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칭 직후엔 호평이었지만 연이은 ‘너프 행진’으로 논란을 빚은 <디아블로 4>. 얼마 전 시작한 시즌1부터는 비로소 기대했던 게임플레이가 가능해졌다는 평가지만, 여전히 프리시즌에 형성된 부정 여론은 잦아들지 않고 있습니다. ‘진작에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 이라는 평가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디아블로 4>가 이렇게 주춤하자, 반사이익으로 다양한 경쟁작이 조명받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디아블로 4>보다 약 1개월 먼저 출시한 <홀스 오브 토먼트> 역시 그러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스팀 플랫폼의 유저 후기를 보면 ‘<디아블로 5> 벌써 나왔다’는 식의 풍자적인 평가를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홀스 오브 토먼트>가 <패스 오브 엑자일> 같은 본격적 ARPG가 아닌, 이른바 ‘뱀서류’(‘뱀파이어 서바이버’ 라이크) 게임이란 점입니다. 파워풀한 빌드를 만들어 수많은 적을 쓸어버린다는 큰 틀에서 공통점은 있지만, 두 장르는 그래도 구분이 꽤 뚜렷한 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게임의 평가에 <디아블로>가 소환되고 있는 걸까요?
처음 플레이해 보면 <홀스 오브 토먼트>는 여타 뱀서류와 크게 다른 점이 없어 보입니다. 준비된 캐릭터 중 하나를 골라,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사냥하면서 일정 시간 살아남는 게임입니다.
경험치 보석을 모아 레벨을 올릴 때마다 ‘업그레이드’ 선택지가 랜덤하게 주어지는 시스템, ‘런’에서 획득한 재화를 통해 영구적인 파워업을 하는 시스템도 동일합니다. 다양한 도전과제를 깰 때마다(여기서는 ‘퀘스트’로 부릅니다) 여러 맵, 캐릭터, 능력 등이 새롭게 해금되는 시스템도 그대로입니다.
한편 <뱀파이어 서바이버>의 ‘후배 게임’들이 새롭게 도입한 여러 요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수동 공격 시스템입니다. 캐릭터 이동이 조작의 전부였던 <뱀파이어 서바이버>와 달리 상당수의 ‘뱀서류’ 게임들이 조금 더 나은 액션성을 위해 트윈슈터 스타일의 조작을 지원하고 있으며 <홀스 오브 토먼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게임플레이 도중에 이를 자유롭게 토글할 수 있어서 취향과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쯤되면 <홀스 오브 토먼트>가 <디아블로>와 닮은 점이라고는 겉모습과 설정뿐인 것처럼도 보입니다. 전사·궁수·성직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중세 판타지 세계관, 석재로 된 어두운 건물 내부, 다양한 악마와 언데드, 결정적으로 픽셀이 두드러지는 레트로 그래픽까지 모두 분명하게 초기 <디아블로>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홀스 오브 토먼트>에서 <디아블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진짜 이유는 바로 아이템 시스템에 있습니다. <홀스 오브 토먼트>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는 일반적 RPG처럼 머리·가슴·다리·팔·손가락·목 등에 아이템을 총 7점 착용할 수 있습니다.
아이템에는 일반적인 희귀도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크게 기본 스탯을 올려주는 유형과 특수한 효과를 가지는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먼저 기본 스탯형 아이템을 통해 향상할 수 있는 캐릭터 능력들을 살펴보면 체력·공격력·방어·막기·이동 속도·공격 속도·치명타 확률·공격 범위·공격 거리 등이 있습니다. (이들 기본 스탯은 필드에서 레벨업을 할 때마다 랜덤하게 하나씩 올릴 수도 있습니다)
캐릭터마다 기본 스탯의 분포, 그리고 공격 방식이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사는 다른 능력치보다 체력과 방어력이 높은 편이고, 폭이 좁은 부채꼴 형태로 근거리 공격을 가합니다. 궁수는 이동속도가 빠른 편이며 전방으로 두 발의 화살을 발사합니다.
스탯 업그레이드 아이템들을 통해 이런 고정적 특성들을 적절히 강화/보완해주면 캐릭터 특성을 살린 빌드가 완성됩니다. 예를 들어 ‘막기’ 기본 수치가 높은 전사는 여기에 보너스 수치를 더해서 웬만한 피해에는 끄떡없는 단단한 캐릭터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홀스 오브 토먼트>에 이런 스펙 업그레이드형 아이템만 있었다면 지금처럼 유저들로부터 <디아블로>와 나란히 평가받기란 아마 어려웠을 것입니다. <디아블로> 시리즈의 전통적 재미는 흥미로운 능력의 아이템을 모아 나만의 빌드를 짜는 데 있으니까요. <디아블로 4>를 향한 불만 또한 빌드 구축의 자유도와 재미가 떨어진다는 비판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홀스 오브 토먼트>에도 전술했듯 흥미로운 기능을 가진 특수 효과형 아이템이 다수 존재하며, 이를 통해 특이하고 독창적인 빌드를 꾸며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줄어든 체력 1포인트마다 공격력이 0.07% 상승’ 효과를 가진 목걸이가 있습니다. 기본 체력이 높은 ‘전사’가 이 목걸이를 착용한 뒤, 체력 상승 업그레이드에 집중한다면, 넉넉한 체력을 일부러 깎아 공격력을 추가로 끌어올리는 식의 플레이가 가능해집니다.
