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로. <와우>에서 온 이 말은 게이머나 인터넷 네이티브라면 설명할 필요 없는 개념이다. 상대방을 도발해 주목을 받으려 할 때 '어그로를 끈다' 하는데, 오늘날 게임 생태계의 최고 어그로꾼은 단연 에픽게임즈다.
에픽게임즈 스토어는 파격적인 무료 게임 배포와 낮은 수수료, 독점 정책을 통해 게임 생태계에 새로운 물길을 틀었다. 스팀만 깔려있던 PC에는 이제 에픽 스토어도 설치돼있다. 얼마 전 정가 5만 원짜리 <토탈 워 사가: 트로이>는 에픽 스토어에서 독점 무료 배포됐다.
에픽게임즈는 1991년부터 지금까지 팀 스위니가 이끌고 있다. 그의 트위터는 이슈의 진원지로 '텐센트 개입설'을 비롯한 각종 사안에 적극적으로 답변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역시 어그로에 일가견이 있다.
최근 에픽게임즈는 <포트나이트>에 자체 결제 옵션을 도입했다가 구글과 애플 마켓에서 퇴출당했다. 에픽게임즈는 #Freefortnite 해시태그 운동을 전개하며 구글과 애플에 반독점 소송을 제기했다. 애플은 에픽게임즈의 개발자 권한을 없애겠다며 강경 대응에 나서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이 과정에서 페이스북과 마이크로소프트(MS)가 공개적으로 에픽게임즈의 손을 들어주었다. 소송 과정 중 미국 법원이 에픽게임즈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 들어주면서 당장 iOS와 맥(MAC)에서 언리얼 엔진의 개발, 업데이트가 중단되는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가처분' 신청을 수용했기 때문에 상황이 끝난 건 아니다. 정식 소송에서 애플이 이길지 에픽게임즈가 이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상황이 뒤집힐 가능성도 있다.
디지털 마켓 수수료와 관련한 에픽게임즈의 광역 어그로는 당분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차세대 플랫폼의 대두, 복잡한 역학관계를 두루 살펴야 이번 사건을 짚을 수 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경우는 애플이 에픽게임즈와의 소송에서 압승을 거둬 iOS에서 언리얼 엔진의 개발자 권한을 뺏는 것이다.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졌지만, 애플이 뜻을 굽히지 않고, 법원이 결정을 뒤집으면 최악은 현실이 된다. 에픽게임즈의 개발자 계정이 사라지면 iOS에서 언리얼 엔진에 대한 체크를 할 수 없게 된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파장은 에픽게임즈에만 미치지 않는다. 언리얼 엔진으로 게임을 서비스 중인 회사들 모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이다. 넷마블의 <리니지 2 레볼루션>, NC의 <리니지2M>, 넥슨의 <V4>는 앱스토어에서 유지/보수를 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는 곧 개발사의 매출 하락을 의미한다. 언리얼 엔진으로 만든 모바일게임은 이렇게 대체로 중량급 타이틀이기에 피해는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매출의 30%를 수수료로 받는 애플은 게임들이 벌어들이는 수수료가 그만큼 줄어들게 될 것이니 애플에게도 좋을 게 없다. 앱스토어에서 게임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한다면, 이는 애플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다.
어쨌든 법원은 타 기업이 얻을 피해가 클 것이란 우려를 인정하고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는 법의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앞으로 긴 시간이 필요하기에 결정이 나기 전에 올 수 있는 피해를 줄이기 위함일 뿐이다.
하이 퀄리티 게임을 만들려면 언리얼 엔진을 쓰는 방법이 제일 수월하다. 이미 서비스 중인 게임의 경우는 엔진을 바꾸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바꾼다 하더라도 언리얼 엔진 4 수준의 어셋을 제공하지도 못할 것이다.
에픽은 100만 달러(약 12억 원) 미만의 수익을 거두는 업체에게는 로열티를 일절 받지 않고 있기에 언리얼 엔진을 쓰는 중소 업체들도 상당하다. 참고로 이 정책은 언리얼 엔진 5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예정이다.
