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게임개발자 리차드 개리엇(Richard Garriott)을 만났습니다. 엔씨소프트 내부에서 <타뷸라 라사>(Tabula Rasa) 시연을 했는데, 겸사겸사 기자들과 미팅을 가진 거죠. 내년에 드디어 <타뷸라 라사>가 나온답니다. 앞으로 무척 바빠질테고, 1년에 한번 정도 한국에 오는 그의 일정으로는 이번이 게임이 나오기 전, 한국 기자들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겠죠.
5년 LA의 눈부신 햇살이 기억 나네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텍사스에서 날아온 개리엇 형제는 김택진 대표와 함께 <타뷸라라사> 제작을 발표했죠. 참 오랜 시간이 걸렸죠. 아직 개발이 마무리되지 않아, 게임을 못 본 것은 아쉬웠지만 개리엇으로부터 직접 <타뷸라라사>와 게임 전반에 대한 생각을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좀더 찬찬히 이야기를 썼습니다. /디스이즈게임
리차드 개리엇(Richard Garriott)
RPG의 고전 <울티마>의 세계를 창조해 피터 몰리뉴, 시드 마이어와 함께 세계 3대 PC게임 개발자로 불리던 인물.
1977년 ‘Clear Creak’ 고등학교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공부를 시작하면서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1979년에 컴퓨터가게에서 애플 컴퓨터를 팔다가 애플 컴퓨터에 대해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그 해 여름이 끝날 무렵 <Akalabeth>라는 게임을 만들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이 게임을 보고 상점에서 팔 것을 권유하면서 그의 재능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Akalabeth>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퍼시픽컴퓨터컴퍼니에서 5.25인치 디스켓으로 판매를 시작해 3만 장 이상 팔렸다. 2000년 형과 함께 오리진시스템을 떠나 데스티네이션게임즈라는 개발사를 설립했고 다음 해인 2001년 E3에서 엔씨소프트에 전격 합류해 전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2001년 이후 엔씨소프트에서 북아메리카 총책임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으며 <타뷸라 라사>를 제작중이다. |
TIG> 언제 나오나?
서울에 와서 엔씨 내부적으로는 노트북으로 이미 시연을 했다. 내년 2~3월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클로즈베타 비슷한 테스트(Friends&Family Test)를 한 뒤 여름께 오픈베타 테스트를 하게 될 것이다. 현재 'final push'를 열심히 하고 있다. 아무리 늦어도 12개월 내에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겠다.
TIG> Tabula Rasa는 무슨 뜻인가?
원래는 프로젝트 이름이었다. 라틴어로 'blank slate'(빈 석판)을 뜻한다. 즉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울티마> 시리즈 등 판타지 게임을 많이 만들어봤다. 하지만 <타뷸라 라사>는 SF 장르다. 오리진을 나와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런 이름을 정했다. 게임 내에 있는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지구가 거의 멸망한 상태에서 유저들이 새로 시작하는 요소를 갖기 때문에 게임 이름과 잘 맞는 것 같다. 또 게임 내에서 아무 것도 안 쓰여진 타블렛에 성형문자를 박아 넣고, 그것들을 해석하는 것도 게임의 이름과 비슷하다.
(Tabula Rasa는 근대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에 의해서 널리 쓰이게 된 용어다. 그는 인간은 아무런 선유관념(≒이성) 없이 태어난다고 주장했는데, Tabula Rasa는 '백지'와 같이 아무 것도 안 적힌 채 태어나는 인간의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TIG> FPS 스타일이라고 하던데?
언뜻 보면 1인칭 슈팅게임처럼 보지만 실제 게임을 하면 RPG로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냥 방식은 FPS 요소를 많이 도입했다.
지금까지의 MMORPG는 굉장히 단순한 형태가 일반적이다. 마을에서 장비를 갖추고 미션을 받아서 사냥을 한다. 사냥을 통해선 경험치와 아이템을 얻고, 그 보상으로 레벨업이라는 혜택을 얻는다. 다시 마을로 돌아와 장비 재보강하고 미션 받고... 이런 과정의 반복이 기존 MMORPG였다.
