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속도의 게임플레이로 유명한 EA 산하 리스폰 엔터테인먼트(이하 리스폰)의 배틀로얄 <에이펙스 레전드>가 이른바 ‘탭 스트레이핑’으로 알려진 변칙성 기술을 제한하기로 하면서 유저 사이에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게임플레이에 영향을 주는 버그에 가까운 기술이라면 막는 것이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PVP 게이밍 씬에서 유저들에 의해 고안된 변칙성 플레이가 제작진으로부터 ‘기술’로 인정받아 유지된 사례는 많다. 게임의 밸런스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깊이를 더해준다는 이유로 살아남은 경우다.
탭 스트레이핑도 상당 기간 ‘기술’로 인정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특별한 계기 없이 삭제가 결정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그간 운영진은 다른 여러 ‘기술’들을 빠르게 제거하면서도 탭 스트레이핑에는 특별한 제약을 걸지 않아 왔다. 리스폰의 결정 근거와 이에 반대하는 유저들의 입장을 살펴봤다.
탭 스트레이핑은 간단히 말해 캐릭터가 진행 속도를 유지한 채 공중에서 방향을 급격하게 틀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술이다.
점프 기능이 있는 액션 게임은 컨트롤 메카닉 측면에서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공중에서 방향키를 입력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게임이 있고, 방향이 공중에서 조금씩(혹은 많이) 변하는 게임이 있다. 이런 조작을 이른바 ‘공중 컨트롤’이라고 부른다.
<에이펙스 레전드>의 경우 공중 컨트롤이 존재하지만, 갑작스러운 운동방향 전환이 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반면 탭 스트레이핑을 사용하면 90도 이상의 급선회가 가능하다. 이는 <에이펙스 레전드>의 전신인 <타이탄폴> 시리즈에서 먼저 유저들에 의해 고안된 ‘기술’로, <에이펙스 레전드>에서는 2019년경 처음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탭 스트레이핑을 구사하려면 전진하다가 점프하는 상태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전진 버튼(w)을 빠르게 연타하면 된다. 그러나 버튼 연타보다는 마우스 휠을 활용하는 유저가 더 많다. 휠을 위로 올리는 ‘휠 업’ 조작키에 전진 커맨드를 설정한 뒤, W를 연타하는 대신 휠을 위로 굴리는 식이다. 이 경우 90도를 넘는 극단적 방향전환이 가능해진다.
<에이펙스 레전드>는 캐릭터들의 기동성이 높고, 플레이 템포가 빠른 게임이다. 그 때문에 적을 정확히 맞추는 '에임' 실력만큼이나 자기 캐릭터의 움직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무빙’ 기술이 중시되고 있다. <타이탄폴> 시리즈를 비롯해 <퀘이크> 등 과거 서양권의 여러 FPS가 이런 플레이스타일을 보여왔다.
그간 많은 <에이펙스 레전드> 유저가 이런 게임 스타일에 맞춰 ‘탭 스트레이핑’ 이외에도 여러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해왔다. 점프해서 벽을 짚은 뒤 다른 방향으로 점프하는 ‘월 바운스’(벽 점프), ‘짚라인’과의 상호작용을 이용해 높이 점프하는 ‘슈퍼 점프’ 등, <에이펙스 레전드>에 관심이 많은 유저라면 한 번쯤 들어봤거나, 목격했거나, 사용해본 적 있는 기술이 많다.
그중에서도 ‘탭 스트레이핑’은 특별한 지형지물이나 기타 환경이 구비될 필요 없이 어느 곳에서나 사용 가능하며, 적 공격을 회피할 때 크게 유용하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다른 무빙이 많은 등 여러 이유로 특히 유명해진 기술이다.