비록 애플이 자충수에 가까운 수를 두었지만 개발자 권한을 회수하겠다는 초강수를 쓴 것은 말 그대로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을 예고한 셈이다. 패배하면 더이상 통제 가능한 생태계를 유지하는 애플이 아니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애플과 구글의 상황이 갈린다)
애플 입장에서 30%의 수수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동시에 매출과도 직결된 문제다. <포트나이트>의 자체 결제 사례가 인정되면, 다른 게임들도 우후죽순 자체 결제를 도입할 수 있다. 적어도 게임 카테고리에 있어서는 선례를 남기면 안 되는 애플이다.
에픽에게는 넷플릭스의 사례가 좋은 참고 사례였을 것이다. 2018년, 넷플릭스는 애플 앱스토어가 아닌 웹브라우저로 회원을 모객했다. 앱스토어의 정기구독 앱은 첫 번째 해에 30%, 두 번째 해에 15% 수수료를 떼어가는 데 이 돈을 내기 싫었던 넷플릭스는 우회책을 사용했다. 넷플릭스 앱에서는 신규 가입을 등록할 수 없게 한 것이다.
OTT의 절대 강자가 우회책을 사용하자 유튜브, 웨이브, 멜론도 앱이 아닌 웹에서 구독을 받고 있다. 소비자는 저렴한 비용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제공자는 애플에 수수료를 주지 않아도 된다. 애플은 이런 일을 게임에서도 반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에픽에게 개발자 권한 해제라는 강경한 조치를 내린 데엔 이유가 있다. 구글은 정기구독형 서비스에 수수료를 물지 않는다.
넷플릭스의 사례처럼, 애플은 플랫폼을 막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넷플릭스는 하나지만, 게임은 수천, 수만 개다. 게임에서는 절대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고 봤을 거다. 아무쪼록 애플은 가처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가처분이 안받들여졌다면 그 손해 역시 애플도 만만치 않을테니까).
다만 애플은 30%의 수수료가 대역폭 처리, 거래 관리, 악성코드 식별에 쓰인다는 기존 주장을 유지할 따름이다.
거대 플랫폼을 운영하는 애플 입장에서는 확실한 조치의 필요가 있었다고 변호할 수 있지만, 세상엔 애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술했듯이 이번 갈등은 애플의 자충수가 됐다. 에픽게임즈는 영리하게 자신들 입장을 설정했고, MS와 페이스북, 삼성 같은 플레이어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에픽게임즈는 개발자의 최전선에서 30%의 수수료의 폭거에 맞서 싸우는 투사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애플 자신이 혁명의 대상이 됐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광고를 패러디했고 반응은 뜨거웠다. 사람들은 #FreeFortnite 해시태그를 달았고, 외신도 "애플이 유저와 등 돌리는 것"이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팀 스위니는 아마 조용히 웃고 있을 것이다.
에픽은 기획된 싸움을 했다. 화제의 광고를 시작으로 SNS에 빠르게 #FreeFortnite 관련 이미지를 만들어 뿌렸다. 에픽게임즈는 "이거 보세요"라는 듯 모든 문건을 업로드하고 있다. 에픽은 빠르게 대응하면서도 최대한 많은 것을 대중에 공개하며 자신들이 선봉에서 골리앗과 맞서고 있는 듯한 느낌을 연출했다.
21일 CNBC 보도에서 애플은 역전을 노렸다. 애플의 필 실러 앱스토어 총괄 부사장은 "에픽게임즈가 앱스토어를 이용하면서 내는 수수료를 두고 특별 혜택을 요청했다" 폭로했다. 겉으로는 모든 유저와 개발자의 자유를 원한다면서 공개적으로 약관 위반을 저지른 에픽이 속으로는 은밀하게 제 잇속만 차렸다는 것이다.
보도 즉시 팀 스위니가 등장했다. 자신의 트위터에 "우리만 아니라 모든 개발자와 소비자를 위해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구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에픽은 <포트나이트>에 자체 결제를 도입해도 되겠냐고 물었던 것이지 특별 대우를 요청한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에픽은 아이폰용 서드파티 앱스토어를 만드는 것도 허락해달라는 요청도 했다. 안드로이드 OS에 구글 스토어만 있는 게 아니듯 말이다.
