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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잡설] 한글화, 과연 WOW가 최선일까?

태무 2007-07-18 22:53:26

지난 주말에는 오랜만에 패키지 게임의 엔딩을 봤습니다. 항상 미뤄뒀던 <헤일로>를 플레이했지요. 대략 24시간을 꼬박 투자하고서야 엔딩을 봤네요. 감동이더군요. (^^) 그런데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이렇게 글로 옮겨봅니다. 먼저 알려둡니다만 이 글은 제 개인적인 사견으로, 디스이즈게임 전체의 의견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또 제 의견이 절대로 맞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순수하게 한 사람의 의견으로서만 받아들여주세요.

 

<헤일로>를 플레이하면서 다양한 무기나 탈것, 레벨 구성 등에도 감탄했지만, 정말 저를 놀라게 했던 것은 한글화였습니다. 메뉴, 자막의 한글화는 물론이고 유명 성우인 이정구씨(마스터치프)나 엄현정씨(코타나)가 더빙한 음성 한글화도 수준급이었지요. 게다가 적절한 한글화 수위도 참 좋았습니다. 명사나 대명사 등은 대부분 원문을 그대로 사용해서 게이머로 하여금 거부감 없이 <헤일로>의 세계로 빠져들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더군요. 예전부터 <헤일로>의 한글화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이던데, 직접 플레이해보니 ‘과연’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폰트 구성부터 음성까지, 참 한글화가 잘 된 게임 <헤일로>입니다.

 

한글화가 잘 된 것으로 칭찬 받는 또 다른 게임으로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이하 WOW)가 있습니다. 그러나 <WOW>의 한글화는 <헤일로>와는 많이 다르죠. 명사나 대명사에서도 어떤 부분은 한글로, 어떤 부분은 영어로 풀어냈습니다. 특히 <WOW> 이전에는 영어를 한글 발음으로 읽는 수준(차음)으로 표시했던 ‘기술’, ‘특성’까지도 한글로 번역한 것이 눈에 띄네요. 심지어 확장팩의 명칭인 <버닝크루세이드>도 <불타는 성전>으로 번역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저는 <WOW>보다는 <헤일로>의 한글화가 마음에 듭니다. 특히 위에서 얘기한 ‘한글화 수위’ 면에서 <헤일로>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왜냐고요?

 

우선 <WOW>의 한글화는 위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그 이전까지의 개념을 깨는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WOW> 이전의 한글화는 거의 한글의 음만을 차용하는 방식이었죠. ‘Fire Ball’은 ‘파이어 볼’로, ‘Wall of Ice’는 ‘월 오브 아이스’로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WOW>에서는 ‘Fire Ball’을 ‘불덩어리(화염구)’로, 'Wall of Ice'는 '얼음벽'과 같은 형태로 아예 번역을 합니다(대표적으로 예를 든 것입니다). <WOW>와 같은 한글화 방식에는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RPG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좀더 쉽게 <WOW>의 세계로 다가서도록 할 수 있고, 또 언어 사대주의에 빠져 무조건 영어로 표시해야 멋져 보인다는 선입관을 없애주는 훌륭한 시도죠. 그러나 저 같은 올드게이머에게는 오히려 헛갈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파이어볼은 파이어볼이지 불덩어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파이어볼이라는 단어를 단순 번역하면 ‘불덩어리’가 되지만, <WOW>에 등장하는 파이어볼은 단순히 ‘불덩어리'만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파이어볼이라는 단어에는 참 많은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죠.

 

  

