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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다시 '일랜시아': 20년 전 온라인게임이 꿈꾸던 자유와 소통

일랜시아의 '내언니전지현', 정상원 前 넥슨 개발총괄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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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석(우티) 2020-05-19 12:03:21

누군가 흉가라고 부르던 <일랜시아>는 적잖은 이들에게 소중한 다락방이었다. 박윤진 감독은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로 다락방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한 달 전, 기자는 박 감독을 인터뷰했다. 두 사람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자료가 없는 20년 전 게임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많은 말을 나눴지만, 퍼즐을 온전히 채울 수는 없었다.

 

부족한 조각을 찾고 싶었다. 박 감독과 상의 후, 당시 넥슨의 게임 개발을 이끌던 정상원 전 개발총괄에게 대담을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궁금한 게 너무 많은 유저와 20년도 더 지난 일을 기억해야 하는 개발자의 만남이었다. 대화는 게임의 기획 의도, 넥슨이라는 개발사, 아직 <일랜시아>를 즐기는 유저들과, 오늘날의 현실로 동심원을 그렸다. /디스이즈게임 김재석 기자, 이형철 기자

 


 

 

[관련기사]

넥슨 MMORPG '일랜시아'는 아직 지지 않았다 (바로가기)

 

# "아직도 그렇게까지 게임을 하고 있을 줄 몰랐다" 

 

김재석 기자(이하 우티): 와주셔서 감사하다. 먼저 이 대담의 성격을 짚고 갈 필요가 있겠다. 

 

유저와 개발자의 만남을 별로 좋은 싸인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성토의 장이나 민원 해결의 현장처럼 말이다. 이 대담은 그런 성격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싶다. 박윤진 감독 님은 유저이지만,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찍어 알린 입장이고, 정상원 전 개발총괄 님은 현직자가 아니며, 오히려 20년 전 기억을 소환해야 하는 입장이다.

 

20년도 넘은 MMORPG에 유저들이 존재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꼈다. <일랜시아>에는 많지는 않지만 여전히 유저들이 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면서 <일랜시아>가 넥슨 MMORPG 역사에 있어서 일종의 이정표와 같은 타이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대담을 준비했다.

 

 

정상원 전 넥슨 개발 총괄 (이하 띵): 사실 <일랜시아>는 애매한 타이밍에 나온 애다. 넥슨이 3D로 넘어가기 전에 도트로 찍어낸 마지막 게임이다. 도트 그래픽이나 PK가 없는 아기자기한 스타일을 강조해서 내놨던 게임이고. 그런데 아직도 그렇게까지 게임을 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웃음) 

 

회사 입장에서는 <일랜시아>라는 프로젝트엔 아쉬움이 있다. 사실 그때는 이런 게임(일랜시아) 말고 AAA급 3D를 만들었어야 했다. 당시 <뮤>가 대세였거든. <일랜시아>도 초반에는 괜찮았지만, 사업적으로 많이 벌었던 타이틀은 아니다.

 

 

우티: 이야기 나왔으니까 말인데 지금도 도트는 (대형 게임사 중에) 넥슨이 제일 잘 하지 않나?

 

띵: 지금 한국에서 도트 디자이너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으로 안다. 대부분의 실력있는 도트 디자이너들은 <던파>나 <메이플> 팀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일랜시아>는 <바람의나라> 도트 찍었던 분들이 넘어가서 찍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박윤진 감독(이하 내언니전지현): 그러면 앞으로 <일랜시아> 같은 도트 그래픽 게임이 나올 가능성은 없을까?

 

띵: 도트 디자인은 꽤 힘든 작업에 속한다. 때문에 기존 리소스를 활용하는 모바일 게임은 나올 수 있지만, 신작을 만들기는 어려울 거다. 물론 RPG가 아닌 캐주얼한 게임은 가능할 것 같다.

 

 

우티: <일랜시아>는 개발 초기의 모습들이 잘 남아있는 편이다. 지금 게임에 보여지는 것들도 다 서비스 초기 어셋들 아닌가?

 

띵: 게임 자체가 손을 많이 타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 같다.

