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도박과 동일시하며 통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지노게임이나 랜덤박스 같은 게 아니라 '모든 게임'을요."
건국대 정의준 교수가 13일, 부산에서 열린 '불법 온라인게임물 사후관리 강화 포럼'에서 한 말이다. 정의준 교수는 이날 '게임과 도박의 차이'라는 강의에서 게임과 도박을 동일시하려는 이들이 있으며, 이들이 학문적이지 않은 근거로 둘을 같다 말한다고 지적했다.
건국대학교 정의준 교수
정의준 교수에 따르면 이런 이들이 사회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여성이나 청소년 같은 비주류 그룹은 판단력이 부족해 우리(?)가 이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모럴 패닉'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최근 사람들이 게임을 총기난사의 원인 등으로 돌리는 것, 십여년 전 사람들이 만화책을 청소년 유해매체로 꼽은 것, 몇 세기 전 사람들이 로멘스 소설 때문에 여성이 가상과 현실을 구분 못할 것이라 믿은 것 모두 이런 모럴 패닉이다.
물론 학계에선 인정하지 않는 얘기다. 최근 여러 이슈가 있긴 했지만, 정신의학회는 아직(?) 게임중독 등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몇년 전에는 증거가 일부 국가에만 국한된 반면, 증상에 대한 뚜렷한 통계적 특이점에 보이지 않는다며 DSM-5 등재가 취소됐다. 올해 WHO가 게임 장애를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판에 넣었지만, 학계 각층에서 반박이 나오고 있다. 아직 '논란' 단계다.
정의준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일각에서 게임을 도박과 같은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경고했다. 정 교수는 이를 말하며, 만약 게임과 도박의 메커니즘이 동일하다고 인정될 경우, (이미 도박중독이 질병코드를 얻었기 때문에) 게임중독이라는 개념이 의학적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둘을 동일시하는 이들의 근거는 두 콘텐츠 모두 ▲ 자신이 보유한 자원을 통해 놀이를 즐기고 상호작용적 표현 있는 등 유사한 메커니즘을 보인다는 것 ▲ '우연성'이 비중있는 장치라는 것 ▲ 심리적·물질적 보상이 과다한 이용을 야기한다는 것을 꼽았다. 실제로 일부 카지노 게임은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게임은 정말 도박과 같은 성격의 놀이일까?
이에 대해 정의준 교수는 게임과 도박이 본질적으로 다른 콘텐츠라는 것을 4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가 꼽은 첫 번째 이유는 도박 중독을 판단할 때 쓰는 9가지 기준이다. 정신의학계에서는 도박 중독을 판단할 때 ▲ 내성 ▲ 금단증상 ▲ 도피 ▲ 자기 통제력 상실 ▲ 거짓말 (도박 사실을 숨김) ▲ (도박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 ▲ 집착 ▲ 추격매수(본전 만회 심리) ▲ (타인에게) 구제 요청 9가지 기준을 사용한다.
하지만 게임, 게임과몰입의 경우 도박 중독에서 사용하는 9개 기준 중 불과 4개만 기준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이 중 일부는 도박중독과 다른 방식으로 적용된 케이스도 있다. 만약 게임과 도박의 메커니즘이 같다면 도박 중독 기준 중 절반도 안 되는 기준만 적용될 리 없다는 설명이다.
근래엔 WHO가 이 4개 기준만으로 게임 장애를 판단하자고 얘기했지만, 학계에서 추가적인 란을 불러 일으킨 상태다.
정의준 교수가 2번째로 꼽은 이유는 심리적 영향이다. 정의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게임과 도박은 서로 정반대 방향으로 사람을 변화시킨다.
예를 들어 도박을 많이 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은 반면, 게임을 많이 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다. 이는 도박은 기본적으로 우연에 의해 결과물이 달라지는 만큼 유저의 노력이 개입될 여지가 별로 없지만, 반대로 게임은 유저의 노력이 기반으로 깔려야만 합당한 보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도박을 하는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물질가치에 대한 집착도가 높게 나타나지만, 게임을 많이 하는 유저는 반대다. 이는 도박의 보상이 현실적으로 가치가 있는 재화, 혹은 이런 재화로 바꿀 수 있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반면 게임의 보상은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레벨, 아이템 등에 국한된다,
콘텐츠 자체가 대상을 얼마나 얽매냐는 '중독지수' 체크에서도 도박은 하면 할수록 중독 지수가 높게 나오지만, 게임은 의미 있는 증가치를 보여주지 않았다.
심리적 영향성, 물질가치 추종도, 중독지수 3개 파트에서 두 콘텐츠는 정반대의 영향력을 보여줬다.
정의준 교수가 3번째로 꼽은 이유는 두 콘텐츠의 메커니즘이다.
도박은 기본적으로 '보상' 중심의 콘텐츠다. 유저가 도박에서 느끼는 재미의 대부분은 플레이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결과 내가 얼마나 큰 보상을 얻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실제로 도박을 하는 사람들을 검사해보면 플레이하는 순간보다, 보상을 얻었을 때, 큰 보상을 얻었을 때 흥분도가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게임은 재미가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에서 나오는 콘텐츠다. 게임을 하는 유저는 뇌가 과정 자체를 인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게임 과정 자체에 반응한다는 얘기다. 보상 회로가 주로 활동하는 도박과는 다른 모양새다.
게임의 메커니즘도 보상뿐만 아니라 역할을 통한 액션 제한(혹은 추가), 미션을 통한 서사 구성 등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도록 많이 발전돼 있다. 또한 보상 또한 환금성이 있는 도박과 달리, 게임 속 레벨이나 장비 등 현실에서 큰 가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정의준 교수가 마지막으로 꼽은 근거는 '커뮤니티'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게임은 기본적으로 '커뮤니티'를 위해 발달한 놀이다. 실제로 많은 게임이 유저와 유저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상호작용성', 다른 유저와 힘을 합치거나 경쟁하는 '사회성' 등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는 게임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보드게임부터 최근 온라인/모바일게임에 이르기까지 고루 나타나는 특징이다.
반면 도박은 '보상의 쟁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간혹 경쟁 외에도 다른 요소가 있는 도박이 있긴 하지만, 게임만큼의 확장성을 보여주진 못한다. 그리고 이 다른 요소도 보상 쟁탈에 영향을 주게끔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정 교수는 이상의 4가지 이유를 들며 게임과 도박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성격의 콘텐츠라고 강변했다.
단, 정의준 교수의 이 말은 '게임이 결백(?)하니 앞으로 비판하지 맙시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 교수는 "몇몇 콘텐츠가 도박과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도 'XX 게임'이라는 식으로 게임의 탈을 쓰고 있다. 이런 콘텐츠가 많아질수록 게임이 도박으로 동일시되는 일도 많아질 것이다. 업계와 게임물관리위원회가 힘을 합쳐 이런 게임을 철저히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