그저 자체적인 강력함만으로 즐거움을 주는 아이템들도 있습니다. ‘적을 해치울 때마다 5초간 공력 속도 1% 상승’의 능력을 지닌 왕관은 다수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게임 특성상 대단한 도움이 됩니다.
줄어든 HP만큼 더 아프게 때릴 수 있게 해주는 목걸이.
이런 장비 아이템들은 특정 보스 몹을 잡으면 나오는 상자에서 랜덤하게 3가지 드롭되며, 그중 하나를 골라 수중에 넣을 수 있습니다. 획득 아이템을 즉시 사용하는 데는 제한이 없지만, 이를 본부 역할을 하는 ‘캠프’로 회수해 영구히 보관하려면, ‘우물’ 시스템을 이용해야 합니다.
<홀스 오브 토먼트>의 던전에는 마른 우물이 하나씩 존재하는데, 이것은 지상의 캠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물에 다가가서 상호작용하면, 이번 ‘런’에서 얻은 아이템을 캠프로 올려보낼 수 있습니다. 올려보낸 아이템은 나중에 캠프로 복귀해 우물지기 NPC로부터 구매하면 됩니다.
우물 이 시스템은 각 ‘런’에서 단 한 번으로 이용이 제한되기 때문에 이용에 신중해야 합니다. 첫 상자에서 나온 아이템을 덜컥 올려보냈는데, 두 번째 상자에서 훨씬 좋은 아이템이 나오면 후회가 막심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상자까지 기다리다가는, 두 아이템 모두 회수 못 한 채 사망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홀스 오브 토먼트>는 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장비 시스템을 익숙한 뱀서류 문법에 접목함으로써 장르 내에서 새로운 게임플레이를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개별 아이템의 효용과 플레이어 각자의 빌드 설계가 게임플레이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는 게임 디자인은 전통적인 ARPG 유저들도 포섭할 만한 매력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디아블로>를 포함한 ARPG 들의 고질 중 하나인 ‘반복 파밍으로 인한 지루함’을 <홀스 오브 토먼트> 역시 상당 부분 재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뱀파이어 서바이버>를 위시한 대부분의 뱀서류 게임들은 같은 런을 반복하더라도 플레이 양상은 서로 상당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레벨업 때마다 많은 ‘공격 스킬’과 ‘버프’ 중 일부가 랜덤하게 주어지는 장식이기에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전과는 사뭇 다른 전략을 펴게 될 때가 많습니다.
반면 <홀스 오브 토먼트>의 핵심 공격 수단은 캐릭터마다 고정되어 있는 ‘주 무기’입니다. 레벨업 때마다 주 무기와 캐릭터 기본 능력을 업그레이드하는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모두 수치적 강화일 뿐 그 작동 방식을 바꾸는 것은 아니어서 다른 뱀서류의 전투처럼 다이나믹한 변화를 체감하긴 힘듭니다.
일부 보스를 쓰러뜨렸을 때 드롭되는 부적 형태 아이템을 습득하면 <뱀파이어 서바이버>에서와 비슷한, 주 무기 이외의 공격 스킬(어빌리티 라고 부릅니다)을 얻을 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종류가 다소 한정적인 데다가, 몇 단계 업그레이드를 거치더라도 다른 <뱀서류>에서만큼 극적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기에, 게임플레이 반복성을 줄여주기에는 충분치 않은 느낌입니다.
이 때문에 만일 새 아이템, 혹은 새로운 파워업을 구매하지 못한 상태에서 연이어 ‘런’에 진입하려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치는 기분이 듭니다. 맵 구조와 몬스터, 보스의 구성 및 패턴이 완전히 동일한 ‘뱀서류’ 특유의 레벨디자인 때문에 이전과 대동소이한 게임플레이가 펼쳐지리란 것을 확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만을 이유로 그저 지루한 게임이라 평하기는 어렵습니다. 얼리억세스 단계임에도 이미 다양한 캐릭터, 신기한 성능의 아이템들, 유의미한 보상의 여러 퀘스트 등, 지속적인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계속 플레이하고 싶은 마음을 자극해 주기 때문입니다.
ARPG의 특유의 육성 쾌감, 그리고 뱀서류의 캐주얼함을 동시에 즐기고픈 유저라면 구매를 고려할 만합니다. 하지만 ‘<디아블로 4>보다는 빠르고 <뱀파이어 서바이버>보다는 느린’ 애매한 속도 감각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 그리고 두 게임의 비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 하나를 빼놓을 뻔했습니다. <홀스 오브 토먼트>의 판매가는 6,000원 입니다. <디아블로 4> 디럭스 에디션보다 22배, 일반판보다 14배 저렴한 가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