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입니다.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는 문장이지만, ‘계속 변화하는 대상의 현재를 포착하기란 어렵다’는 의미로도 풀이될 수 있습니다.
국산 오픈월드 생존 게임 <조선메타실록>의 ‘현재’를 리뷰하는 것은 비슷한 맥락에서 다소 무의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이 타이틀은 ‘유저와 함께 성장하는 게임’, ‘매일 달라지는 게임’ 등으로 불립니다. 그 정도로 업데이트가 빈번하기 때문에, 오늘 쓴 리뷰가 당장 며칠 뒤엔 틀린 글이 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개발사 ‘행복한다람쥐단’이 이토록 빠른 업데이트에 열중하고 있는 데에는 잘 알려진 사정이 있습니다. 사실 <조선메타실록>은 홍보 내용에 '많이' 못 미치는 상태로 출시해 빠른 업데이트로 부족함을 채워나가고 있는 얼리억세스 게임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완성도 때문에 인터넷 방송계에서도 화제를 모으면서, 유명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제작진에 따르면 <조선메타실록>은 조선시대 배경의 3D 오픈월드 생존 탐험 게임으로, 도망친 노비가 되어 신분을 바꿔 살아남는 내용의 타이틀입니다. 시대상에 맞는 400여 개 아이템, 다양한 NPC 및 퀘스트 등이 존재하며, 그 안에서 의적이 되거나 양반이 되는 등 자신만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주요 특징은 실제 한반도 지형에 기반한 전국 지도를 게임에 구현했다는 점입니다. 총면적은 3,000㎢로, GTA 5에 구현된 육지 면적의 약 60배가 넘습니다. 그 안에는 수백 개의 유적, 다양한 도시 및 성들이 배치되고, 무역과 경제 시스템까지 구현될 ‘예정’입니다.
만약 이중 절반 정도만 완성된 채로 얼리억세스에 돌입했어도 게임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유명해졌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선메타실록>의 이상과 현실은 괴리가 큽니다.
설명된 콘텐츠 상당수는 현재 완전히 미구현 상태입니다. 오늘(2월 14일)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도시에는 성벽만 둘리어 있을 뿐 내부가 전혀 구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NPC는 적 캐릭터 2종과 몇몇 중립 캐릭터 외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역사 유적지, 탈것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토리, 퀘스트 콘텐츠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게임이 완전한 백지상태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 인터넷 방송에서 콘텐츠로 다뤄졌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게임은 나름의 충실한 볼륨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구체적인 모양새가 제작진의 웅대한 기획과는 아직 많은 부분에서 불일치할 뿐입니다.
전체 기획으로 보면 <조선메타실록>의 궁극적 지향점은 생존 콘텐츠를 지닌 오픈월드 ARPG인 듯합니다. 또한 시대극이라는 점, 개인의 생존 및 출세를 다뤘다는 점, 자유도가 높다는 점 등에서 <킹덤 컴 딜리버런스>, <마운트 & 블레이드> 등 타이틀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시점 실제로 구현된 콘텐츠는 제작·생존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유저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적대 세력(추노꾼과 도적), 그리고 위험한 야생동물(곰, 호랑이)로부터 살아남아 자원을 모으고, 집과 음식을 만들면서 생존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킹덤 컴 딜리버런스> 보다는 <발헤임>, <그라운디드>에 더 유사한 느낌으로 플레이됩니다.
게임의 초석이 되는 기본 시스템부터 다져나가는 단계라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납득할 순 있습니다. 제작진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볼륨 대비 콘텐츠가 많이 부족하다”고 시인하고, 더 나아가 얼리억세스 유저들에게 ‘저희 게임의 개척자가 되어달라’며 동반성장(?)을 제안하는 상황입니다.
더 나아가 게임은 제작진의 강력한 추진력으로도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출시일인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6일간 문자 그대로 매일 콘텐츠 업데이트와 버그 픽스를 단행했고, 이후로도 평균 이틀 단위로 업데이트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게임’이라는 세간의 평가는 사실에 근접한 셈입니다.
