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 청두에 '서남민족대학'이라는 학교가 있다. 4년제 대학교이고, 학교 이름이 주는 느낌처럼 소수민족 학생들이 특히 많았다. 그 소수민족 중에는 조선족도 적지 않았고, 조선족의 주요 근거지가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같은 동북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비행기로 6시간 이상 걸려야 올 수 있는 이곳 쓰촨성 청두까지 유학을 온 친구들도 나름 각각의 사연이 있다 할 수 있겠다.
흑룡강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현경준이라는 친구도 어찌어찌하다보니 그곳까지 흘러오게 됐다. 청두 흑룡강 조선족 커뮤니티에 리더급이라는 사실, 그리고 컴퓨터공학을 전공해서 게임에 대한 용어를 좀 더 많이 이해할 것이라는 추측(?), 마지막으로 한국 표준어를 정확하게 구사한다는 점 때문에 사천문화매체대학에 채용되어 정식으로 모험왕 김두일 선생의 통역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흔히 어떤 계기로 인생의 진로가 뒤바뀌게 된다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좋은 점은 한국에서 온 그와 함께 하는 삶의 순간순간이 워낙에 다이내믹해서 인생이 무료할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재미있었다는 점이었다. 나쁜 점은 모진 놈 옆에 있다 보면 함께 고생한다는 옛속담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야무지게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현경준 군은 그때 그를 만나게 된 인연으로, 홍콩에 있는 고모부의 무역회사에서 관리직 직원으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던 순탄한 인생 대신 전혀 관심없던 게임업계에 들어와서 제대로 모진 풍파를 겪어가면서 살아가게 된다. 필자 입장에서는 중국에 가서 건진 가장 확실한 사람이라 단언할 수 있다.
후일담이지만 그는 <전민기적>(뮤 오리진)의 개발사인 북경 천마의 리우후이청 사장 같은 사람이 한국게임과 한국시장에 대한 것을 수시로 자문 구할 정도로 한중 게임업계에 대단한 전문가로 성장했으며 아직까지 필자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때 그를 만난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당시 나이 8세의 꽃다운 아니 심하게 어렸던 김유정 양은 서울의 모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빠와 엄마 손을 붙잡고 영문도 모르고 중국 쓰촨 땅으로 가야만 했다.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외국인 친구들과 많이 사귈 수 있는 좋은 학교로 전학을 시켜준다고 해서 기분좋게 따라 갔는데 비록 아빠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는 실상이 매우 달랐다.
넓은 집은 맞지만 그 집은 매우 낡았고, 심지어 이상한 벌레들이 기어 다녔다. 외국인 친구들이 많은 학교는 분명 맞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외국인은 유치원에서 배운 영어 몇 마디를 써 먹을 수 있는 금발머리의 외국인이었지 말이 한마디도 안 통하는 똑같이 생긴 중국인들만이 있는 학교는 아니었던 것이다.
유정이는 충조우 중심가에 있는 '학부가소학교'라는 곳에서 개교 이래 60년만에 처음 맞이하는 외국인 전학생이었다. 그 학교의 고지식하게 생긴 교장은 한국과 북한을 구분조차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정이가 처음 전학오던 날 전교생을 모아놓고 마오쩌뚱과 김일성이 함께 항일 유격 전쟁을 벌였고, 그 인연으로 중국 팔로군이 새롭게 거듭난 인민해방군이 한국전쟁 참전해서 양국의 의리를 지켜나갔다는 황당한 내용의 연설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유정이의 담임선생님은 씨에민(사민) 라오스(선생님)였는데 필자의 와이프와 동갑내기 여성이었고, 당시 한국드라마에 완전 심취해 있었다. 유정이가 중국의 보통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 과정은 그 지역에서 전례가 없던 일인지라 어쩔 수 없이 다소 복잡한 편이었는데 이른바 ‘떠넘기기’라는 전세계 공무원들에게 전가에 보도격인 방법을 통해 이뤄졌다.
사천매체대학의 왕총장이 청두교육청 고위 공무원에게 부탁했고, 내부에서 고위직에서 하위직으로 한바퀴 돈 후에 청두교육청 공무원이 충조우교육청 공무원에게 부탁했으며 여기서도 한바퀴 돈 후에 충조우교육청 공무원이 학부가소학교장에게 부탁하는 여러 과정과 절차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입학을 허가받았다.