* 편의상 컨트롤러로 플레이하는 유저를 ‘콘솔 유저’, 키보드/마우스로 플레이하는 유저를 ‘PC 유저’로 지칭
그러나 탭 스트레이핑은 상위권 플레이어와 일반 플레이어의 격차를 넓힐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콘솔 유저들의 경우 원천적으로 탭 스트레이핑 기술을 동일하게 구사할 수 없다는 점 등으로 인해 삭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에 맞춰 리스폰은 최근 소셜 미디어를 통해 탭 스트레이핑을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많은 숙고와 논의 끝에, 10.1 패치에서 탭 스트레이핑을 제거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 이유로는 ▲접근성이 낮고(inaccessible) ▲상대방이 이를 예측하거나 맞설 수 없으며(lacks readability/counterplay) ▲캐릭터의 이동 스킬에 의해 그 효과가 증폭될 수 있다는 점(exacerbated by movement abilities) 등을 지적했다.
<에이펙스 레전드> 보조 라이브 밸런스 디자이너 존 라슨은 자기 트위터에서 위에 언급된 근거들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일단 리스폰의 목표는 이동속도를 유지한 채 90도 이상의 방향전환을 하는 극단적인 사례를 삭제하는 것이다.
탭 스트레이핑의 ‘접근성이 낮다’는 말은, 인게임 상에서 자연스럽게 익힐 수 없는 비직관적인 기술이라는 의미다. 더 나아가 라슨은 "이를 더 극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상한'(strange) 키 설정까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둘째로 ‘예측과 대응이 매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프로 선수들조차 탭 스트레이핑을 구사하는 적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놀라운 반응속도와 조준 실력을 갖춘 유저들조차 정상적으로 반응할 수 없는 기술이라는 것.
부연하자면, 탭 스트레이핑에는 아무런 예비 동작이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에이펙스 레전드> 캐릭터의 인게임 무빙은 대부분 자세 변화가 수반되기 때문에 적 입장에서 일말의 예측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좌우 무빙’을 빠르게 하는 적이라고 해도 다리의 움직임과 상체가 돌아가는 모습 등을 보며 진행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식이다.
그러나 탭 스트레이핑의 경우 아무런 조짐 없이 움직임 방향이 급격하게 변한다. 상대가 일반적인 궤적으로 움직일지, 아니면 탭 스트레이핑을 사용해 급격히 방향을 틀지 도중에 알기 힘들다는 의미다. 따라서 탭 스트레이핑 플레이어에 ‘맞설’(counter play) 방법이 제한된다는 것이 제작진의 논리인 듯하다.
마지막으로 일부 '이동 스킬'을 가진 캐릭터가 탭 스트레이핑을 더욱 극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라슨은 '그래플링 훅' 스킬을 가진 '패스파인더' 등 예시를 들었다. 패스파인더는 그래플링 훅을 사물에 고정해 먼 거리를 빠르게 날아갈 수 있다. 이 그래플 기술로 적을 빠르게 지나쳐 착지한 패스파인더가 탭 스트레이핑으로 180도 회전해 공격하는 등의 극단적 예시도 현재 발생하고 있다고 라슨은 전한다.
탭 스트레이핑 삭제를 반대하는 측에서도 나름의 논거를 가지고 주장을 편다. 우선 일각에서는 탭 스트레이핑 삭제가 콘솔 유저들을 위한 편파적 밸런스 디자인이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컨트롤러에서는 불가능한 탭 스트레이핑 조작을 없애면서 양측 유저간 격차를 줄이려 한다는 것.
두 입력장치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조화를 추구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다. 그러나 PC 유저의 플레이 자유도를 낮추는 방식으로 콘솔 유저와의 형평성을 맞춰서는 안 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양측 플레이어가 한 로비에서 플레이하도록 만드는 ‘크로스 플레이’가 사실상 운영진에 의해 PC 유저들에게 ‘강제’됐기 때문이다.
<에이펙스 레전드>는 현재 ‘크로스 플레이’를 디폴트로 지원한다. 이는 출시일로부터 20개월 정도 지난 2020년 10월에 리스폰이 다소 일방적으로 도입한 기능이다. 게다가 콘솔 유저들의 경우 PC 유저와 함께 매치메이킹을 하지 않는 한, 콘솔 유저끼리만 플레이할 수 있게 시스템적으로 보장되지만, PC 플레이어에게는 이런 '선택권'이 없다.
