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영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밤낮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손 때 가득한 연필을 쥐고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자신과의 싸움임을 알기에 한 장, 한 장 그림을 채워 나갈수록 작아져 가는 연필만큼이나 자신을 갈고 닦아 ‘쟁이’로서의 경지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는 곳.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를 TIG에서 찾았다.
연필..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루니아전기> 영상
게임이라는 분야에서 이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건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오프닝 영상에서였다. 그에 이어 지스타를 기점으로 봇물처럼 터져 나온 올앰의 <루니아전기>와 제이씨엔터테인먼트의 <고스트 X>에 이르기까지 프로모션 영상 하나만으로 게이머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이곳은 애니메이션계에선 이미 ‘신화’로 그려지고 있다.
‘연필로 명상하기’는 해외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수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한 중견 애니메이터인
네티즌 사이에선 2004년 SICAF에서 공개된 단 한장의 ‘포스터’ 만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단편 애니메이션 <관운> 등 여러 작품을 통해 한국의 ‘지브리스튜디오’라는 명칭까지 얻은 이들은 이 한 장의 포스터로 대변되는 <소중한 날의 꿈>이라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게임은 이제 좀 쉬려고요”
안 감독의 첫 마디다. 2007년 개봉할 <소중한 날의 꿈>에 집중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이래저래 바빠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끝으로 게임 일은 쉬겠다는 이야기다. 게임 좋아하시진 않으세요?
“글쎄요. 워낙 문외한이기도 하고, 그다지 취미가 없기도 하고. 부탁을 거절하긴 쉽지 않아서 진행은 했지만 만만한 일은 아니잖아요. 게임 좋아하냐구요? 사실 감독이 게임에 취미 붙이면 스튜디오가 망하거든요(웃음).
실제로 게임 때문에 스튜디오가 엎어진 경우까지 봤고. 그렇다고 스태프에게 게임 금지령을 내리거나 한다는 건 아니고… 게임을 좋아하는 스태프도 많습니다. 하지만 할 틈이 없죠. 시간이 남는다면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편이죠”
[[#casual/ghostx_ani.wmv#]]
최근에 제작된 제이씨의 <고스트 X> 애니영상 (▶를 누르면 재생됩니다)
손노리를 비롯해 <루니아전기>의 올엠, <고스트X>의 제이씨엔터테인먼트에 이르기까지 작업을 의뢰한 클라이언트의 만족도는 상당한 편이다. 게이머들의 반응 역시 높은 편이고. 때문에 지금도 게임업체들의 수많은 제의가 이어지고 있다. 게임회사들과의 작업은 어땠을까?
“작업 자체는 흥미로웠습니다. 게임회사로부터 시나리오와 기획, 컨셉디자인 등을 받으면 아이디어를 짜내 영상을 만드는 식이죠. 게임 일을 처음 참여하게 될 땐 시행착오가 꽤 있었지만 현재의 작업진전속도는 꽤 빠른 편입니다. 하지만 이런 업무 때문에 우리가 진작 해야 할 일이 점점 밀리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해서 잠시 쉬려고 합니다”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에서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
감독: 안재훈/한혜진, 각본 송혜진(전도연, 박해일 주연 '인어공주' 집필), 음악: 이상은
이들이 운명을 걸고 만들고 있는 작품은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의 첫 장편이기도 한 <소중한 날의 꿈>. 안감독은 강의 때나 방문객에게만 보여준다는 데모편을 조심스레 모니터에 띄웠다. 문외한의 눈으로 본 것만으로도 일본 애니메이션 못지 않은, 아니 그 이상의 색채가 묻어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최근 들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나 애니메이션 지망생들이 게임 쪽으로 상당수 흡수되고 있는 경향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애니메이션쪽 사정이 열악하다보니... 어쨌든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게임은 일종의 상업미술이죠. 본인이 그쪽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하겠다는 의지만 강하다면 상관없지만 다른 꿈을 꾸면서 게임 일을 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난 언젠간 애니메이션을 하겠어’라는 생각으로 게임회사에서 그림을 그린다면 그건 올바르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재훈 감독의 자리
전문 애니메이터로서 본 게임은 어떨까?
