악마와… 그 형제들을 상대하려면요.” - 네이렐이 로라스에게 전하는 마지막 편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