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이었다. 20년의 시차를 두고, 두 젊은이가 하늘로 돌아간 것은.
1989년 3월 7일, 신문 기자이자 시인이던 기형도가 졸했다. 첫 시집이 출간되기 전이었다. 2009년 3월 7일엔 모델 출신의 연기자 장자연이 스스로 목을 맸다. 연기자로 꽃을 피우기 전이었다. 둘 모두 스물 아홉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 문학공간이라는 학회에서 기형도의 시를 처음 만났다. 요절한 시인은 특권을 갖는다. 시가 더욱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 시절 나는 안도현, 황지우, 이성복, 박노해, 조정권 등을 좋아했다. 하지만 술을 당겼던 것은 늘 기형도였다. 80년대의 비극적인 삶과 그 안에서 일그러진 쓸쓸한 자아의 초상은 나 같은 얼치기까지 멜랑콜리하게 했다.
그런 사람이 나 말고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장미빛 인생> <봄날은 간다> <빈집> <질투는 나의 힘> 같은 영화는 모두 시집 한 권에서 나온 제목들이다.
시대의 아픔을 대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감수성이 예민했고, 명석했던 기형도는 자기의 방식으로 그 시대와 마주했다. 망월동을 찾아가 울었지만 거기에 머물지만은 않았다. 현실을 아파하고, 망설이고, 회의하며 시를 썼다. 그의 시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그가 생을 마감한 곳은 종로에 있던 파고다 극장이다. 그는 신문사를 나와 인사동에서 혼자 맥주를 조금 마신 뒤, 극장에 갔다. 심야영화 시간에 뇌졸중으로 죽었다. 신문사 시절 나도 늦은 밤 그 길을 많이 걸었다. 가끔 시인을 생각했다.
20년 뒤 죽은 장자연은 나와 한 사람만 건너면 연결된다. 그 사람은 그녀를 괴롭게 했던 매니저 K씨다. 신문사 시절 1년 간 영화를 취재했다. 영화를 맡은 지 얼마 안 돼 K씨가 신문사로 찾아와 인사했다. 세련되고, 싹싹하고, 능글능글한 사람이었다. 연예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매니저 중 한 명이었다.
선배는 그를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대형 회사의 CF 모델 계약을 잘 따내는 검은 커넥션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선배의 말을 잘 따랐다.
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2009년 3월이었다. 자필로 밝혀진 장자연의 편지에는 그에게 당한 수모가 아프게 적혀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힘이 센 신문사인 조선일보와 관련된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IT 업체와 금융업체 임원 이야기도 있었다. 젊은 여자 연예인의 자살과 성접대 파문은 전국민적인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정작 밝혀진 것은 별로 없다. 죗값을 치른 이도 거의 없다.
시간은 흐지부지 흘렀고, 몹쓸 짓에 관계된 이들은 무혐의거나, 집행유예거나, 보석으로 모두 풀려났다.
기형도가 살았던 세상과 장자연이 살았던 세상 사이에는 20년이 있다. 우리 사회는 20년 동안 얼마나 나아졌을까? 장자연의 졸 5년 뒤, 생활고에 내몰린 세 모녀의 자살 사건 등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형식은 자살이지만, 실체는 사회적 타살이다.
기형도가 살아 있다면, 우리 시대를 어떻게 적었을까? /시몬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