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해도 GM(Game Master)이라는 직업을 상상하기 힘든 때가 있었다. 게임산업의 역사가 깊어지고, 규모가 방대해지면서 수없이 많은 직업이 생기고, 또 사라지고 있다. 어제만 해도 생각지도 못했을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또 게임판이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이색 직종이 부족한 곳곳을 메워주는 모습이다. 궁금할 법하다. ‘게임판의 이색직종’. 그 1탄을 블리자드 본사에서 근무 중인 ‘인터내셔널 커뮤니티 매니저’ 대니얼 친으로 시작한다. /디스이즈게임
“도대체 블리자드코리아는 뭐하는겁니까”, “블리자드에선 우리나라의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겁니까?”
유토피아로 여겨졌던 <WoW>의 세상도 게이머들이 기대하는 이상향으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춘삼월 들판에 부는 바람처럼 불만이 곳곳에서 흩날리는 <WoW>의 요즘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게이머들의 스크린에서는 그리폰과 와이번이 날아다니고 있다. 이유를 불문하고 불만이 쏟아지는 것이 온라인게임이고, 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이 <WoW>이고 보니 그만큼 요구도 많을 수밖에 없을 터.
이 같은 국내 유저들의 수많은 요구사항과 피드백을 개발자들에게 전달하는 가교역할은 누가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설날 이벤트를 그들이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유독 호드보다 얼라이언스의 캐릭터를 선택하는 비율이 높은 국내 유저들의 정서를 블리자드는 과연 어찌 받아들이고 있을까?
뻔하디 뻔한 <WoW>의 상황을 역설한 이유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블리자드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뿌려놓은 씨앗의 숫자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커뮤니티 매니저(이하 CM)’라는 씨앗을 말이다.
◆ 한국과 미국의 다리를 이어..
CM은 게이머들과 웹사이트에서 직접적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개발자와 유저의 다리를 잇는 가교역할의 운영자를 뜻한다. 국내에선 대부분 GM이 이러한 역할을 병행하고 있지만 해외 대형급 온라인 퍼블리셔나 개발사는 전문적인 CM체제를 갖춘 지 오래다.
특히 블리자드에서는 게임 런칭단계에서부터 상당한 숫자의 CM팀을 운영해왔다. 한국 네티즌의 독특한 성향에 발맞춰 빠르게 변모해온 국내 온라인시장의 관점에서 보자면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유저의 피드백을 다각도로 분석해 게임 속에 스며들게 만드는 CM의 역할은 <WoW>가 단시일 내에 세계 Top.1의 온라인게임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만은 분명하다.
블리자드 인비테이셔널 차 한국을 방문한 대니얼 친 씨는 이러한 수많은 CM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미국에 있는 개발자들과 직접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CM의 핵심급 인물인, 이른바 ‘인터내셔널 커뮤니티 매니저’다.
“물론 GM도 그렇지만 CM은 개발자 영역에 가까운 역할을 맡게 됩니다. 제 역할은 한국유저들의 피드백을 개발자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을 이해시키며 게임에 적용하는 일이죠. 쉽지 않은 일이지만 무엇보다 게임개발에 한 축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보람이 큽니다.”
2000년대 초반 엔씨소프트의 <리니지>가 미국에 런칭될 당시 엔씨 LA 지사에서 근무하던 대니얼 친은 지난 2004년 <WoW>의 국내 런칭이 다가올 무렵 블리자드에 합류, 인터내셔널 커뮤니티 매니저로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대니얼 친은 한국 시장의 적극적인 피드백 전달을 위해 블리자드가 직접 발탁한 인물로 국내 시장은 물론 유럽, 대만 등 전세계 CM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물론 국내 <WoW> 웹사이트에 속속 게재되는 유저들의 의견을 개발자들에게 모두 전달하는 것도 그의 역할 중의 하나다.
“온라인게임이 한 국가에서만 런칭된다면 CM의 중요도가 높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맡고 있는 인터내셔널 커뮤니티 매니저는 특히 그렇겠죠? 하지만 단순히 미국유저들의 피드백만을 전달하는 것으론 전세계에 통용되는 게임을 만들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WoW>의 경우엔 미국시장의 점유율에 25%에 불과해요. 어느 나라에서도 통할 수 있는 게임으로 발전을 위해 현재 블리자드는 진출한 국가별로 모두 CM을 두고 있습니다.”