본인이 개발자이기도 한 팀 스위니는 "애플은 '베이직' 언어로 만든 개방형 플랫폼 애플2에서 시작됐다"며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설치할 자유는 컴퓨팅의 기본"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이로써 에픽의 광역 어그로는 성공했다. 이쯤 되면 에픽이 앱스토어에서 <포트나이트> 장사를 접을 것을 이미 각오하고 판을 벌인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에픽은 맷집이 있다. 언리얼 엔진, <포트나이트> 두 가지 무기를 가졌다. 개발사들이 믿고 쓰는 엔진이고, 많은 게이머들을 매료시킨 킬러 타이틀이다.
그리고 이제 에픽 스토어에서 게임을 받고 실행하는 게 익숙하다. 아직 스팀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으며 편의 사항도 개선돼야 하지만, 그간 스팀의 대항마를 자칭한 스토어 중 가장 유의미한 성과를 낸 것도 사실이다.
앞의 두 무기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면, 스토어는 갈 길이 멀고 계획도 많다. 6월 공개된 모바일 에픽 스토어 계획도 그중 하나다.
[관련기사]
PC판 개선은 언제... 에픽스토어 모바일 앱 출시한다 (바로가기)
에픽은 장기적으로 업계의 압묵적 룰이었던 수수료 30%의 장벽을 허물 것이다. 수수료 30%는 비단 구글, 애플만의 문제가 아니다. 광역 어그로의 방향성이다. MS, 소니, 닌텐도 디지털 마켓에서 게임 수수료는 30%로 통일됐다.
스팀은 매출이 1,000만 달러(약 119억 원) 미만이면 30%, 1,000만 달러 이상은 금액에 따라 25%, 20% 순으로 수수료를 매긴다. 이들과 달리 에픽 스토어는 12%를 떼간다.
에픽 스토어의 수수료 인하 정책 성공은 디지털 마켓 수수료 30%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뜻한다. 개발자에겐 분명 좋은 일이다. 에픽은 이것이 소비자에게도 좋은 일이라 설명한다. 원가 절감의 효능감을 소비자도 체감할 수 있다는 약속이다.
안드로이드에는 갤럭시스토어도 있고 원스토어도 있지만, 아이폰에게는 앱스토어뿐이다. 디지털 게임 마켓 사업자 중 가장 닫힌 생태계를 표방하는 건 애플이다. 따라서 애플은 에픽에게 가장 좋은 도전 상대였다. 한때 혁신의 아이콘이었지만 지금은 혁신의 대상이라는 듯 구도를 형성했고 자기들 규칙대로 장사하던 애플을 플랫폼 전쟁의 한복판으로 끌고 나왔다.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애플은 국내 모바일게임 시장에서 한 줄기 희망이었다는 것이다. 그 시절은 바로 모바일게임을 출시하면 9:1(통신사:개발사)로 매출을 나누고, 무선인터넷은 통신사를 통해서만 비싸게 사용했던 때다. 이때 등장한 애플은 휴대폰에서 무선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했고, 수수료 역시 3:7(애플:개발사)로 제시했다. 개발사에겐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는 후문.
희망과 같았던 30%의 수수료가 13년 전의 이야기다. 에픽게임즈는 바로 이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수수료 30%가 문제라면 에픽의 편을 든 MS도 문제고 소니도 문제다. 그렇지만 셈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플랫폼 우주전쟁의 거대한 체스판은 꽤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
MS는 클라우드 게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다양한 파트너들과 손을 잡았다. 이미 엑스클라우드를 엑스박스 게임패스에 묶으면서 주목 받은 MS는 SKT, 삼성과 제휴를 맺고 다음 달 상용 서비스를 시작한다. (한국 이통 3사의 클라우드 게임 경쟁은 초미의 관심사인데 LG는 엔디비아와 손을 잡고 지포스 나우 프리미엄을, KT는 자체 서비스 게임박스를 발표했다)
각축전 상황에서 클라우드 사업자들은 여러 곳의 게임을 자기 클라우드에 담아내야 하는 상황이다. 클라우드 게임 진출을 노리는 전통적인 디지털 마켓 사업자들은 수수료 30%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MS가 에픽의 어그로에 아주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한 데에는 이런 계산이 깔려있을 것으로 보인다. 클라우드 게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MS에게는 더 많은 사업 파트너와 일반 게이머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MS가 리트윗 몇 개 더 받자고 #FreeFortnite 했겠는가?