하지만 <타뷸라라사>는 '긴장감 넘치는 전장'(high tention battle field)을 만들기 위해 FPS 요소를 도입했다. RPG는 전투를 할 때 상대를 보기보다는 화면 아래 데크(무기스킬바)에 시선을 두게 된다. 단축키를 사용해 버프를 하거나 힐을 할 뿐이다. 세상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인터페이스만 열심히 보게 된다. 반면 FPS 요소를 도입하면 타깃을 더 열심히 본다. 물론 FPS가 아니어서 정교하게 타깃을 찍을 필요는 없지만, 아래 데크보다는 상대들의 움직임을 더 봄으로써 몰입도를 높일 예정이다.
또 FPS에서나 볼 수 있는 ‘컨트롤포인트’가 있고 이것을 점령하게 되면 게임에 전반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타뷸라 라사>는 MMORPG다. 사냥방식에 FPS 요소가 가미됐을 뿐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MMORPG의 스타일을 따른다.
TIG> ‘로드 브리티시’ 게임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어떤 게임을 말하는 건가?
톨킨은 <반지의 제왕>을 쓰면서 '스토리'를 쓰기 전에 '세상'을 만들었다. 이를 위해 굉장히 많은 조사를 했다. 배경이 되는 신화, 등장하는 종족, 그들의 역사와 문화, 그들이 쓰는 언어 등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이뤄졌다. 게임도 훌륭하게 탄생하기 위해선 이와 같은 기본적인 바탕이 중요하다. 세상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내가 말하는 ‘로드 브리티시’ 게임은 <반지의 제왕> 같이 깊이가 있는 게임이다.
<울티마> 시리즈를 만들 때에는 ‘루닉’이라는 언어를 게임에 넣어 큰 호응을 얻었다. 이것은 미국 시장을 타깃으로 새롭게 만든 언어인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만, 한국사람들에게는 난해하다. <타뷸라라사>에도 새로운 언어가 들어간다. 이번에는 한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 모두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만들기 위해 조사했다. 이집트 상형문자도 공부했는데 전혀 쓸모가 없더라. 고대 중국 문자가 훨씬 좋았다. 그림에서 따와서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유저들이 꼭 이 언어를 숙지해야 할 필요는 없다. 게임 전반에 사용되겠지만 신비하고 풍부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일종의 성형문자와도 같은 ‘상징’으로 들어갈 것인데, 이것의 뜻을 알면 게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타뷸라 라사>는 판타지게임이 아니라 SF풍의 게임이기 때문에 좀더 치밀한 세계관이 필요했다. 판타지에서는 왜 마법이 나가는 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SF게임에서는 다르다. 물리적 법칙에 기반한 과학적 근거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로드 브리티시'는 원래 초등학교 시절 리차드 개리엇의 별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탓에 그의 발음에 영국식 액센트가 있었기 때문. 이후 <울티마>의 주무대인 브리티니아의 왕 캐릭터(리차드 개리엇)의 이름으로 쓰이면서 유명해진 용어다.)
TIG> SF는 처음 아닌가?
사실 초창기 <울티마> 시리즈에도 SF가 들어있다. 그때는 재미있는 요소는 몽땅 게임에 집어넣었을 때다. 성(城)이나 검 말고도 우주선도 있었다. 아버지가 NASA(미 우주항공국)의 비행사셔서 유니폼 로고도 박혀있고 그랬다. 4편 때부터 완전한 중세 판타지가 됐다. SF는 3D 뷰에서 가능할 것 같은데, 3D는 내 능력 밖이었다. 쿼터뷰 방식의 타일 베이스로 된 게임에서 공중에 떠있는 우주선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나.
그런데 이제 3D는 다른 프로그래머들이 짜주니까 SF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SF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판타지에서는 마법을 쓰는 원리 같은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지만, SF에서는 물리적 법칙 같은 과학적 설명이 있어야 한다. 텔레포트라던지, <스타워즈>의 '포스' 같은 슈퍼파워들이 등장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물리법칙에 기반한 논리적 근거를 위해 조사를 많이 했다.
<타뷸라 라사>에서는 '파이'(π=3.14159...)와 비슷한 수학적 비율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세계의 언어를 만든 사람들이 '파이'를 연구해서 정신적으로 소통할 수도 있고, 텔레포트하는 등 다양한 능력들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가상적인 혁신'(fictional breakthrough)이 게임 세계의 근거를 제시한다. 내 서재나 인터넷에는 이와 관련된 '허무맹랑한'(crazy) 주장들이 많다.
TIG> 현지화(localization)에 대한 요소들은 고려되면서 개발되나?