이렇듯 전례 없는 수준의 업데이트 속도에도 불구하고, <조선메타실록>이 과연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지, 불안을 느끼게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게임의 ‘갈 길’이 지나치게 멀다는 사실에만 기인하지는 않습니다.
<조선메타실록>을 다룬 방송들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게임에는 초보적 수준의 허점이 지나치게 많이 눈에 들어옵니다. 총체적 유저 경험에 대한 제작진의 접근 방식과 분석 역량에 다소 의구심을 품게 될 만큼입니다. 적으로부터 생존해 생활 터전을 잡는 극초반의 기본 게임플레이 과정을 예시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모두 2월 13일 체험한 내용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혹독한 환경 및 적으로부터 살아남는 것은 생존 게임의 기본 문법입니다. <조선메타실록>의 경우 곰, 호랑이 등 야생동물에 더불어 추노꾼과 도적 두 개의 세력이 적으로 등장합니다.
‘세력’이라고 표현했지만, 세력별로 캐릭터 모델은 하나씩만 존재해서 수십 쌍둥이를 상대하는 기분을 선사합니다. 이들의 더 큰 문제는 발소리를 전혀 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굽이굽이 복잡한 지형상 시야마저 제한되는 탓에, 느닷없는 급습에 한 대 맞고 나서야 적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억울한 경우가 잦습니다.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끊임없는 사주경계로 적을 먼저 발견해야만 하고, 이건 생존게임인 만큼 납득할 만합니다. 하지만 인게임에서 가장 많이 하게 되는 활동인 벌목이 문제입니다. 벌목을 하려면 도끼를 든 채 나무를 바라봐야만 하고, 따라서 주변 관찰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벌목 중에 벌어지는 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가 많습니다.
피격 한 번은 체력의 약 5분의 1을 깎을 정도로 치명적인데, 초반에 주어지는 체력 회복 수단은 익힌 고기뿐입니다. 하지만 익힌 고기에 체력 회복 기능이 존재한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제시되어 있지 않아, 유저는 이를 스스로 터득하기 전까지 여러 번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급습을 피한다고 해서 전투가 쉽게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난이도보다는 조작감의 문제입니다. <조선메타실록>의 모든 근접 공격은 앞으로 크게 내딛는 동작과 함께 이뤄지는 한편, 무기 판정이 엄격한 데다 후속 동작이 지나치게 느리고 길어 못 맞추고 역공당하기가 쉽습니다.
불행 중 다행은 적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적의 길고 느린 공격 동작을 피하거나 막은 뒤 반격하는 과정을 3~4번 반복하면 간단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피아 공통으로 무기별 공격 동작이 오직 하나밖에 없고 그 호흡 또한 동일하기 때문에 적응도 쉽습니다. 반복되는 전투 패턴이 삽시간에 지루해진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요.
다만 주의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게임의 근접 전투에서는 적의 공격 애니메이션만 주의하여 피하면 되지만, <조선메타실록>에서는 자세를 바로잡는 시점까지도 무기에 ‘공격 판정’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마무리 동작이 긴 ‘나무창’을 사용하는 도적과 싸울 때 두드러지는데, 90도 측면으로 완전히 피해 몸통을 가격해도 피해가 들어오니 조심합시다.
혹시라도 패배해 사망했다면 행운을 빌겠습니다. <조선메타실록>은 근래 출시한 대부분의 생존 제작 게임과는 달리 사망 위치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랜드마크가 전혀 없는 산속에서 랜덤하게 분실 아이템을 되찾기란 상당한 고역입니다. 잔디 어셋을 거대하게 키워 구현한 수풀이 사방에 우거져있는 탓에, 아이템을 보기 힘들다는 점도 어려움을 더합니다.
이 또한 의도적 기획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템이 분수처럼 튀어 올라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심지어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현상에는 어떤 의도가 있는 걸까요? 게다가 일부 아이템은 침낭(부활 지점) 근처에서 발견되는 현상이 벌어져서 분실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키웁니다.