 

정상원 넥슨 전 개발총괄

 

 

# 일랜시아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나?

 

내언니전지현: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보셨나?

 

띵: 게임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게임은 사람들에게 추억과도 같다. 때문에 옛날 게임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야구를 보면, 옛날 자료를 보며 그 시절을 회상하는데 게임은 그러한 데이터나 자료가 없다. 때문에 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활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느꼈다.

 

(박윤진 감독 제공)

 

우티: 박 감독의 다큐멘터리에는 <일랜시아>를 만든 사람을 만나려는 여정이 담겨있는데, 이렇게 성사됐다. <일랜시아>에서 띵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띵: 나는 당시 넥슨 개발 총괄이었다. 중간중간 게임의 방향을 잡거나 여러 리소스를 안배하는 일을 했다.

 

 

우티: 개발인력은? 기간은 얼마나 걸렸나?

 

띵: 정확하진 않은데 아마도 10명 언저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만 해도 게임을 어느 지점까지만 만들고 "됐다" 싶으면 출시했다. 그 뒤에 운영을 하면서 개발도 같이 했다. <일랜시아>가 나올 때만 해도 넥슨 전 직원이 100명이 안 됐다. 기간은 1년 반 정도 걸린 것 같다. 그때는 1년이면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2년은 좀 길다는 인식이 있었고.

 

 

내언니전지현: (특정 지역에서 프로그램을 써서 벽을 지우면) 게임에 '아레수 바보 맞지?'라는 이스터에그가 등장하는데 그는 누구인가?

 

띵: 당시 <일랜시아> 디렉터 아이디가 아레스였다. 그래서 별 의미 없이 장난쳐놓은 거다. (웃음) 원래 <바람의 나라> 운영자였다가, 인수인계하고 <일랜시아>로 넘어온 케이스다. 그렇게 <바람의 나라> 출신들이 <일랜시아>를 만들었고 <어둠의 전설> 출신들이 <아스가르드>를 만들었다.

 

 

우티: <일랜시아>가 다른 클래식 RPG와도 비교해도 레벨이 없는 등 특이점이 많은 게임인지라, 이 게임의 기획 의도가 궁금하다.

 

띵: 넥슨의 첫 게임은 <바람의 나라>다. 고구려 세계관에 판타지를 섞은 게임이었다. 고구려 시대인데 파이어볼(현재 헬파이어)도 쓰고 막 그러지 않나? 던전도 쥐굴, 뱀굴 이렇고. 여러모로 애매한 설정의 게임이었는데, 당시는 그 그런 설정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개발자 입장에서는 스토리나 내용을 전개할 때, 그런 이질적인 것들이 눈에 밟혔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용이 나오는 정통 판타지 <어둠의 전설>이었다. <어둠의 전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새로운 걸 해보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그렇게 나온 게 <일랜시아>다.

 

앞선 두 게임이 잘 됐지만, 똑같은 걸 또 할 수는 없었기에 차별화된 게 필요했다. 당시 <바람의 나라> 그래픽 디자이너가 <일랜시아> 그림을 담당했다. <바람의 나라> 콘셉트는 (원작의 존재로) 이미 나와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분이 자기 색깔을 넣을 공간이 없었다. 그런데 <일랜시아>는 진짜 자기 취향에 맞게 순정만화 풍 그림체를 집어넣을 수 있게 됐다.

 

<일랜시아>는 개발자들이 자기 할 수 있는 걸 해볼 수 있는 여건에서 만들어진 게임이다.

 

디자이너 취향이 담긴 <일랜시아>의 일러스트 (출처: 넥슨)

 

내언니전지현: <일랜시아> BGM은 자체 제작한 건지 궁금하다.

 

띵: 당시 넥슨에 음악 하는 사람이 없어서 외주를 맡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티: <일랜시아>는 기계 언어로 만든 건가?

 

띵: 아니, C++다. 아무래도 <바람의 나라> 개발진이 만든 게임이라 스크립트만 다르고 코드 베이스나 파일 구조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다. 두 게임이 서버가 공유되고 있었고 클라이언트만 달랐기 때문에 서버 부분에서 <일랜시아>에 버그가 생기면 <바람의 나라>에도 버그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내언니전지현: 그때 게임을 만든 개발진들이 <일랜시아>가 잘될 거라는 기대를 했나? 아니면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자라는 실험 정신으로 만들었나?