“감각적인 면이 많습니다. 게임의 원화라든가 컨셉디자인을 보면 말이죠. 단순히 그림만으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아닌, 기술적인 문제와 접목이 필요한 장르인 만큼 애로사항도 많겠죠
하지만 단순히 저희쪽 관점에서 그림을 봤을 땐 ‘단련된 인물’이 좀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젊었을 때 그리는 그림이란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산업자체가 젊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그림이란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5~6년 이상의 트레이닝기간을 거쳐야 자신의 색깔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는 기초부터 시작되는 엄청난 인체 표현의 수련기간이 필요합니다. 게임쪽은 대부분 입사와 함께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는 경우가 많아 이런 트레이닝의 기회가 주어지기 힘들 수밖에 없겠죠”
‘연필로 명상하기’를 거친 이들도 게임회사 이곳 저곳에 퍼져 있다. 어느 곳이라고 짚어서 이야기하기는 곤란하다는 안감독이지만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더라”며 부디 그곳에서도 잘되길 바란다고 웃음 짓는다.
이곳 스튜디오 멤버들은
“새로운 인력을 양성한다는 관점에서, 일부러 신입생들을 많이 뽑으려고 하고 있지만 그래서 오래 못 버티는 친구들이 많죠. 물론 일부 대형 애니메이션 업체와 같은 노동착취의 개념은 절대 아닙니다(웃음). 본인의 의지에 달린 일이죠. 이 과정에서 게임회사로 자리를 옮기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현재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애니메이션 제작에 여념이 없는 연필 스태프
회사를 더 이상 키우지 않고 그저 좋은 작품만 만들겠다는 일념이라지만 불만스러운 점도 있다. 일본 편애주의식 애니메이션 시장이 형성된 사실 말이다.
“무조건 일본 것이라면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아쉽습니다. 게임 쪽도 일부 그렇겠지만 애니메이션은 심각할 정도죠. 심지어는 교수들까지 나서서 찬양론을 펼칠 정도니까요”
이어서 안감독은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곤조 스튜디오에서조차 혀를 내두른
“지금 당장 일본으로 가도 엄청난 대우를 받고 스카우트 될만한 인물이죠.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 매체가 없는 탓도 있겠지만 국내에서 이 친구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할 뿐입니다. 일본에선 어떤 인물이 무엇을 맡았다고 팬들이 열광하지만 그보다 몇 배는 실력이 뛰어난 친구죠.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말이죠. (웃음)”
그림을 ‘길’로 택하려는 후배들에게 할 말은 없는지 궁금했다.
“애니메이터는 오로지 그림으로 모든 것을 얘기합니다. 혼자 하는 공부도 좋죠. 하지만 그림을 ‘길’로 삼으려는 생각이 있다면, 특히 남의 돈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려면 혼자 하는 공부보다는 제대로 된 스승과 동료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한 공부는 어떻게 하느냐… 단지 그림을 많이 그리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영화든 책이든 다양한 문화를 최대한 가까이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겠죠”
안감독의 말은 이어졌다.
“그림은 90%의 재능과 10%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그 90%란 노력을 할 줄 아는 재능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순수 애니메이션이든 게임이든 마찬가지 아닐까요?”
* 연필로 명상하기 History 1998년: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 <히치콕의 어떤하루> 국내외 유수 영화제 수상
1999년: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 <리플레이> 국내외 유수 영화제 수상
2000년: 독립 중편 애니메이션 <순수한 기쁨> 국내외 유수 영화제 수상
2000년 7월: 웹애니메이션 <천하무적 홍대리> 제작
2000년 10월: KBS TV특집 <보리와 짜구> 원화작업
2001년 1월: <누들누드 2> 원화 작감 작업 참여
2001년 11월: KBS TV시리즈 <아장닷컴> 콘티 감독
2002년 2월: KBS TV 시리즈 <모험왕 장보고> 제작
2002년 5월: 워너 브라더스 TV 시리즈 <Mucha Lucha School> 제작
2002년 7월: MBC 교육용 애니메이션 <내친구 두두리> 제작
2003년 2월: EBS TV 시리즈 <뽀롱 뽀롱 뽀로로> 콘티 작업
2003년 4월: KBS TV 시리즈 <수호요정 미셜> 콘티 작업
2003년 5월: 한미 합작 극장용 애니메이션 <위싱스타> 프리, 메인프로덕션
2003년 8월: 웹애니메이션 <요랑아 요랑아> 제작
2003년 12월: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 <파콘> 제작
2004년 9월: 뮤직비디오 <관&운> 제작 완성
2005년 1월: <루니아 전기> 게임오프닝 제작
2005년 3월: TV시리즈 <제트 레인저> 제작 착수
2005년 4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R> 게임오프닝 제작
2005년 10월: <고스트 X> 게임오프닝 제작
2005년 11월~현재: TV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차무혁 1년 후 애니메이션 제작착수
2005년 11월~현재: TV 특집영화, 출판만화 <콘트라 베이스> 제작 중
2005년 현재: 극장용 장편 <소중한 날의 꿈> 제작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