교장이 1학년 선생님들을 모두 모아놓고 ‘한국에서 온 학생을 누가 받겠는가?’라고 했을 때 <대장금>, <천국의 계단>과 같은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있던 씨에 라오스가 가장 먼저 손을 번쩍 드는 것으로 복잡했던 유정이의 입학과정이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중국에서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 꽌시.
이후 어린 김유정양은 매일 방과 후 (대학에서 어문을 전공했다던) 씨에 라오스와 한 시간씩 중국어 과외를 (돈도 안 받고) 별도로 받는 행운(본인에게는 지옥)을 누렸으며, 그 결과 1년여 만에 쓰촨 할머니의 지역 사투리까지 이해하는 수준의 중국어 능력을 키우게 된다.
한편, 씨에 라오스의 남편은 잘나가는 의사였다. 충조우 중심에 있는 충조우 제2병원 방사선과 수석 레지던트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 병원의 원장이었고 어머니는 유명한 중의사(한의사)였다. 즉 지역의 유지로 한마디로 꽌시가 매우 좋았다.
신기한 일은 그런 대단한 사람이 매일 퇴근 후 시장에 가서 장을 본 후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 오해대로 결코 그가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게 그 지역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맛벌이를 한다면 그리고 집에서 밥을 먹는다면 반드시 남자가 요리를 해야 하는 이상한 전통 말이다.
중국의 남방지역에서는 남자가 집안일을 하는, 한국사람으로서는 다소 이해가 어려운 전통이 지금까지도 쭉 유지되고 있다. 필자는 한국 남자와 중국남방 여자의 결혼은 그런 측면에서 비추하는 편이다. (아, 본인이 한국 남자로서 평소 요리를 즐겨한다면 좋은 만남이 되겠지만 말이다.)
우리 가족은 수시로 그들 가족과, 혹은 그들이 만나는 지역 유지격인 고위층 경찰간부, 의사, 사업가, 여타의 고급공무원 등과 식사 등을 하며 교류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 가족이 겪는 어떤 사소한 문제(그 동네에서 살다보면 생각보다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 편이다)까지도 나서서 해결을 해 주었다. 이게 중국생활을 하는데 얼마나 큰 행운이자 유리한 점이었는지는 그 당시에는 미처 몰랐다.
나중에 상하이로 이사 오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쨌든 유정이가 씨에 라오스를 만나게 됨으로써 얻게 된 행운이었고 당시 우리 가족의 생활이 적응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중국어 능력향상이 가장 큰 확실한 소득이었다.
이렇듯 불운과 행운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공존하는 법이라 처음에 가서 모든 것이 막막해 보이던 쓰촨 생활이 운 좋게도 좋은 인연들과 함께 하게 하면서 생각보다 빨리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 온라인게임 시장의 최고는 누가 모라고 해도 <미르의전설>이었다. 중국의 온라인게임 시장은 쉽게 이야기하자면 한국 온라인게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대표작이 바로 <미르의전설>이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최초 동시접속자 10만 돌파부터 이후 모든 기록이 다 이 게임을 통해 만들어졌다. 단, 100만 돌파부터는 모든 기록의 공이 텐센트로 넘어가긴 했다.