 

띵: 당시는 온라인 게임이 마구 터져 나오던 시기였다. 요즘이야 '대박 아니면 쪽박'이라지만, 어디에 막 심기만 해도 알아서 잘 크는 그런 타이밍이었다. 그래서 <일랜시아>가 망할 거라는 생각보다, 설령 크게 흥행하지 못해도 먹고 살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아무리 못 만들어도 어느 정도 수익은 회수할 수 있었다. 개발비도 많이 들지 않았던 만큼 본전은 할 거로 생각했다.

 

 

내언니전지현: 요리나 물고기 종류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다양하다. 제작단계에서 의도한 부분인지 궁금한데.

 

띵: 당시 디렉터가 그런 디테일에 신경 쓰길 원했다. 더군다나 당시는 요리에 그렇게까지 공을 들인 게임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특이한 걸 해보길 바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유저들은 게임에서 이렇게 놀고 있다 (...)

 

내언니전지현: <일랜시아>의 다양한 시도에 대한 유저들의 반응은 어땠나?

 

띵: 그때는 개발자랑 유저 사이가 좋았다. 비난하기보다 고마워하는 유저가 많았다. <일랜시아> 서비스 초기에만 해도 테스트 서버를 따로 파지 않고, 유저를 직접 회사로 불러서 시연시키고 그랬다. 유저 중에 몇 분은 넥슨 게임 하는 사람이었다가 취직해서 그 게임 담당하기도 했다. 아레스가 그런 사례였다.

 

 

내언니전지현: 요즘 세상에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문화인 것 같다.

 

띵: 옛날에는 유저와 개발자 모두 게임을 즐겼다. 특히 개발자는 돈보다는 게임을 만드는 재미에 의미를 많이 뒀다. 밥 못 먹어도 재밌는 게임을 만들면 좋다라는 자긍심 같은 게 있었다.

 

유저들도 그런 사정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개발진의 수고를 이해했다. 더러 밥을 사주거나 회사에 한약을 들고 오는 유저도 있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돈 많이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줬던 셈이다.

 

그런데 지금 개발자에 대한 유저의 생각은 썩 좋지 않다. 모든 행동 하나 하나를 다 돈을 벌려고 한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자잘한 캐릭터 밸런싱만 해도 '얘네 돈 벌려고 그런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바람의 나라>나 <일랜시아>는 월정액으로 수익을 만들던 게임이다. 때문에 개발진들은 유저들을 위한 재밌는 거리만 준비하면 됐다. 그런데 부분 유료화로 넘어오면서, 고과금 유저들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고, 과금이 고도화됨에 따라 인식이 점점 나빠졌다. 그러면서 유저와 개발자들의 거리도 멀어졌다고 생각한다.

 

 

우티: 과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웬 마호니 넥슨 CEO가 최근 한 포럼에서 "넥슨 게임의 방향성은 고래 유저를 쫓는 것이 아니라, 다수 유저와 고래 유저의 중간 지점을 찾아 돈을 쓰게 만드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어떻게 보셨나?

 

띵: 고과금 유저들이 어느 정도는 게임을 끌고 가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개발사가 그런 유저들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다만 계속 이렇게 가다 보면, 돈을 내지 않는 유저들은 물론 고과금 유저들도 게임을 비판하는 상황이 올 거다.

 

다행스럽게도 넥슨은 게임을 운영함에 있어 고과금 유저만 따라가지 않는다. 나름 소액 과금 유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꾸준히 분석하는 편이다.

 

박윤진 <내언니전지현과 나> 감독

 

 

# 다시 호명된 <일랜시아>, 초창기 온라인게임이 꿈꾸던 '자유'

 

내언니전지현: <일랜시아>를 제작할 때 ‘자유도’를 중요한 요소로 잡고 기획했다고 했는데, 당시 IMF로 인해 사회가 힘든 만큼 게임에서라도 자유롭게 놀아보라는 의도였나?

