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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페이커의 앞을 가로막은 황제, '이지훈' 이야기

선수생활 내내 고독했을 그에게 박수를 보내며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이형철(텐더) 2020-06-12 13:04:16

전용준: 2:0으로 앞서고 있을 때 출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

페이커: 우승도 좋지만, 출전하지 못해 아쉽다. 다음엔 지훈이 형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결승전을 벤치에서 지켜본 페이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출처: OGN 중계 영상 갈무리)

페이커가 2015 LCK 스프링 GE 타이거즈와의 결승전을 벤치에서 지켜본 뒤 남긴 말입니다. 이는 페이커가 결승전 전 경기를 벤치에서 지켜본 유일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페이커 대신 결승전에 출전한 선수는 '이지훈'이었는데요, 그만큼 2015시즌 두 선수의 경쟁은 치열했습니다.

현재 페이커는 LCK를 넘어 <리그 오브 레전드>를 상징하는 선수로 평가됩니다. 그만큼 2015년 그와 필적한 활약을 펼친 이지훈의 가치 역시 한 번 더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디스이즈게임이 소개할 LCK 이야기, 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황제 ‘이지훈’입니다. / 디스이즈게임 이형철 기자

본 콘텐츠는 디스이즈게임과 오피지지의 협업으로 제작됐습니다.


# 직스와 오리아나로 이름을 알리다

  

2012년 GSG 소속으로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에 등장한 이지훈은 SKT S(이하 S)에 입단하면서부터 팬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S는 리그 전승 우승과 롤드컵 우승을 차지한 SKT K(이하 K)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한 팀이었죠.


하지만 2014 LCK 스프링, S는 K의 LCK 19연승을 저지한 데 이어 다음 시즌 8강에서 탈락한 K보다 더 높은 성적(4강)을 올리며 팬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지훈과 직스, 그리고 오리아나가 있었습니다.


S는 굉장히 불안정한 팀이었습니다. 당시 마린과 뱅-울프는 지금과는 거리가 먼 ‘롤러코스터’ 같은 선수들이었죠. 때문에 이지훈은 안정적으로 성장하여 라인을 컨트롤할 수 있는 직스와 오리아나를 주로 플레이했습니다.

2014 스프링, 이지훈이 기록한 승리는 모두 직스를 플레이한 경기에서 나왔습니다. 이후 롤 마스터즈, 서머 시즌을 통해 오리아나 비중을 늘린 그는 한층 더 발전된 경기력을 선보였죠. 2014 LCK 서머에서 올린 9승 중 무려 8승이 직스와 오리아나에서 나온 것을 감안하면, 이지훈이 이 두 챔피언을 얼마나 잘 다뤘는지 느낌이 오실 겁니다.


이지훈의 오리아나 스페셜 (출처: OGN 유튜브)


# 확실한 '정답'도 '오답'도 없다

  

  

2015년, 이지훈보다 ‘식스맨’ 역할을 잘 수행한 선수는 없었습니다. 그해 스프링 시즌 이지훈은 CJ 엔투스, KT 롤스터 등 강팀과의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며 9승 3패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둡니다. 

 

하이라이트는 결승전이었습니다. 이날 양 팀의 미드라이너 이지훈과 쿠로는 카시오페아와 아지르를 주고받는 명승부를 펼쳤습니다. 1세트 쿠로에게 아지르를 내주고 카시오페아로 받아친 이지훈은, 3세트까지 계속해서 두 챔피언을 상대와 바꾸며 경기를 치뤘고 3:0 승리를 거뒀죠. 아지르를 직접 플레이하는 것도 능했지만, 적으로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플레이였습니다.

 

서머 시즌, 이지훈의 플레이는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분신과도 같은 아지르 4전 전승을 포함, 11승 1패를 기록하며 무려 91.7%의 승률을 올린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시기, 페이커의 경기력 또한 만만치 않았고 이번엔 이지훈이 PO 내내 벤치를 지키며 우승을 지켜봐야 했죠. 

 

이는 페이커가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친 유례없는 시즌으로도 꼽힙니다. 물론 페이커는 2018 LCK 서머, 피레안에게 주전 자리를 내준 적이 있지만, 그가 '정상 컨디션'을 유지한 가운데 주전 경쟁을 펼친 시즌은 2015년이 유일합니다. 

  

 

당시 두 선수의 수치도 한번 살펴봅시다. 해당 시즌 이지훈이 가장 많이 플레이한 챔피언은 제라스, 룰루, 카시오페아인 반면 페이커는 이즈리얼, 빅토르, 아리를 가장 많이 택했습니다. 페이커 역시 룰루와 제라스 플레이 기록이 있긴 하지만, 승률은 이지훈보다 낮았습니다.

 

수치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겨우 ‘1’을 넘긴 이지훈의 ‘평균데스’인데요. 얼핏 보면 싸움을 최대한 회피하며 안정적으로 플레이하는 성향이 반영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페이커와 이지훈의 킬 관여율은 단 ‘0.20%’밖에 차이 나지 않습니다. 안정적으로 플레이하되,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는 어김없이 관여했다는 뜻이죠. 다만, 평균 데미지 양은 페이커가 훨씬 높은 모습입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 해설가 조슈아 리즈먼(Joshua Leesman)은 이지훈과 페이커를 ‘야구 구종’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그는 페이커가 160km짜리 빠른 공이라면 이지훈은 아래로 떨어지고 좌우로 꺾이는 변화구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리스크를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싸움을 건 선수와, 안정적으로 플레이한 선수 중 ‘틀린 것’은 없습니다. 그저 직구와 변화구처럼 확연히 다른 스타일일 뿐이죠. 

 

이지훈은 SKT에게 최고의 ‘변화구’였던 셈입니다.

  

 

# 나의 의미를 찾아서

 

두 시즌 동안 페이커와 치열하게 경쟁한 이지훈은, 그해 생애 첫 롤드컵 무대에 섭니다. 대회 내내 2경기 출전에 그친 그는 중요한 경기에서 선발 출전 기회를 잡는데요. 바로 오리겐과의 4강전이었습니다. 

 

이지훈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지르-오리아나를 꺼내 2연승을 이끌었고, 3세트에서 페이커와 교체됩니다. 하지만 이지훈은 교체 출전하는 페이커를 향해 환호하는 관중을 보며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건 페이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하죠.

 

이어진 결승전, T1이 쿠 타이거즈를 3:1로 잡고 롤드컵 전승 우승이라는 대업을 달성했지만 이번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지훈과 SKT의 인연도 거기까지였습니다. 이후 이지훈은 중국 비시 게이밍으로 이적했지만, 약한 팀 전력과 함께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결국 2018년 선수 생활을 마치게 됩니다.

  

  

 

# 고독한 길을 걸었을 그에게 박수를

이지훈의 선수 생활은 가시밭길과도 같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SKT 시절, 그는 ‘신’으로 추앙받은 같은 팀 미드라이너와 끝없이 비교돼야 했습니다. 뛰어난 안정성은 로밍이 부족하다고 까였고, 경기 막판까지 1차 타워를 지키는 든든함은 캐리할 수 없는 미드라이너라고 폄하됐습니다. 

하지만 이지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확실히 해낸 선수였고, 누가 뭐라 해도 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유일한’ 황제였습니다.

누구보다 고독하고 외로운 길을 걸었을 그에게 뒤늦게나마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