, 한글로 예를 들어봅시다. ‘하늘’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파란색, 높음, 드넓음, 자유, 종교나 신적인 관점으로서의 하늘…. 하늘은 단지 ‘Sky’뿐만이 아니라 좀더 많은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늘’이란 단어를 번역할 때는 앞뒤 문맥과 상황에 따라 ‘Sky’, ‘God’, ‘Freedom’ 등 여러 가지 단어로 의역을 해야 하지요. 물론 Sky는 굉장히 일상적인 단어이고, Sky에도 위에서 말한 자유, 드넓음 등의 뜻이 숨어있기 때문에 하늘=Sky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파이어볼=불덩어리의 경우에는 조금 다릅니다. 판타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파이어볼이란 말 그대로 불덩어리일 뿐이지만, 판타지 팬이나 게이머에게는 그뿐만이 아니죠. 여태까지 경험했던 판타지소설과 영화, 만화, 게임에서의 여러 장면과 의미들이 모두 무의식 속에 숨어있고, 그 모든 것을 합쳐 ‘파이어볼’이란 말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는 문장을 만들어보면 더욱 확연해지죠. ‘태무가 불덩어리를 던집니다’라는 표현과 ‘태무가 파이어볼을 스펠링합니다’라는 표현, 또 ‘태무가 얼음벽을 시전해 깨쓰통의 불덩어리를 방어했습니다’와 ‘태무가 아이스월을 시전해 깨쓰통의 파이어볼을 방어했습니다’는 많이 다르죠. 이건 단순히 영어가 더 좋다는 개념이 아니라, 단어의 숨어있는 의미가 다른 경우입니다.

 

게다가 <WOW>는 모든 경우를 한글로 옮긴 것이 아니라, 한글화 담당자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한글화를 할지 그대로 둘지, 그 여부를 결정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게임명을 들 수 있겠네요. 왜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그대로 두고 <Burning Crusade>는 <불타는 성전>로 바꿨을까요? 또 무리한 한글화의 결과로 수많은 한자들이 ‘병음 표기’되지 않은 채 그대로 삽입됐습니다.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죠. 조금 나쁘게 얘기하자면 <WOW>의 한글화는 영어와 한글과 한자가 일정한 법칙 없이 뒤섞여있는 상태입니다(물론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는 아닙니다만).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WOW>의 한글화는 일반인들이 게임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단어나 문장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효과도 있다는 거죠.

 

스트라이더 아라곤. 성큼걸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러가지...

 

사실 이런 논란은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판타지의 아버지로 불리는 ‘J.R 톨킨’의 작품들은 국내의 여러 출판사에 의해 번역되어 출판되었죠. 그런데 여러가지 출판본을 두고 논란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서 ‘Strider’를 어떤 출판사는 ‘스트라이더’로, 어떤 출판사는 ‘성큼걸이’로, 어떤 출판사는 ‘전사’로 표시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독자들 사이에서 서로 어떤 것이 낫다고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Strider는 말의 쭉쭉 뻗는 걸음걸이뿐만 아니라 방랑자, 거인, 선구자 등 여러가지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또 공중파 TV에서 <반지의제왕>에 등장하는 Middle-Earth를 '지구'라고 번역한다거나, 빌보 배긴스를 '골목쟁이 빌보'라고 번역한다거나, 판타지소설에서 '블루베리' '라즈베리' 같은 주인공 이름을 '정금' 개암' 등으로 번역해 원문의 상큼한 느낌을 살리지 못했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지요.

 

판타지뿐만 아니라 IT나 게임, 스포츠, 영화에서는 이런 논란이 활발히 진행되어 왔습니다. 과연 MMORPG(Massively Multi 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를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으로 표기하는 것이 옳은가(이 경우에는 아예 Masively라는 단어의 번역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잘못된 번역입니다만), 혹은 Netizen을 누리꾼으로 부르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들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너무 지나쳤던 수문장(Goal keeper) 같은 경우는 이미 거의 사장되었죠. (^^;)

 

한글화 혹은 번역이란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를 최대한 익숙한 한글로 고쳐주는 작업입니다. 또한 게임의 경우에는 '오락물'이다보니 정확한 뜻보다 감성적인 느낌의 전달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원래의 느낌을 해치지는 않아야 한다는게 제 생각이에요.

 

다만 한국에서 개발되는 게임들은 되도록 한글로 그 느낌을 살려줬으면 합니다. 이영도 님의 <눈물을 마시는 새>를 보면 한글로 표현된 판타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 수 있죠. 이처럼 한글로 표현된 소설이나 게임이 많아질수록, 해외 게임을 한글로 번역할 때도 지금보다 훨씬 적절한 단어를 선택할 수 있을테고요.

 

, 여기까지가 제가 <헤일로>의 엔딩음악을 들으면서 떠올린 생각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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