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오브 워쉽>은 20세기 초 가장 치열했던 해상 전투 세계를 구현한 해상 액션 MMO 장르로, 육중한 해군 함대를 지휘하며 전투를 치르는 액션의 재미와 군함의 단계를 올리고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는 육성의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게임입니다.
<월드 오브 워쉽>은 전략적이면서 다양한 군함을 통해 벌이는 화력전 등 <월드 오브 탱크>에서 구현됐던 탱크로 벌이는 지상전과는 또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디스이즈게임은 연재를 통해 <월드 오브 워쉽>의 모든 것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 디스이즈게임 편집자주
USS Iowa는 미국의 29번째 주인 '아이오와'의 이름을 붙인 동급 전함의 1번함이자 미 해군의 4번째 전함입니다. 해당 등급 전함 중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서양에서 활약한 유일한 군함이면서 모든 등급의 미국 전함을 통틀어 최후의 1번함이기도 합니다.
아이오와(Iowa)의 건조는 1938년 ‘고속 전함(fast battleship)’ 계획의 일부로 진행되었습니다. 1942년 8월 27일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영부인이 참석하고 헨리 월리스(Henry Wallace) 부통령의 부인인 일로 월리스(Ilo Wallace)가 주관한 가운데 진수식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1943년 2월 22일 존 맥크리(John L. McCrea) 함장이 지휘를 맡아 동급 전함 중에서 최초로 취역하게 됩니다.
아이오와는 항공모함, 순양함과 기동작전을 펼칠 수 있는 강력하고 빠른 전함이었습니다.
의 주포는 Mark 7 16인치(406.4mm) 50 구경장 함포가 장착되어 2,700파운드(1,200kg) 철갑탄을 20해리(23마일, 37km)까지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부포의 경우에는 20.5인치(130mm) 38 구경장 함포가 장착되어 최대 12해리(14마일, 22km)까지 사거리가 닿았죠. 미 해군을 중심으로 항공모함의 활용이 빈번해지면서 아이오와에는 적 함재기로부터 항공모함을 지켜야 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엘리콘(Oerlikon) 20mm와 보포르(Bofors) 40mm 대공포도 장착됩니다.
아이오와는 1943년 2월 24일 체서피크 만(Chesapeake Bay)에서 시험 운항에 나서게 되고, 대서양에서 활동합니다. 이후 독일 전함 티르피츠(Tirpitz)가 노르웨이 해에서 작전 중일 것이라는 판단하에 그에 맞서기 위해 같은 해 8월 27일에 캐나다 뉴펀들랜드(Newfoundland)의 아젠티아(Argentia)로 이동합니다.
4개의 스크류로 33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습니다.
아이오와는 테헤란 회담(Tehran Conference)에 참가하는 루스벨트 대통령, 코델 헐(Cordell Hull) 국무장관, 윌리엄 레이(William D. Leahy) 해군참모총장,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제2차 세계대전 군 장교들을 알제리의 메르스엘케비르(Mers El Kébir)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합니다.
1943년 열린 테헤란 회담은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Josef Stalin) 등이 참석한 3국 수뇌회담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이오와에는 자매함들과 다른 특이사항이 있습니다. 소아마비로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위해 욕조와 상하 갑판을 오가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것이죠.
1944년 1월 2일, 아이오와는 제7전함부대(Battleship Division 7)의 기함으로 미국에서 태평양으로 출항합니다. 1월 7일에 파나마 운하를 지나 마셜 제도(Marshall Islands) 공략전에서 첫 전투를 치릅니다. 1월 29일부터 2월 3일까지는 콰잘렌(Kwajalein) 환초와 에니웨톡(Eniwetok) 환초를 공격하는 항공모함을 지원합니다.
이후에는 캐롤라인 제도(Caroline Islands)의 트럭(Truk) 섬에 주둔한 일본 해군과 수송선에 대한 공습도 지원했습니다.
주함포로는 사거리 37km의 16인치(406 mm) 함포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아이오와는 이후에도 계속 다른 군함이나 작전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습니다. 1944년 6월에는 마리아나(Mariana) 제도와 팔라우 제도(Palau Islands) 공격에 참가하게 됩니다. 6월 12일 사이판, 티니안, 괌, 로타, 파간 등 태평양에 있는 섬들을 공격하는 항공모함의 호위를 맡았고, 13, 14일에는 사이판과 괌에 포격을 가해 일본군 탄약 집적소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19일에는 필리핀 해전에 참가해 일본 중앙 함대(Japanese Middle Fleet)의 4차례 대규모 공습을 저지합니다. 이때 단독으로 적 함재기 3대와 뇌격기 1대를 파괴하고 적 군함을 몰아내는 등의 전공을 세웠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기간 탑승한 적이 있었기에 욕조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아이오와는 쇼고 작전(Shō-Gō 1)을 펼친 일본을 상대로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쇼고 작전은 레이테 만(Leyte Gulf)에 위치한 미군의 육해공 합동 전력을 파괴하기 위해 계획된 3차례의 동시다발적인 공격이었습니다.
지사부로 오자와(Jisaburō Ozawa) 중장은 남아 있는 항공모함을 이용해 미군 항공모함을 필리핀의 상륙지점으로부터 유인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주력 수상 전력이 샌 버너디노 해협(San Bernardino Strait)과 수리가오 해협(Surigao Strait)을 통과해 미국 상륙군을 공격할 계획이었죠.
