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 세기의 대국을 펼친 이세돌 9단이 유니스트(울산과학기술원)의 특임교수로 임명됐다. 인공지능대학원과 공과대학 기계공학과에 겸직으로 오는 20일 임명식을 앞두고 있다. 재밌는 점은 1학기부터 진행될 그의 첫 강의가 '과학자를 위한 보드게임 제작'이라는 점이다.
단순히 '바둑'이 '게임'(그 중에서도 보드게임)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보드게임 씬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은 이미 들어봤을 소식이겠지만, 그간 이세돌 9단은 보드게임 제작에 꽤나 진심인 편이었다. 그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보드게임들은, 보드게임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이미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세돌 특임교수는 "보드게임을 통해 과학적 사고와 창의력을 결합하는 경험을 학생들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세돌 9단이 앞서 선보인 보드게임 위즈스톤 시리즈 3종을 간략히 소개하고 돌아보는 기사를 기획했다. 그가 만든 게임들을 관통하는 테마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과 '정보의 비대칭성'이다. 유니스트에서 진행할 강의의 핵심 또한 그 연장선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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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소개할 3종의 게임은 모두 이세돌 9단이 직접 제작하고, 코리아보드게임즈에서 판매한 보드게임들이다.
이 중에서도 <그레이트 킹덤>은 이세돌 9단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바둑'을 비튼 게임이다. 9X9 보드판 위에 40개의 주황색(후공), 파란색(선공) 성을 배치해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는 쪽이 이기는 방식이다. 정 중앙의 칸에는 중립 성이 놓여지고, 각 플레이어는 성을 둘러싸며 배치해 최종적으로 안쪽 영토를 넓게 확보하는 싸움을 하게 된다.
바둑과 같은 거 아니냐 싶겠지만, <그레이트 킹덤>에서는 상대 영토 안쪽에는 자신의 말을 배치할 수 없다는 룰이 있다. 이 룰로 인해, 바둑에서의 분리된 두 집 확보, 착수 금지 상태와는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덕분에 바둑보다 훨씬 학습이 쉽게 개량됐고, 입문자도 금세 적응할 수 있는 게임이 됐다. 또 다른 룰은, 상대방 말을 하나라도 따내면 이긴다는 것이다.
(꼭 보드게임에 한정된 이야기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진짜'와 '가짜'를 나누거나 '급'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는 <그레이트 킹덤>을 보며 유사 바둑, 급이 낮은 바둑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분야의 정점에 섰던 인물이, 자신이 평생을 바쳐 온 바둑의 세계에서 살을 덜어내 새로운 룰의 게임을 선보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세돌 9단이 바둑과 그 밖의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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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9단이 만든 또 다른 게임 <킹스 크라운>은 오목과 빙고를 합친 게임이다. 그런데 엄밀히 들어가면 <루미큐브>나 <우노>가 떠오르는 면모도 있는, 꽤 복합적인 매력을 가진 게임이다.
5X5 게임판 위에서 플레이어는 서로 다른 색의 숫자 칩을 (비어 있는) 왕관과 결합해 판에 놓으며 진행한다. 게임은 크게 숫자 칩을 주머니 안에서 가져오는 전반부와 칩을 왕관과 결합하며 판 위에 놓는 후반부로 나뉘게 된다.
상하좌우로 인접한 칸에는 같은 숫자 또는 같은 색의 1 크거나 1 작은 숫자 칩만 둘 수 있다. 여러 왕관과 인접할 때는 한 가지 조건만 만족해도 놓을 수 있다. 자신의 왕관을 다섯 칸 1줄, 일렬 배치하면 게임에서 승리한다. 정 중앙은 공용 공간이기 때문에 4개의 왕관을 놓는 것만으로도 5목 빙고를 달성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앞서 설명한, 인접 칸에 숫자 칩을 배치하는 조건부 때문에 '왕관(칩)을 놓지 못하는 공간이 꽤 많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차례에 아무 곳에도 칩을 둘 수 없다면, 마지막으로 왕관을 배치한 사람이 이기는 룰이 있는데, <킹스 크라운>에서는 이런 상황이 꽤 자주 발생한다. 단순히 빙고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 게임이 아니게 된 셈이다.