미국 개발자가 생각하는 아시아권의 문화와 실제 게임을 즐기는 아시아 유저들이 생각하는 게임은 큰 갭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니얼 친의 설명이다. 쉽게 말해 한국 유저들의 게임플레이 성향이 다른 이유를 개발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현지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블러드엘프가 호드의 새로운 종족으로 결정된 계기는 한국 유저들의 피드백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 유저들은 게임캐릭터가 자신을 그대로 투영한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죠.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 유저들은 특히 그런 성향이 강한 편이었고 여러가지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피드백이 없었다면 해답을 찾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테죠.”
블러드엘프의 삽입은 한국유저의 적극적인 피드백이 반영됐다.
유저와 개발자의 의견을 서로 조율해야 하는 업무의 특성상 CM에겐 게임에 대한 박학다식한 지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게임을 모르면 개발자를 설득시키는 것도 불가능할 뿐 더러 유저들의 피드백을 전달하는 것도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때문에 이들에겐 하루종일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유일하게 부여된다. 실제로 대니얼 친은 미국과 한국섭에 만렙(60레벨) 캐릭터가 여러 개 존재하는 하드코어 게이머다. 실제로 미국섭과 한국섭을 오가며 즐기는 게이머의 한 사람으로서 느낀 점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글쎄요. 게임을 즐기는 것 자체는 비슷하지만 성향이 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죠. 한국유저들은 만렙, 즉 60레벨의 달성을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성향이 강합니다. ‘최고의 레벨업 코스’ 같은 것을 정해놓고 말이죠. ^^ 그에 반해 북미권의 유저들은 스토리나 채팅을 즐기며 게임을 좀 더 여유 있게 플레이하는 편입니다. 물론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각 나라 유저의 다양한 성향을 반영할 수 있는 게임이 되야 ‘블리자드 게임’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 대니얼 친. 그가 말하는 블리자드
“블리자드는 분명 규모면에서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개발사지만 굉장히 작은 회사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늘어도 가족 같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죠. 많은 회사에 근무했던 것은 아니지만 ‘미국 회사’ 같지 않은, 이런 분위기가 회사에게도 큰 이익으로 돌아올테고요.”
가족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는 블리자드의 특징은 직원들의 애사심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회사에는 패치 업데이트 작업과 같은, 6년간 매일처럼 똑같을 일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겨울 법도 한데 급한 일이 있을 때면 주말이건 새벽이건 한결같이 일하는 모습이 회사의 분위기를 대변해주죠. 일명 '크런치 타임'(Crunch Time)이라고 하는, 개발 막바지 기간엔 보통 미국 회사들도 야근을 밥 먹듯이 하지만 <WoW> 런칭 당시 수백명에 이르는 인원이 집에도 가지 않고 일하던 모습 역시 이곳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대니얼 친이 꼽는 블리자드의 장점은 어떤 직급에 있는 사람이더라도 이들이 제안하는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반영하려는 노력에 있다. 유저들의 피드백도 마찬가지다. 타당한 아이디어나 불만이라고 판단하면 수개월이 지나서라도 결국 적용을 시킨다는 이야기다.
“조금 아쉬운 건 결국 아이디어와 피드백이 반영되고 난 뒤엔 유저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다는 점이죠. CM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섭섭한 느낌도 있지만 유저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빨리 반영하기 위해 더 노력하라는 충고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개발진이 미국에만 머물러야 하는 특성상 모든 문제를 모든 나라에서 발 빠르게 대처하긴 힘든 면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 갭을 차츰 줄여나가는 역할에 CM이 서 있다는 점도 뿌듯하고요.”
CM, 나아가 인터내셔널 커뮤니티 매니저는 북미지역을 비롯해 국내 굴지의 온라인게임 회사에서도 점차 선발인력을 높여가는 유망직종 중의 하나라는 게 대니얼 친의 설명이다. 물론 각 국가의 의견을 조율하는 CM 업무를 위해선 수준 이상의 영어실력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원만하게 대할 수 있는 협상가의 자질이 필요하다.
“어려울 거 없잖아요? 게임 좋아하고, 열정 있고, 유저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면 됩니다.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도전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