따라서 PC 유저 입장에서는 패드 유저와의 혼합 매치에 어느 순간부터 비자발적으로 참여해왔으며, 싫더라도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이렇듯 ‘타의’로 함께하게 된 콘솔 유저들의 편의를 위해 ‘탭 스트레이핑’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일방적 처사로 느껴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PC 유저들은 그간 콘솔 유저에게 제공되는 ‘조준 보정’ 기능이 너무 강력하다는 불만을 끊임없이 제기해왔다. PC 유저들이 말하는 이러한 ‘형평성 문제'에는 그간 귀 기울이지 않았던 리스폰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콘솔 유저들의 편의만 고려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다만 실제로 리스폰이 PC유저와 콘솔 유저간 격차를 좁힐 생각으로 삭제를 결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콘솔 유저들은 PC 유저와 함께 팀을 맺고 매치메이킹 했을 때만 PC 유저들 로비에 들어가 플레이할 수 있다. 따라서 실제로 PC 로비에서 플레이하는 콘솔 유저의 절대적 수가 아주 많지는 않다.
#SaveTapStrafing pic.twitter.com/hnHLy8ejEF
— Timmy (@iiTzTimmy) August 31, 2021
iiTzTimmy가 탭 스트레이핑 사용법을 강의할 생각으로 만들었다는 영상.
그렇다면 같은 PC 유저들 간의 밸런스 측면에서는 어떨까? 탭 스트레이핑은 숙달자와 일반 유저 사이의 격차를 크게 벌릴 수 있는 기술이다.
유저들의 실력이 지나치게 상향 평준화되고 이로 인해 신규 유저의 유입이 줄어드는 ‘고인물화’는 PVP 게임이 장기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일로 인식된다. 만약 ‘탭 스트레이핑’이 정말 신규 유저 유입을 막는 요소라면 전체 팬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삭제에 찬성하는 측에서는 이 점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반대하는 유저들은 <에이펙스 레전드>의 경우 ‘실력에 기반한 매치메이킹’(SBMM) 기능이 존재하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말한다. 비슷한 실력을 지닌 유저끼리 만나기 때문에, 초보자간 매칭에서 ‘탭 스트레이핑’ 사용자에 ‘벽’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리란 추측이다.
실제로 ‘탭 스트레이핑’ 삭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것은 일반 유저들보다는 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프로 선수들과 스트리머 등 최상위권 유저들이다. 일부는 온라인상에서 거친 표현을 사용해가며 직접적인 반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탭 스트레이핑과 유사한 기능을 하지만 더 구사하기 어려운 '리디렉션' 등 다른 무빙 기술들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리스폰의 결정은 부작용만 낳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나마' 따라하기 쉬웠던 탭 스트레이핑이 사라지면서 고수와 일반 유저 격차가 더 벌어지리라는 것.
그러나 리스폰이 문제삼는 것은 탭 스트레이핑의 기능적 측면이기 때문에,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무빙들은 앞으로 똑같이 삭제될 가능성이 크다. 라슨은 자신의 글에서 탭 스트레이핑 삭제의 궁극적 목표에 관해 설명했다. 리스폰이 막으려는 것은 유저들이 제작진의 통제를 벗어난 수준으로 움직임의 자유를 추구하는 상황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많은 이들이 <에이펙스 레전드> 무빙 시스템이 제공하는 자유를 사랑하지만, '제약'도 그만큼 중요하다. 이동기가 있는 캐릭터의 인기가 높은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게임에 무조건 이동 능력을 더 많이 추가하지 않는 것일까?"라고 말한다.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탭 스트레이핑과 같은 이른바 '모빌리티 크립'(mobility creep·시스템이 허용한 것 이상의 무제한적 움직임)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이 될 수 있어서다.
유저들이 개발한 이런 유형의 무빙을 그대로 둘 경우, 서드 파티(제 3자)가 싸움에 난입할 확률, 교전에서의 '전선' 형성 양상, 적 발견 후 거리를 좁히는 데까지의 시간 등, 제작진이 통제하고 있는 여러 요소에 예상 못 한 영향을 준다는 것. 라슨은 "<에이펙스 레전드>는 한정된 움직임 안에서 잘 작동하도록 설계됐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