아이오와는 퇴각하는 항공모함을 추격하는 임무를 맡았고 적들을 주포 사정거리 안에 두게 됩니다. 미군은 일본 중앙 부대가 사마르(Samar) 해협에서 호위 항공모함들을 공격할 것임을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부대의 항로를 변경해 호위 항공모함을 지원하게 합니다. 하지만 사마르 해전(Battle Off Samar)에서 제7함대가 선전을 펼친 덕에 아이오와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아이오와는 제2차 세계대전뿐 아니라 6.25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아이오와는 이후 일어난 일본 공격을 저지할 때 큰 역할을 합니다. 1945년 3월 19일, 오키나와로 출항해 4월 15일 도착한 아이오와는 자매함인 뉴저지(New Jersey)와 임무를 교대합니다. 그리고 항공모함을 호위해 상륙부대를 지원합니다. 규슈 남부, 혼슈 북부와 홋카이도 등에 대한 공중 공습을 지원하기도 했죠. 이후에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전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이후에는 자매함인 Missouri와 함께 사가미 만(Sagami Bay)에 입성해 요코스카(Yokosuka) 해군 조병창의 인수를 감독했고, 9월 20일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점령군과 함께 도쿄 만에 머물며 귀향 군인을 모으고 미군 포로를 석방하는 작업에 쓰입니다.
아이오와는 많은 전쟁을 거치며 “The Big Stick”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최초의 계획은 아이오와에서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결국 자매함인 미주리(Missouri)에서 치러집니다.
아이오와는 전쟁이 끝난 뒤 몇 년간 훈련에 종사하며 장비 현대화를 거치게 됩니다. 이때 SK-2 레이더가 장착되고 20mm, 40mm 대공 포대를 해체하게 됩니다.
1989년에는 포격 훈련 중 폭발로 47명의 승조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1950년 북한이 남한을 침공해 NATO 회원국이 개입하게 되면서 미국도 일본에 있던 전력을 남한에 배치하게 됩니다. 정식 명령은 1951년 8월 25일에 내려지지만, 아이오와는 1951년 7월 14일부터 활동을 재개합니다.
첫 임무는 1952년 4월 8일 원산과 성진 부근에 포격을 가해 북한군 보급선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수원단과 고조 주변의 북한군에게 집중 포격을 가해 보급 지역과 포대를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후에도 국군 1군단에 대한 지원 활동을 펼쳤죠. 4월 13일에는 북한군 진지를 포격해 100명 이상을 사살하고 6개의 포대와 사단 본부를 파괴하는 공을 세웁니다.
이후에도 6.25 전쟁 동안 아이오와는 마양도, 단천, 천진, 초도, 속초, 흥남 부두, 원산 등지에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뒤에도 아이오와는 활동을 계속하지만 주로 훈련 임무를 맡다가 1958년 2월 24일 퇴역하여 필라델피아의 대서양 예비 함대(Atlantic Reserve Fleet)에 편입됩니다. 그러나 1984년 성능시험과 NATO 훈련 등을 위해 재취역하게 됩니다.
아이오와는 1989년 포격 훈련 도중 16인치(410mm) 2번 주포탑에서 폭발이 일어나 47명의 승조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기 전까지 활동을 계속합니다. 이 사고는 평시에 발생한 미 해군 사고 중 최악의 하나로 기록됩니다.
아이오와는 종군 기념 청동 성장이 11개에 달할 정도로 많은 공을 세운 전함입니다.
1990년 소련이 붕괴하고 미국에 대한 잠재 위협이 줄어들면서 방위 예산이 삭감되고 전함 자체가 비경제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오와는 1990년 10월 26일 다시 퇴역합니다. 이후에는 뉴포트 해군 훈련센터(Naval Education and Training Center)에 머물다가 샌프란시스코 부근 수이순(Suisun) 만으로 보내져 예비함대에 편입됩니다. 2001년부터 그곳에 보관되었다가 2006년에 이르자 1995년에 이어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제적됩니다.
아이오와는 그 뒤 2011년까지 수이순 만에 정박해 있다가 로스엔젤레스항(Port of Los Angeles)에 위치한 태평양 전함 센터(Pacific Battleship Center)로 인계되었고 2011년 말에는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었습니다. 아이오와가 받은 종군 기념 청동 성장(battle star) 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공훈으로 9개, 6.25 전쟁의 공훈으로 2개입니다.
아이오와는 항공모함, 순양함과 함께 기동작전을 펼칠 수 있는 강력하고 빠른 전함이었습니다. 아울러 민첩하고 빠른 속력으로 순양함, 항공모함에 뒤지지 않는 우수한 성능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죠. 이 같은 기동성으로 인해 다른 군함들은 아이오와를 공격하기 쉽지 않았고, 아이오와는 더욱 수월하게 적 군함들을 격추할 수 있었습니다. <월드 오브 워쉽>에서 '미국 9단계 전함 아이오와'로 등장하는 아이오와는 거대하고, 위협적입니다. 획득하기까지 몇 달이 걸릴 수는 있지만, 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아이오와는 방어력을 높이고 장갑을 증강하면서도 뛰어난 속도는 유지해서 어뢰 공격에도 대응할 수 있습니다. <월드 오브 워쉽>에서는 이 전설적인 전함을 조종하면서 다른 군함과 겨뤄볼 수 있습니다. 아이오와가 얼마나 뛰어난 활약을 펼쳤는가를 가상으로 체험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