 

띵: 그런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단지 기존에 출시된 게임들과 다르게 구성해보자는 생각은 있었다. 여기에 당시 디렉터의 개인 성향이 섞이고, 순정만화를 좋아했던 아트 담당자의 색깔이 섞이면서 <일랜시아>가 나왔다.

 

 

우티: 사실 다시 호명된 <일랜시아>를 보면서 <동물의 숲> 생각이 많이 났다. 게임 들어가서 하고 싶은 것 하고, 친구 불러서 자유롭게 놀고.

 

띵: 그런 면에서는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 자유로운 교류가 넥슨 온라인 게임이 초창기 가려고 했던 방향이다. 그냥, 다른 유저랑 노는 것. 그런데 요즘은 숙제가 너무 많다. 그러니까 게임을 하면 대화를 하지 않고 서로 다 자기 숙제를 풀고 있다. 정말 제대로 된 온라인 게임을 만들고 싶다면, 유저를 심심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숙제로 유도하기보다, 다른 것들을 즐길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숙제'가 당연한 시대가 되다 보니, 스스로를 '심심한 게임'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세상이 됐다. <동물의 숲>은 닌텐도니까 가능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해야 할 것도 없고 레벨도 없으니 "친구랑 놀기만 하세요"라고 주장하는 게 참 어려운 건데. 개인적으로는 온라인 게임이 롱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러한 심심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콘텐츠를 억지로 집어넣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심자와 고인물 사이의 거리도 벌어질 것이다.

 

2020년 현재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모여봐요 동물의 숲>

 

내언니전지현: 유저들이 그런 과제에 길들여진 부분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띵: 결국 과도한 경쟁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발사가 그것을 돈으로 팔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더 심각해졌고. 사실 경쟁으로 돈을 버는 건 정말 쉽다. 하지만 여기에 맛을 들이면 게임의 콘텐츠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 불륜, 재벌가 같은 요소들은 사람들이 욕하면서도 가장 많이 보는 주제다. 잘 팔리기 때문에 욕을 먹으면서도 그런 요소를 쉽게 내치지 못하는 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색이 다른 드라마를 만들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경험과 능력이 부족해서 한계에 부딪힌다. 설령 능력이 있더라도 그동안 만들어왔던 아침드라마 같은 쉬운 길을 택하게 된다. 돈으로 경쟁을 사고파는 것은 우리나라 게임판을 키워준 선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면도 냉정하게 봐야한다.

 

 

우티: 일전에 정상원 전 총괄님이 과거 디스이즈게임과 나눈 대담에서 게임계에는 영화판과 같은 크레딧이 없어서 창의력이 부족하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요컨대 20년 전에 봉준호 감독이 무슨 영화를 감독했는지 알지만, <일랜시아>를 만든 건 누군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띵: 굳어진 틀을 깨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런 사람이 조명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게임이 흥행하면 그 게임 개발자보다는 회사나 대표의 이름만 조명을 받는다. 특정 영화가 흥행했을  때를 생각해보라.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름이 알려지지, 영화사의 이름이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없지 않나? 물론 한국 게임판에도 예전에는 그러한 스타 개발자가 있었지만, 현 시대에 오면서 거의 사라졌다.

 

날고 기는 스타 감독들도 모든 영화가 다 성공하는 건 아니지 않나? 가끔 엉뚱한 시도를 해서 성과를 올리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성공한 사례를 보면서 계속 지원하는 거고. 반면 지금 한국 게임판은 너무 쉽게 돈을 벌고 있다. 때문에 다른 시도를 하기도 어렵다.

 

마음 속으로 "이게 진짜 내가 원하던 게임일까?" 생각하는 유저분 있으실 거다. 쳇바퀴 돌듯 숙제를 하고, 경쟁을 돈으로 사야 하는 것이. 그래서 많은 사람이 <동물의 숲>에 열광했던 거다. 경쟁도, 숙제도 없이 자유롭게 놀 수 있으니까.

 

봉준호가 20년 전에 감독한 영화는 <플란더스의 개>다.