완성도 부족을 느끼게 하는 게임 디자인이나 시스템적 불편은 더 많이 나열될 수 있습니다.
▲게임의 감도 설정이나 단축키 변경은 불가능합니다 ▲추노꾼 캐릭터는 두 개의 대사 중 하나를 간격 없이 무한 반복합니다 ▲보관함 시스템이 없어 물건은 바닥에 흩뿌려 놓거나 소지하고 다녀야만 합니다 ▲침낭 아이템은 설치해둔 상태로 사용할 수 없으며 수중에 넣은 뒤 다시 설치하는 방식으로만 잠을 잘 수 있습니다 ▲건축 시 설계 도면을 회전시킬 수 없어 건물을 정해진 각도로만 지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구조물과의 충돌을 무시하고 관통시켜 짓는 것은 허락됩니다 ▲만약 구조물을 잘못 지으면 직접 무기로 타격해 부숴야만 철거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때 자원은 회수되지 않습니다.
이렇듯 산적한 문제들을 봤을 때, <조선메타실록>이 적잖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대부분 제작진의 적극적 소통과 피드백 반영, 그리고 분주한 업데이트 덕분인 듯합니다.
행복한다람쥐단은 디스코드 채널을 통해 실시간으로 유저와 대화하는 한편 상세한 패치노트를 통해 끊임없이 개발 현황을 공지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말뿐’이라면 역효과를 내겠지만, 게임은 실제로 하루가 멀다고 변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유저들 또한 ‘유저와 함께 성장하는 게임’이라는 제작진의 모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건설적인 피드백을 전달하는 중입니다.
그 결과 2월 14일 기준 게임 안에는 적지 않은 콘텐츠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아이템 레시피, 구조물, 의상 등이 존재하며, 집안을 꾸밀 수 있는 가구 콘텐츠도 추가되었습니다. 가옥 양식이나 아이템 등의 고증에 신경 쓴 부분이 있고, 보기에 아름답다는 사실도 호평입니다.
제작대와 제작법 연구, 제작물의 종류가 다양하며 새로 얻는 제작 아이템들은 생존과 편의에 상당한 발전을 가져다 줘 그 체감 효과가 큰 편입니다. 발전과 성취감에 집중하는 유저라면 콘텐츠 전반의 진척도를 따라가는 동안 얼마간 몰입적이고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예정된 6개월의 얼리억세스 기간 내내 현재의 추세를 유지한다면 <조선메타실록>이 ‘할 만한 게임’에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니 한국판 <노 맨즈 스카이>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말과 함께, 일단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다만, 그렇게 묻어 두기엔 찝찝한 구석이 있습니다. 한 가지 근본적 의문이 도무지 해결되지 않습니다. 대체 <조선메타실록>은 왜 이런 상태로 출시되었을까요?
게임의 업데이트 로그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연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완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약 4주 전 출시 직후의 <조선메타실록>은 콘텐츠가 더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정상적인 게임 경험을 선사할 수 없는 상태의 소프트웨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일각에서는 행복한다람쥐단이 정부 창업지원사업 대상기업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촉박한 기간 내에 결과물을 내야 하는 경우가 많은 정부 지원사업 특성상 출시를 서두를 사정이 있었으리란 겁니다. 다만 지원사업의 구체적 계약 내용은 알 수 없고, 지원금은 다른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해 주어졌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행복한다람쥐단은 <조선메타실록>을 관공서 및 기업 대상의 교육용 VR 버전으로 먼저 개발한 바 있습니다.
얼리억세스의 일반적 취지대로, 실이용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게임을 완성해 나가려는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스트리머나 이용자들이 제안한 내용들이 게임이 빠르게 반영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다만 게임이 기초만 갖춘 상태에서 출시했다는 점에서 볼 때, '유저 의존도'가 다른 게임들에 비해 다소 높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이런 경우 게임을 무료 제공하거나, 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전략도 선택했을 만하지만, 게임은 현재 1만 8,000원 가격에 판매 중입니다. 유저 상당수는 해당 가격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