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사람들이 어떻게 온라인 서비스를 썼을까?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사람들은 텍스트만으로 온라인 서비스를 이용했다.
'터미널'이라 불리는 지금의 윈도우 콘솔이나 옛날의 컴퓨터 DOS 화면 같은 곳에 글자를 써놓고, 컴퓨터 저편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 모뎀을 이용한 'PC 통신'은 본격적으로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 사람들이 지역을 뛰어넘어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1986년 11월 1일 한국경제신문사에서 '한국경제 프레스텔'이란 서비스를 시작했다. 자사 신문의 콘텐츠와 함께 여러 뉴스를 보여주는 서비스였다. 뉴스 콘텐츠와 함께 서비스되던 채팅방과 게시판 서비스가 큰 인기를 끌었다. 무료서비스인 덕에 가입자 수가 점점 늘어났다. 이듬해 '한국경제 KETEL'로 이름을 바꾸었다.
KETEL의 가입자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운영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KETEL은 유료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91년 12월 한국통신과 합작으로 한국PC통신을 설립했다. 1992년 2월 18일 전격적으로 유료화를 발표했다.
이용자들이 반발했다. 유료화 자체보다는 그 방식에 대한 이의 제기였다. 요금의 100%를 신용카드로 선납하는 방식에 대다수가 학생이던 이용자들이 반발했다. KETEL 내 60여 개의 동아리 지기들이 모여 선납입 반대, 지로결제, 학생할인 등을 제안했다. 한국PC통신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진행했다.
KETEL 이용자들은 2월 24일부터 한국PC통신 사옥 앞에서 촛불집회를 벌였다. 최초의 촛불집회였다. 이후 '동호회협의회'는 한국PC통신과 협상을 통해 유료화 정책에 이용자들의 의견을 상당히 반영시켰다. 5월 1일부터 '코텔'(KORTEL)이라는 이름으로 유료화가 시작됐다. 7월부터는 '하이텔'이란 이름으로 서비스를 이어갔다.
하이텔은 천리안과 함께 90년대 초 PC통신 문화를 이끌었다.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모니터 화면에 등장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하이텔에서 생긴 개오동(KGA)와 게임제작자동호회(GMA)는 이후 한국 게임 산업과 문화에 큰 영향울 줬다. 개오동에서 시작된 게임 제작 세미나는 게임제작자동호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게임제작자동호회는 아마추어 개발자의 커뮤니티 역할과 함께, 급성장하는 PC 패키지 게임 산업의 인력풀이기도 했다.
김학규, 김동건, 이은석 등 쟁쟁한 개발자들이 게임제작자동호회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지식을 나누었다.
한편, 하이텔의 소설게시판에는 <퇴마록>이나 <드래곤라자> 같은 연재소설이 등장해 장르문학에 새로운 파장을 불러왔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이 대중화되고 텔넷으로 PC통신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인터넷으로 이용자 문화의 중심이 옮겨갔다. PC통신의 마니아들은 2007년까지도 가상터미널을 통해 하이텔에 접속했다. 이용자수가 적어지며, 하이텔을 운영하던 KTH는 터미널 접속 서비스를 중단했다. 포털사이트 '파란'으로 통합해 계속 게시판 서비스 등을 가져갔으나, 2012년에는 그마저 중단했다.
90년대 IT 문화의 중심축이었던 하이텔의 흔적과 기록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