 

우티: '숙제'로 채워진 게임의 흐름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숙제가 BM이 되기도 (배틀배스)​ 했는데.

 

띵: 개인적으로는 이미 2년 전에 이러한 흐름 때문에 언젠가 위기에 봉착할 거로 생각했는데, 아직은 잘 굴러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사람들이 왜 옛날 게임을 소중하게 추억하고 있을까? 무한 경쟁이나 시간을 돈으로 사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숲>을 봐도, 이런 종류의 게임에 대한 수요가 분명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언니전지현: <동물의 숲>의 흥행은 경쟁 사회를 벗어나 힐링하고 싶은 현대인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띵: 맞다. 사회건 게임이건 경쟁인데, <동물의 숲>은 그게 아니었으니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이다. <일랜시아>도 그런 요소들이 있었고. 지금에 들어 이러한 요소들이 특별해진 상황이다.

 



# "개발자 일은 판을 깔아주는 것..." 지금은 '다락방'이 된 <일랜시아>

 

우티: 아까 '현재 게임 업계가 대박 아니면 쪽박으로 갈린다'고 했는데,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준다면?

 

띵: 요즘 게임들이 다 비슷하게 제작되는 건, 개발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개발비 2억이라도 꽤 큰 수치였다. 요즘은 200~300억은 예삿일이지 않나. 때문에 그 큰돈을 놓고 새로운 걸 시도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예전엔 망해도 그 돈 포기할 수 있었다. 반면 요즘에는 망했을 때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게임도 보수적으로 제작되고 있다. 대부분 게임이 비슷해지고, 아주 작은 차이 정도밖에 안 난다. 그 과정에서 대박 아니면 쪽박이 갈리는 거고.

 

그런데 90년대에는 어떤 게임을 만들어도 본전은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엔 정말 다양한 시도를 많이 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엘리멘탈 사가>는 레벨도 스킬도 없이 시작한 MMORPG다. 그런 걸 해볼 수 있는 토양이었다.

 

 

우티: 다시 <일랜시아>로 돌아가서, 속칭 옛날 게임에 대한 향수라고 할까? 그런 것 하나로 사람들이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추억은 잠깐 아닌가?

 

띵: 현시대 게이머들에게 게임은 경쟁이다. 더 높은 레벨을 원하고, PK를 통해 상대를 짓밟고 싶어 한다. 가상 세계에서 돈을 써서 현실에서 할 수 없는 포식자의 위치에 오르고픈 욕망이 표출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그런 욕망을 표출하면서 돈 쓰는 사람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 그만큼 고과금 유저들한테 메리트를 주는 거다. 그런데 그러면 밑에 깔려있는 일반 유저들 불만은 커진다.

 

때문에 그런 플레이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 옛날 게임에 가보면, 어렸을 때 놀던 다락방에 들어가던 설렘을 준다. 지금 보면 먼지도 많고, 초라한 인형뿐이지만 게임을 하다 보면 그때의 그 추억들이 살아나고, 옛날에 게임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그 자체가 너무나도 좋은 요소로 다가오는 거다. <일랜시아>에는 그러한 온라인 게임의 원초적인 요소가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일랜시아>의 월드맵 (출처: 넥슨)

 

우티: <일랜시아>는 특이하게도 '다락방'을 유저들이 고쳐서 살고있는 듯한 느낌이다. 매크로나 에드온 만들어서 공유하기도 하고.

 

띵: 요즘 게임은 돈만 내면 알아서 다 해주지 않나? 그러니 애착이 조금 덜 할수도 있다. 반면 <일랜시아>에는 그런 요소가 없었다. 만약 게임이 정말 흥행했다면 유저들이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제지했을 것이다.

 

유저들이 <일랜시아>에서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공유하는 모습을 보면 요즘 흥행하는 게임들의 트렌드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개발사는 물리 엔진, 패턴, 플랫폼 정도만 제공하고 그 안에서 유저들이 알아서 노는 그런 트렌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온라인 게임의 옛날 모습과 비슷하다.

