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야구 게임을 미국에서 서비스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무렵, 온네트USA의 부사장 데이빗은 메이저리그(MLB) 담당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의 큰 미디어 그룹 중 하나인 폭스(Fox)에서 일했던 경험을 십분 활용하여 며칠 만에 담당자의 연락처를 알아 냈다. MLB의 본사는 뉴욕에 있지만 그 담당자는 샌디에고에서 사무실도 없이 혼자 일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데이빗의 말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몇 백만 달러의 거래를 담당하는 친구가 사무실도 없이 혼자 동떨어진 곳에서 일을 한다니… 혹시 속는 것 아닌 지 데이빗에게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데이빗은 이런 일은 미국에서 아주 흔하니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는 MLB 담당자와 미팅 약속을 잡은 다음, LA에서의 비즈니스 미팅을 마치고 샌디에고로 향했다. 그런데 미팅 장소와 시간도 나에겐 당황스러웠다. 미팅시간은 오전 9시였고 장소는 샌디에고 바닷가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던 것이다.
나는 ‘뭐 이런 미팅이 다 있나’라고 생각하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 바닷가 레스토랑에서 첫 미팅
한 20분 정도를 기다렸다.
키는 약간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남성이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다. 자기를 알렉스라고 소개한 그는 MLB 로고가 박혀 있는 명함을 나에게 건넸다.
그 때까지도 사실 그 친구가 진짜 MLB에서 일하는지 믿지 못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데이빗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처음부터 라이선스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본인 소개부터 해서 폭스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알렉스가 폭스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이야기를 나누면서 둘이 서로 깔깔 대고 웃는 것이 아닌가! 나는 도무지 웃을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웠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등장하고 둘이 말을 빠르게 하는 바람에 어느 것이 사람 이름이고 어느 것이 그냥 단어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나는 대강 눈치로 타이밍을 맞춰 가며 억지 웃음만 짓고 있었다.
‘언제 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데이빗이 살짝 일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옛날 유니폼도 우리 게임에 쓸 수 있니?”, “그럼, 당연하지.” 이런 대화가 지난 후에는 다시 미국 야구 선수들 이야기로 넘어갔다.
“누가 잘하니”, “그 친구는 힘만 세다”는 등 또 둘이 한참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분위기를 봐서 데이빗이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아주 부드럽게 하나씩 물어보기 시작했고, 알렉스도 부드럽게 대답해 줬다. 나는 그냥 옆에서 장단이나 맞추며 웃어 주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미팅을 했다. 알렉스와 데이빗은 아주 친한 사이가 된 듯하게 서로 웃으면서 계속 연락하자며 헤어졌다.
■ ‘미국통’이 필요한 이유를 깨닫다
데이빗은 알렉스가 떠난 후 나에게 생각보다 미팅이 수월하게 진행된 듯하고, 알렉스가 가장 까다로운 절차라고 말했던 내부 평가팀의 우리 게임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게 나와서 조건만 맞으면 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MLB와 계약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기분이 좋았지만, 이 미팅을 함께하면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만일 내가 MLB 담당자와 협상을 진행했으면 이만큼 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렇지 않다. 이들도 아무리 비즈니스라고 하더라도 서로의 공통 관심사부터 이야기하며 서서히 핵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가끔 상사의 ‘뒷담화’를 나누기도 하고, 동료의 비밀도 주고 받으면서 코드를 서로 맞춰 본 후 괜찮다 싶으면 좋은 기분으로 협상하고,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딱딱한 비즈니스 미팅이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2년밖에 살지 않은 내가 미국 업계의 뒷 이야기이며, 미국 프로야구 역사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게임을 소개하고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이야기하는 것밖에 없다. 아무래도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해야 했을 것이다.
미국 비즈니스를 잘하기 위해선 현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리고 나와 코드도 맞는 믿을 수 있는 친구와 함께 일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 미팅이 있기 전까지는 벤처캐피탈 관계자들이 온네트USA의 약점이라고 지적했던 ‘미국통’이 없다는 말을 잘 수긍하지 못했었다. 내가 게임을 잘 알고 있고, 익히 알고 있는 한국의 좋은 개발사로부터 좋은 게임만 가져 오면 잘될 것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MLB와의 첫 미팅에서 나는 내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을 알아 버렸다. 그리고 데이빗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진 적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 뉴욕에서 맞은 추석
MLB와 첫 미팅을 하고 4개월이 지나서야 우리는 최종안에 합의할 수 있었다.
그 4개월 동안 데이빗과 알렉스는 수많은 메일과 전화, 그리고 미팅 등을 통해 안건을 하나씩 꼼꼼하게 협의했다. 마침내 알렉스가 우리를 MLB의 본사가 있는 뉴욕으로 초대했다. 미국 사업 시작 3년 만에 미국의 메이저 업체라고 할 수 있는 MLB와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맺는 날이 된 것이다.
나와 데이빗은 밤 비행기를 타고 아침 일찍 뉴욕에 도착했다. 뉴욕은 내가 살고 있는 산호세와는 분위기도 다르고 호텔 값도 매우 비싸다. 개인적으로 뉴욕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은 달랐다. 호텔에 간단히 짐을 푼 후 젊은이들이 많이 다닐법한 건물에 위치한 MLB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의 마중을 나온 알렉스가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많은 MLB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걸 보며 내가 예전에 알렉스가 MLB 직원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알렉스는 파트별 직원들을 우리에게 한 명씩 친절하게 소개해 줬다.
MLB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조직이었다. 이 곳에서는 MLB의 공식 사이트인 mlb.com을 비롯해 모든 MLB 구단의 홈페이지도 관리하고 있으며, 각종 온라인 라이선스에 대한 업무도 모두 맡고 있었다.
알렉스의 상사인 케니도 전형적인 미국 신사 스타일이었다. 그는 우리와 일하게 되어서 기쁘다면 기대가 많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우리는 MLB 소속 전문 사진작가 앞에서 사인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MLB 사무실에서 알렉스, 데이빗과 함께 기념 사진.
■ 양키즈 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
계약식을 마친 알렉스는 기왕에 뉴욕까지 왔으니 야구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고, 태어나서 야구장을 한 번도 안 가 본 나는 흔쾌히 응했다.
산호세와 달리 지하철이 잘 갖춰진 뉴욕에서 지하철을 타고 양키즈 구장으로 향했다. 알렉스는 양키즈 구장이 신축을 하게 되어 오늘이 예전 양키즈 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가 있는 날이라면서 나를 보고 “You’re so lucky.”라고 했다.
처음 가 본 미국의 야구장은 생각보다 훨씬 역동적이었고, 야구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매우 흥분된 것처럼 보였다. 특히 그날은 역사적인 게임이어서 그랬는지 구장이 관객으로 가득 찼다. 나는 그날 야구장에 온 모든 관객들이 미래의 우리 고객이 될 거라는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7회 정도까지 관람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하늘에 크게 떠 있는 보름달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날이 바로 추석이었던 것이다. 멋진 계약을 성사시키고 또 역사적인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돌아오며 본 그 보름달은 나에게 왠지 큰 행운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았다.
난 운이 좋게도 양키즈 옛 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관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