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나는 종로에서 일했다. 신문사는 그 전해 나에게 게임을 맡겼다. 수습 시절 선배들 PC의 바이러스를 몇 개 잡은 전력 때문이었다. 몽키 바이러스와 V3 디스켓 여파로, 지금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다.
종로로 출근했지만, 나는 여전히 신림동에 살았다. 신문사를 계속 다닐 지 확신하지 못했다. 주로 신림동 고시촌에서 놀았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아직 고시생이던 석호, 재롱디푸와 비쥬에서 J&B Jet를 마시며 농을 주고 받았다.
당시 신림동은 PC방이 속속 늘어나고 있었다. 규모도 커져갔다. 녹두거리를 쭉 올라오면 나오는 사거리에 크고 깔끔한 PC방이 있었다. 퇴근길 자주 그 곳을 들렀다. PC방 사장 아저씨와 친하게 지내며 정보도 많이 얻었다. 거기서 나는 초창기 몇몇 온라인게임이 팡팡 터지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처음엔 한 줄 정도에서 앉아하던 게임이 이튿날 두 줄, 세 줄로 늘어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바로 게임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기사를 썼다. 게임은 다시 화제가 됐다. 신림동 PC방은 당대 게임판의 표본이었다. 나의 은밀한 출입처였다.
2000년 봄 그곳에서 쑥쑥 불어나던 게임이 하나 있었다. ‘한게임’이었다. 2000년 3월 1일, 한게임은 동시접속자 수가 1만 명이 넘었다. 굉장한 숫자였다.
한게임은 지금은 카카오톡 의장으로 유명한 김범수 대표가 만든 회사다. 삼성 SDS를 그만 둔 그는 한양대 근처에서 ‘미션넘버원’이라는 PC방을 하며 게임 개발을 준비했다. PC방에서 5,000만원의 종잣돈을 마련한 뒤, 1999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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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 테트리스, 포커, 바둑 등을 담은 한게임은 1999년 12월부터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다. 선발주자는 아니었다. 고스톱닷넷 등 유사 사이트가 건재했다. 한게임은 PC방과 '딜'을 했다. PC방 관리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는 대신, 한게임 아이콘을 초기화면에 띄우는 방식이었다. '신의 한 수'였다. 현재 마음골프 대표인 문태식이 관리프로그램을 개발했고, 게임인재단 이사장인 남궁훈이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그 결과 한게임은 초기 웹보드게임 시장에서 굳건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한게임이 1만 동접을 기록하기 3년 전, <첨밀밀>이 국내에서 개봉했다.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 비디오 테이프로 봤다. 앞서가는 장만옥과 뒤쫓는 여명이 만남과 이별을 반복했던 영화. 엔딩 장면에서 우연히 재회하게 된 두 사람, 장만옥의 미소가 예뻤다. 공교롭게도, 영화 속에서 주인공 두 사람이 (서로 모르는) 인연을 처음 맺은 날도 1986년 3월 1일이다.
서극의 초기 영화 <상하이 블루스>만큼 좋아했다. 비디오 테이프도 샀다.
영화를 세 번 봤는데, 주인공 둘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다. 암흑가 보스 표형 역할로 나온 증지위다. 그와 장만옥의 사랑이 더 묵직하고 넉넉했다.
2005년 TIG 오픈 직전, 대만에 갔다가, 등려군 CD를 샀고, <월량대표아적심>을 가끔 듣곤 했다. simon :)
- 2000년 3월 1일 한게임 동시접속자 1만 명 돌파
- 1997년 3월 1일 <첨밀밀> 국내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