구글은 이미 스태디아를 가지고 있지만, 열린 생태계를 지향하기에 안드로이드 OS에서 타사 클라우드 게임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애플은 남의 클라우드 게임 서비스를 자기 기기에서 실행시킬 생각이 없다. MS 게임패스 서비스 대상에 아이폰은 빠졌다. 이 주제에서 애플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아이폰 유저를 애플 아케이드에 가입시킬까?"다.
스토어를 운영하면서 구독형 서비스가 짭짤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애플은 기세 좋게 애플 아케이드를 출시했지만, 시장 반응은 뜨겁지 않다. 최근 애플은 애플 뮤직, 애플 티비, 애플 뉴스까지 하나로 묶은 번들 모델을 출시하기로 했다.
삼성은 이동 통신 서비스를 지원하지 않고, 애플과는 좋은 사이가 아니다. 자기 하드웨어를 많이 팔고 내친 김에 <포트나이트> 유저들이 갤럭시 스토어를 써주면 좋을 뿐이다. 에픽은 '탈 구글 플레이' 정책을 선언하면서 삼성과 손을 잡았고 <포트나이트> 안드로이드 베타를 갤럭시 독점으로 진행한 적 있다.
그렇다면 소니는? 2020년 현재 PC에서 PS나우를 할 유저는 거의 없다. 소니에게 클라우드 게임은 아킬레스건과 같다. 소니는 클라우드 게임 경쟁에서 한 발짝 벗어나 차세대기 PS5에 집중하고 있다. 소니는 클라우드 게임 쪽에서는 MS와 손을 잡았다. 작년, 구글 스태디아의 등장을 본 요시다 겐이치로와 사티아 나델라는 MS 클라우드 플랫폼 애저(Azure)로 게이밍 솔루션을 만들자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한 바 있다.
오히려 소니는 PS5의 퍼포먼스와 퍼스트파티의 파이프라인에 집중할 것이다. PS4의 전략은 제대로 성공했고, 소니는 그 기조를 이어나갈 것이다. 소니에게 클라우드 게임은 핵심 관심사가 아니다. 소니 입장에서는 차세대 언리얼 엔진을 제휴 스튜디오들이 잘 써줘야 하기에 에픽과 문제를 일으킬 이유가 없다. 지난 7월, 소니는 에픽에 2억 5,000만 달러(약 3,000억 원)를 투자하며 1.4%의 지분을 획득했다.
에픽은 가장 닫혀있는 애플을 타점으로 잡았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에픽은 기민하게 움직였고, 효과적으로 어그로를 끌었다. 에픽이 애플의 변화를 끌어낸다면 역사에 남을 일이다. 물론 애플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 정도의 관심을 얻은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에픽은 글로벌 히트작 <포트나이트>, 막강한 범용 엔진 언리얼 엔진, 오늘(28일)만 해도 <히트맨>을 무료로 배포한 스토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에픽은 다양한 플레이어들과 적대와 공존의 줄다리기를 하면서 그 존재감을 강화하고 있다. 에픽게임즈는 이렇게 플랫폼 우주전쟁의 항성이 되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에픽이 개발자와 게이머의 구세주라는 느슨한 믿음을 가져서는 곤란하다. 혹자는 애플이나 에픽이나 돈 때문에 이런다고 평가한다. <포트나이트>로 조 단위 매출을 기록하는 와중에 마켓 수수로료 30%를 떼가기는 눈치가 보였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에픽이 내건 개발자 친화 기치 역시 발화자가 이윤 창출을 지상 과제 삼는 기업인 이상 적절히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유저들 역시 무료 게임과 여론전으로 재미를 보고 있지만, 에픽의 프레임에 지나치게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공짜 게임이 무엇이 되어 돌아올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