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 17일, 리차드 개리엇이 엔씨소프트에 합류했다.
세계적인 뉴스였다. 리차드 개리엇은 (지금은 영 아니지만) 90년대 시드 마이어, 윌 라이트와 함께 '세계 3대 PC게임 신(god)'으로 언급될 정도로 지명도 있는 인물이었다.
한국은 아직 월드컵을 개최하기 전이었다.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한국 게임의 미국 내 지명도는 제로에 수렴했다. 엔씨소프트는 그야말로 '듣보잡' 회사였다.
세계적인 거장이 그런 회사에 합류한다는 '믿기지 않는' 뉴스는 2001년 E3를 발칵 뒤집어놨다. 나도 운 좋게 그 뒤집힌 현장에 있었다. 엔씨소프트의 김택진과 송재경은 오스틴에서 날라온 카우보이 모자를 썼다. 리차드와 로버트 개리엇 형제는 한국에서 만든 부채를 들고 있었다.
그날 그들은 따끈따끈한 계약서에 사인했다. 엔씨는 미국 게임업계 메인스트림에 진입했다. 리차드 개리엇은 새로운 MMO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이 '뜬금없는' 계약의 시작은 2001년 2월이다. EA 덕분이었다. EA는 다 잘 먹는 회사(Eat All)이기도 하지만, 토하기도 잘 하는 회사다. EA에서 <울티마 온라인 2>를 만들던 개발팀이 대규모 해고를 당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당시 MUD 개발자들의 소통공간이던 'mud-dev'를 통해 이 사실을 알렸다.
"팀 단위로 움직일 수도 있다. 관심 있는 사람은 연락달라."
mud-dev를 받아보던 송재경은 '관심 있는 사람'이었다. 엔씨소프트는 99년 대만에서 기대 이상의 '대박' 성공을 거뒀다. 자신감이 넘쳤다. 해외 진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미국은 게임의 본토였다. 엔씨 경영진은 베스트바이(미국 최대 전자제품 유통업체)에 한국 게임 패키지가 진열되는 부푼 꿈을 꿨다. 송재경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미국은 거대한 벽이었다. 엔씨와 <리니지>는 듣보잡이었다.
사람을 뽑는 것부터 힘들었다. <리니지>의 성적은 우울했다. 돌파구가 절실하던 때였다.
엔씨는 바로 연락을 취했다. <울티마 온라인>의 핵심 개발자 스타 롱과 통화가 됐다. 오스틴에서 보자고 약속했다. 엔씨는 지체하지 않았다. 김택진, 송재경, 김정환은 3월 초 텍사스 오스틴으로 날아갔다. 약속 장소를 찾아갔다. 리차드 개리엇의 집이었다.
리차드 개리엇은 EA에서 나온 뒤 1년 간의 동종업계 취업금지 시기가 끝나던 참이었다. 그의 형 로버트는 게임 비즈니스 영역에서 경력이 많은 사람이었다. 따로 사람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40명 가량의 <울티마 온라인 2> 멤버들을 바로 끌고 올 수 있었다.
엔씨 멤버들과 개리엇 형제는 그날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2개월 간 LA와 서울, 오스틴 사이에서는 계약조건을 놓고 매일 전화가 오갔다. 양측의 변호사들은 이것저것을 검토하고, 조율하고, 또 검토했다.
계약서가 가까스로 완성된 것은 E3 바로 직전이었다. 계약서 완성본은 기자회견 당일날 배달됐다. 양측은 LA 컨벤션센터 부근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 현장에서 진짜 계약을 맺었다.
엔씨는 약 460억 원에 리차드 개리엇과 개발팀을 인수했다. 단숨에 전세계적으로 지명도 있는 회사가 됐다. 미국 주류 게임업계에 네트워크를 확보했다. 그날 이후 엔씨는 개리엇을 앞세우고 미국 내 많은 개발사들을 방문했다. 미국에서 개발되던 모든 MMO를 구경할 수 있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해결했다.
리차드 개리엇은 여러가지 큰 생채기를 남기고 엔씨를 떠났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겠다. 결과적으로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는 선택이었다.
당시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엔씨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다른 선택이 없다에 한 표다.
좀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고, 확실하게 관리하는 문제와 별개로, 그 후 13년이 지났지만, 당시 엔씨가 처했던 상황에서 미국 메인스트림에 진입하는 데 더 나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 이와 관련돼 예전에 쓴 칼럼이 있다. 미국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엔씨와 넥슨의 노력에 관한 내용이다. 이 칼럼의 전망은 완전히 빗나갔다. 미국은 그만큼 어려운 시장이다.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