<타뷸라 라사>는 처음부터 현지화를 고려하면서 만들어졌다. 텍스트나 다른 요소들이 데이타베이스화 돼있기 때문에 쉽게 현지화를 할 수 있다. 캐릭터 역시 전세계 유저들이 호감을 가질 수 있는 형태로 창조됐다. 물론 한국 서비스를위해 엔씨소프트가 현지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타뷸라 라사>의 전세계 동시공개를 목표로 하지만 일정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다. 그것이 현지화 문제가 아니라 마케팅적인 측면이다. 현재 <타뷸라 라사>는 모든 언어가 출력되게 제작되고 있다.
TIG> 최근 SF MMORPG가 나오는 경향에 대해
현재는 중세 판타지를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게임을 만들 때는 중세 판타지풍의 RPG가 가장 쉬웠다. 하늘에 뜰 필요도 없으니까 기술적으로도 가장 쉬웠고, 기존 RPG 장르가 있어서 익숙한 게임구성요소를 제공해줬으니까. 그래서 가장 먼저 나왔고 주류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기술이 발달해서 <Auto Assault>(오토 어썰트)처럼 실시간으로 완전한 3D를 제공할 수도 있게 됐다. 물리적 법칙이 적용되는 공중전도 가능해졌다. FPS 게임들이 트렌드를 이끄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것은 판타지 세계를 구축하는데 한계를 느껴서가 아니라 다양한 소재의 게임들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TIG> 온라인게임에서 동서양의 차이 극복?
미국의 영웅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같이 덩치 크고 우락부락한 캐릭터다. 반면 아시아는 평범한 외모지만 정신적인 의지(inner will)로 성공하는 사람들을 영웅으로 선호하는 것을 알게됐다. 이런저런 차이들은 엔씨소프트가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많은 부분이 해결됐다.
하나 남은 문제는 PVP를 좋아하는 아시아 유저들의 성향과 몬스터 사냥을 좋아하는 서양 유저들의 성향 차이를 해결하는 것이다.
<타뷸라 라사>는 기본적으로 PVE 게임이다. 스토리텔링과 환경 변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물론 PVP 요소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서울에 있는 팀에서 PVP를 포함해 동양에서 성공할 수 있는 요소를 만들도록 맡겼다.
동양적인 요소도 서양에서 경쟁력이 있다. 대부분의 서양 유저들은 인터페이스나 그래픽 때문에 <리니지>를 오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단계를 넘어가면 공성전을 무척 좋아한다. 이런 부분을 좀더 다듬으면 서양 유저들도 좋아할 것이다.
TIG> <WOW>에 대해
<WOW>는 퀘스트를 통해 유저들을 계속 바쁘게 밀어내는 스타일이다. 경험치와 레벨업을 위한 장치로 퀘스트를 활용해 사냥을 계속 하도록 만든다. 레벨이 중심이 된 게임에서는 게임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제한이 많다고 생각한다. 2레벨 이상의 몬스터 지역은 갈 수 없다. 고레벨 몬스터들이 펜스처럼 유저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있다. 아, 개인적으로 나도 <WOW> 를 오랫동안 즐겼다. 정말 환상적인 게임이다. <디아블로>나 <WOW>를 보면 블리자드는 '도전'과 그에 따른 '보상'에 관련된 시스템이 가장 잘 맞추는 팀 같다.
그런 능력이 내게는 없다. 반면 우리 팀은 'believable space'(현실적인 가상세계)를 굉장히 잘 만드는 능역이 있다. 그런 게임은 1년에 한편 정도도 만나기 힘들다. <미스트>와 <아메리칸 맥기스 앨리스> 정도 기억난다.
<타뷸라 라사>는 나의 레벨과 몬스터의 레벨에 중점을 둔 게임이 아니다. 물론 아무나 원하는 곳을 갈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정 조건이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적어도 레벨이 낮은 유저가 게임세계를 탐험하는 데 제한이 있지는 않다.
TIG> 게임 개발에 대해?
예전에는 혼자 기획, 프로그래밍, 그래픽 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우리 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보다 뛰어나다. 그렇지만 나는 최고의 기획자(best designer)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건 절대로 내가 똑똑하거나 창의적이어서가 아니다. 철저한 조사(hard researh)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일부 기획자들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그것을 바로 게임에 집어넣는 경향이 많은데, 그건 아니다. 그것이 제대로 게임 내에서 구현되려면 더 깊이있는 조사와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