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첫 번째 간 해외 게임전시회는 도쿄게임쇼였다. 현해탄을 건넜다. 두 번째는 E3였다. 태평양을 건넜다. 2000년이었다. 아직 온라인게임이 미국에서는 '듣보잡'이던 시절이었다. 운이 좋겠다. 한 PC패키지 게임회사가 스포츠서울 김진욱 기자와 나를 초청해줬다.
제대 후 복학하기 전, 미국 동부를 여행한 적은 있지만, LA는 처음이었다. 햇살이 참 따가웠다. 줄줄이 늘어선 키 큰 야자수들이 무척 신선했다. 90년대 중반 방영됐던 SBS 시트콤 <LA 아리랑>에서 봤던 장면을 맨눈으로 처음으로 만났다. 마냥 신기했다.
E3는 'Electronic Enetertainment Expo'의 약자다. E가 3번 나와서 'E3'라고 했다. 1995년 5월 11일부터 개최됐다. 첫 회부터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과 세가의 새턴, 닌텐도의 버추얼보이 등, 주요 콘솔이 대거 전시됐다. 단숨에 미국 최대의 게임 전시회가 됐다. 현재는 독일 게임스컴, 일본 도쿄게임쇼와 함께 세계 3대 게임쇼다. 콘솔만 한정할 경우, E3에서 신작을 공개하고, 게임스컴에서 플레이 버전을 공개하는 패턴이 생겼다.
촌놈에게 2000년 처음 갔던 E3는 모든 게 흥미진진했다. 넓은 전시관과 다양한 사람들, 예쁜 모델들. 전시관 내외의 분위기가 신기했다. 지금도 확실히 기억나는 건 메인 전시관 건너편 주차장에 있던 GOD Games의 부스다. 그 방탕한 분위기란. 그 곳은 21세 이상만 출입이 가능했다. 맥주와 안주가 무한 제공됐다. 담배를 피워도 됐다. 교복을 입은 모델들이 입장을 관리했다. 문신을 새긴 모델들이 섹시했지만, 거칠고 무서웠다. 동양에서 온 초짜 기자는 모든 게 신기할 뿐이었다.
2000년 이후 E3를 생각보다 자주 갔다. 현장에서 보는 한국 기자의 수도 늘었다. 한국 온라인게임 회사들의 출현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2001년에는 NC가 주인공이었다. <울티마 온라인>을 만든 리차드와 로버트 개리엇 형제가 NC에 합류했다. 미국 매체들도 무척 놀랐던 때였다. 나도 현장에 있었다. 카우보이 모자와 부채가 기억에 남는다. 산타모니카 해변을 걸었다. 어바인의 어떤 개발자 집에서 밤새 맥주를 마셨다. 2001년 E3는 아직까지 연이 닿는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이후에는 웹젠이 두드러졌다. <뮤>의 성공 이후 웹젠은 미국시장 진출에 매우 공격적었다. E3를 통해 한국과 미국에 이를 어필했다. 가장 최근에는 LA에 미국 지사가 있는 넥슨이 E3에서 가장 두드러진 한국 업체였다. <마비노기 영웅전>을 미국에서 론칭하기 전이었다. E3 기간 꽤 큰 파티도 열 만큼 적극적이었다. 많은 미국 회사들이 그 곳을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흐름은 현재는 끊겼다. E3는 한국 게임회사들에게는 별 영양가 없는 행사가 됐다. E3의 주요 포커스는 예나 지금이나 콘솔게임이다. 미국 온라인게임 시장은 기대한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한국 온라인게임 회사들의 미국 공략도 기대에 못 미쳤다. 한국 회사들이 E3에 나설 이유나 여유가 없어졌다.
E3는 1995년 1회 이후 2006년까지 게임 미디어나 업계 관계자 외에도 일반 관람객들의 입장을 허용했다. 행사 규모도 매년 확장됐다. 하지만 2007년, E3를 주최하는 ESA에서 전시자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행사 규모를 크게 축소했다. 2007년과 2008년에는 'E3 비즈니스 서밋'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됐다. 게임 미디어와 비즈니스 관계자 외에는 입장을 제한했다. 이로 인해 방문자 수가 대폭 감소했다. 게임업계에서도 비판이 이어지게 됐다. 디스이즈게임도 E3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ESA는 2009년부터 원래 방식으로 행사를 복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