2003년도에는 <미르의전설> 하나의 게임이 중국온라인게임 시장 점유율 60%를 차지했고 한국산 온라인게임들의 점유율을 합하면 80% 이상을 차지하는 놀라운 현상마저 벌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자국산업보호라는 측면에서 중국 정부에게 한국산 게임들이 직접적인 견제를 받는 이유로 작용하게 된다. 흔히 온라인게임을 서비스하기 위해 받는 판호(라이선스)라는 것이 있는데 중국정부는 이 판호를 이용해서 한국 게임의 허가 자체를 아예 해주지 않는 정책을 펼치는 방법으로 한국게임의 수입을 막았다. 가령 판호가 나오는데 중국산 게임은 3개월, 한국산 게임인데 운영사가 힘이 있으면 6개월에서 1년 사이, 한국 게임인데 운영사가 힘이 없으면 1년이 넘어도 나오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2000년 초중반 이후에 넷이즈의 <몽환서유>, 퍼펙트월드의 <완미세계>, 정도의 <정투온라인> 등이 빅히트를 하면서 중국 회사들이 자리를 잡게 되고 MMORPG 분야에서는 한국 게임을 능가하게 되는 반전의 계기가 만들어졌다. 중국의 기업의 로비와 정부의 규제 정책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만약 한국에서 게임물 등급위원회에서 게임을 외산이냐 국산이냐에 따라 심의에 차등을 둔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 것인지가 추측조차 안된다는 것을 감안할 때 확실히 중국 정부에서는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한편 한국 게임인데 최초로 건너온 캐주얼 장르인지라 인기를 끌던 작품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오디션>과 <카트라이더>가 있었다. 필자가 쓰촨에 있던 당시 <오디션>은 중국 최고의 캐주얼게임이었다. 전체 온라인게임 순위 3~4위권을 유지하던 시절이었다. 가끔 한국으로 이메일을 보내기 위해 동네 PC방에 가면 가장 많이 보였던 게 바로 <오디션>을 하던 젊은 처자들이었다. 젊은 여성들은 80%가 <오디션>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20%가 텐센트에서 만든 짝퉁 <오디션>인 <QQ현무>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현상은 약 2년 후에 <QQ현무>가 <오디션>을 압도하는 것으로 상황이 바뀌게 된다. 텐센트는 당시 막 떠오르는 온라인게임 운영사로 <던전앤파이터>, <크로스파이어> 등 한국산 제품들과 <QQ현무>, <QQ레이싱> 등 자체 게임으로 엄청난 기세로 떠 오르고 있었다.
<오디션>을 벤치마킹(?)해서 개발한 중국의 <QQ현무>
실제 <QQ현무>가 오리지널 격인 <오디션>을 수년 내에 압도했듯 <카트라이더>를 카피해 만든 <QQ레이싱>도 수년 내에 기어코 역전을 하고야 마는 저력을 텐센트는 보여주었다. 아울러 <던전엔파이터>와 <크로스파이어>도 당시에 중국전역에 서비스를 시작해 1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 중국내 탑 게임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제는 게임 하나가 매년 조 단위 매출성과를 낼 정도로 승승장구를 이어간다.
게임 말고도 여타의 한국산 문화컨텐츠에 대한 중국인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사랑이뭐길래>의 대발이 아빠는 현실에서는 잡혀사는 중국 남성들의 환호를 받았다. 당시 가부장적인 아빠의 표본인 대발이 아빠는 90년대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초중순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 후진타오 전 중국주석까지도 열광할 정도로 빠져 들었던 <대장금>은 압도적일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는데 재방송이 아닌 3방송, 4방송까지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였다. 일례로 필자가 당시 동티벳 배낭여행을 할 때 쓰촨 북부 어떤 소도시를 걷다가 <대장금>의 주제가격인 ‘오나라, 오나라~’ 노래가 흘러나오니 혼잡하던 길거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질 정도로 <대장금>의 인기는 대단했다.
중국 남성들이 보는 한국 드라마는 남자는 대발이 아빠와 같이 가부장적이고 여자는 대장금처럼 요리도 잘하고 순종적인 여자이니 부러움과 환호의 대상이었다. 반면 좀 더 콘텐츠 소모에 적극적인 중국여성들 관점에서는 <겨울연가>, <천국의계단>, <풀하우스>에 나오는 한 여자만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남자들이 그야말로 멋진 환타지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당시 한국드라마의 인기는 여타의 할리우드 영화나 중국 영화 혹은 중국 드라마를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최근 <상속자들>의 이민호와 <별에서 온 그대>의 김수현이 쌍두마차로 중국에서의 한류열풍을 끌어가면서 높은 광고수익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는 당시에 이미 게임, 드라마, 영화, 한국음반 등이 충분하게 한류라는 문화컨텐츠를 형성해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할리우드나 일본의 문화컨텐츠를 전혀 모르는 중국인들이 특이하게도 한국의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우호적이고 개방적이었으며 심지어 뜨거운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이라는 점이 당시에 필자가 쓰촨에 건너갔던 시대의 분위기였다. 그 속에서 필자는 학생들에게 어떤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고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가르켜야 할지에 대한 감을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는 궁즉통의 묘리를 깨닫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