 

다만 우리는 콘텐츠를 넣어주는 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부터 지금의 형태로 변했다. 옛날에 우리(개발자) 역할은 유저들 노는 판을 깔아주는 거였다.

 

 

우티: 판을 깔아준다? 지금도 게임사 일은 마찬가지로 판을 깔아주는 거 아닌가?

 

띵: 옛날에 유저들에게 게임을 주면, 알아서 놀 거리를 찾았다. 그런데 지금은 숙제처럼 할 거리를 쌓아준다. 그것을 다 소화하고 나면 그만큼의 할 거리를 또 얹어준다. 그러면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처음엔 재밌더라도 가면 갈수록 버거워진다.

 

심지어 어떤 개발사는 돈을 내면 숙제 요약본을 보여준다. 숙제를 한 걸로 쳐주겠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게임 개발자가 아무리 공들여 스토리와 디테일을 만들어도 의미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것이다.

 

<일랜시아>에서 미용을 하는 모습 (박윤진 감독 제공)

 

우티: 확실히 옛날 MMORPG는 숙제가 적었던 기억이다.

 

띵: <일랜시아>는 그런 압박이 없는 게임이다. 유저들끼리 알아서 놀고, 알아서 콘텐츠를 만드는 게임이었다. <바람의 나라> 오픈 초기에 가장 있기 있는 콘텐츠가 무엇이었는 줄 아나? 'OX 퀴즈'였다. 우리가 만든 건 아니고, 유저들끼리 놀다가 알아서 만든 콘텐츠였는데, 그게 반응이 좋았다. 이후에 개발진이 NPC 넣어주고, 틀린 사람 제외하는 기능만 추가했다. 이런 게임이 재미있는 이유는 콘텐츠보다, 유저들이 알아서 놀 수 있기 때문이다. <일랜시아>는 완전히 그 루트를 탄 거고.

 

 

내언니전지현: 100명을 죽여야 될 수 있는 '네크로멘서'나 훔치기, 훔쳐보기 스킬도 그런 '알아서 놀 수 있는' 자유도를 위한 설계였던 건가?

 

띵: 내가 팀을 떠난 다음에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일랜시아> 방향을 잡을 때 PK나 서로의 아이템을 뺏을 수 있는 등의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르는 채 그런 공격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어린이들의 테마 파크를 만드는 것도 아닌데 가상 공간에서까지 굳이 그걸 반대해야 하느냐는 내부 압박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오직 게임 쪽으로 승부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서 <바람의 나라>, <어둠의 전설>, <일랜시아>의 초기 단계에선 그런 요소가 없었다.

 

 

우티: <일랜시아>에서 PK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내언니전지현: 예전에는 마을에서도 가능했는데, 최근에는 일정 맵 안에서만 가능하다. 

 

 

# <일랜시아>의 아이러니한 생명력

 

내언니전지현: <일랜시아>는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하드코어한 게임이다. 매크로가 없으면 마스터할 수 없는 스킬이 수두룩하다. 심지어 넥슨 공식 가이드북에는 매크로를 권장한다는 문장까지 나와있다.

 

띵: 이렇게 오랜 세월 유저 분들이 할 거라고 생각을 안 하고 그런 레벨 디자인을 만들어서 그런 거다. 그런 부분들을 유저들이 매크로를 하면서 따라오고 있는 거고. 요즘 모바일 게임 중에 특정 요소를 끝내기 위해서 1시간에서 5시간 사이를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에는 1주일, 한 달까지 걸리는 것도 있지 않나. 콘텐츠의 빈약함을 채우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우티: 수평적으로 확장할 수 없으니 아니라 수직적으로 값을 계속 올렸다는 건가?

 

띵: 게임에 매크로 없이는 끝낼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건, 콘텐츠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랜시아>의 매크로 구동 모습 (박윤진 감독 제공)

내언니전지현:​ 그런데 <일랜시아>는 정말 어려운 편에 속한다. 작년에 게임 서비스 20년 만에 만렙 유저가 나왔다.