이세돌 9단은 과거 <킹스 크라운>을 소개하며 "<킹스 크라운>에서는 정보가 완전한 공개도 비공개도 아닌 상태로 게임을 시작한다. 상황에 따라 거의 대부분의 숫자를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기억할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보를 완전히 알고 플레이하기 어렵다. 플레이어는 상대 패의 일부를 알고, 상대가 놓은 수를 통해 남은 패를 집작하며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계산과 수 읽기 외에도 어림짐작도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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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9단이 만든 <나인 나이츠> 또한 굉장히 흥미로운 게임이다. 앞선 두 게임보다 심리전이 특히 강조된 게임이라서 더 재밌다.
9X9 보드판 위에서 양쪽 플레이어는 숫자 임무 토큰을 등에 끼운 말을 같은 숫자의 목표 지점까지 도달시켜 승리해야 한다. 체스 말처럼 생긴 말은 아처, 레인저, 워리어 각각 3개씩이 있는데, 같은 종류의 기사 말들의 등에 1~3, 4~6, 7~9의 숫자 임무 토큰을 하나씩 넣고 게임을 시작한다. 예를 들어, 아처 세 개에 1-4-8은 넣을 수 있고, 1-3-6은 넣을 수 없는 식이다.(이 룰로 인해 게임이 진행되며 상대 말의 숫자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양쪽 플레이어는 처음엔 6개의 말을 번갈아 놓고, 이후 목표 지점이 될 목표 토큰을 무작위로 배치한다.(게임을 진행하며 나머지 3개의 말을 증원하는 방식이다) 말을 옮길 때는 상하좌우 또는 대각선으로 한 칸씩 움직일 수 있는데, 자신의 말이 이미 있는 곳으로는 못 나아가고, 적과 맞붙는 순간 말의 등 뒤에 숨겨둔 숫자 토큰을 서로 비교한다. 기본적으로는 숫자가 더 높은 말이 이기지만, 숫자가 1 차이가 날 때는 낮은 숫자의 말이 이기고, 1은 9를 이긴다. 같은 숫자일 땐 공격자가 이긴다.
이 룰을 적용하면 가장 높은 숫자인 9는 1에게도 지고, 8에게도 지는 셈이다. 그런데 8은 7에게만 지는 꼴이다. 그래서 숫자 8은 상대가 미리 뽑아둔 히든 토큰의 숫자와 동일한 말과 싸우면 지는 특수 룰이 적용된다. 결국 모든 숫자들이 2개 이상의 약점이 있는 구조가 된다. 게임의 승패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동일한 숫자의 목표 타일까지 말을 이동시키거나, 상대 말을 모두 잡는 것으로 갈린다.
이세돌 9단은 바둑의 단수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세돌 본인도 3단이었던 시절에 9단을 꺾었고, 단수는 경험의 척도이지 강함의 척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바로 한 단 차이의 상대에겐 죽을 각오로 덤비는 기사들이 많기에, 승부를 예측하기 어렵다. 단순히 숫자 9개를 줄 세우기 한 것이 아닌, 서로 잡고 잡히는 관계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게임을 직접 플레이해보면, 숫자 상성에 의한 전투와 이를 통한 상대 말의 수를 예측하는 과정도 재밌지만, 심리전이 일품이다. 결국 같은 숫자의 목표에 말을 도달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일부러 특정 숫자를 향해 가는 척하며 상대를 교란할 수도 있고, 후발대로 진입하는 3개의 말이 판세를 뒤집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만약 당신이 3개의 게임 중 하나만 할 생각이라면, 기자의 추천은 <나인 나이츠>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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