 

띵: 그 분은 '설마 여기까지 오겠어?' 하고 만들어놓은 걸 돌파하신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업데이트를 안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고. 차라리 만렙 제한이 없으면, 콘텐츠도 계속 추가되고 했을 텐데. 만렙에 도달하면 유저들이 떠날 것이 두려우니까, 그런 식으로 장벽을 높게 만든 거다. 리소스도 없고, 솔직히 말해서 게임이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니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런 식으로 장벽을 쌓는 것밖에 없었을 거다.

 

 

우티: 앞서 <일랜시아>가 미완성으로 출시됐다고 했는데, 그로 인해 추가될 법한 콘텐츠가 추가되지 않았다는 말도 있더라.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 게임이 좀 나아졌을까?

 

띵: 당시 게임은 대부분 일단 서비스를 시작해보고, 잘되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일랜시아>는 생각보다 그게 잘 안됨에 따라 작은 규모의 팀이 서비스를 진행하는 쪽으로 흘러갔고, 그래서 부족한 부분이 꽤 있는 게임이었다.

 

 

내언니전지현: 일본판 <일랜시아>에는 포함된 콘텐츠가 한국에서는 빠진 경우도 있다. 일본판 <일랜시아>가 한국에 비해 흥행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띵: 일반적으로 게임이 여러 국가에서 서비스되면, 흥한 국가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잘되면 한국 위주로, 반대 경우에는 현지 위주로 집중된다. 이 경우 한국 서버와 현지 서버가 찢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개발 격차도 벌어지고. 때로는 다른 국가에서 시도했는데 성과가 별로일 때 한국에 해당 콘텐츠가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다. 현재 넥슨에는 <일랜시아> '전담' 인력이 없는 것으로 안다. 

 

 

우티: <일랜시아>를 모바일로 출시하면 어떨까?

 

띵: 일단 <일랜시아> 자체가 성공을 못 했으니 어려울 거로 생각한다. <바람의 나라> 같은 타이틀은 아니지 않나? 물론 여전히 좋아해 주시는 유저분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만으로 게임을 모바일로 끌고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넥슨의 역사가 담긴 '넥슨 클래식 RPG' 5종


# 모두에게 소중한 추억 <일랜시아>, 다락방의 역사는 계속된다

 

우티: <일랜시아>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띵: 넥슨이 자체로 개발한 MMORPG로 오랜 시간 수명을 유지해왔다. 그 이후로 넥슨이 '직접' 개발한 MMORPG 중에 좋은 기억이 있는 게 많지 않다.​ 넥슨에게 있어 소중한 추억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하다.

 

 

내언니전지현: <일랜시아>가 없어지지는 않을까?

 

우티: 다큐멘터리를 보면 작년 매각 국면 때 <일랜시아> 유저들이 굉장한 불안을 표출한 것을 볼 수 있다.

 

띵: 이런 옛날 게임들은 커뮤니티가 깨지지 않는 한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물론, 개발사가 없애버릴 수도 있지만, 상징적인 게임이기 때문에 쉽게 없애진 못할 거다. 또 기존 게임을 정리하면 유저들의 반발도 의식해야 한다.

 

 

내언니전지현: 고전 RPG 5개 중에 <일랜시아>에 대한 게임 커뮤니티가 꽤 활발하고 반응도 호의적이다.

 

띵: 유저분들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일랜시아>는 유저층이 넓지 않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잘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게임이 흥행을 하게 되면 나가고 들어오는 유저가 많아짐에 따라 커뮤니티 성격도 변화한다. 반면 <일랜시아>는 그러한 변화의 폭이 작았다. 숫자는 작지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희석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랜시아> 자체도 특이한 게임이니까 즐기시는 분들 평가도 좋지 않을까? 현 시점에도 이런 게임은 쉽게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대담 이후 박윤진 감독은 정상원 전 개발총괄에게 한 유저가 직접 제작한 <일랜시아> 이미지를 선물했다.



박윤진 감독이 20년 전 <일랜시아> 개발에 참가했던 개발진을 찾고 있습니다.

직군, 역할과 상관 없이 <일랜시아>를 만든 분이라면, 다큐멘터리 상영 현장에 모시고 싶다고 합니다.

 

메일 주소: [email protected]t

트위터: FRDvHGnRt9shP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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