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할인마’로 알려진 밸브가 사실은 ‘게임 가격의 수호자’였다?
미국에서 밸브를 상대로 소송이 진행된다. 미국인 5명이 낸 집단소송이다. 소장에 따르면 밸브는 PC 게임시장의 가격경쟁을 차단하고, 신규 플랫폼 진입을 막아 업계 혁신을 저해했다. 원고측 주장의 주요 내용을 추려봤다.
원고는 스팀 입점 개발자에 요구되는 ‘스팀 판매 계약서(SDA)’의 이른바 ‘스팀 MFN’ 조항을 문제 삼았다. MFN(최혜국 대우)은 원래 국가 간 통상·항해조약에 자주 나오는 용어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 조약을 체결할 때, 조약에 명시된 대우가 제3국에 부여한 대우보다 불리하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 A국이 B국과 MFN 조항을 포함한 통상조약을 맺었다고 가정하자. A국은 B국 이전에 C~Z국과 조약을 맺었다. 그중 가장 낮은 관세를 적용 받은 국가는 C국이다. MFN 조항에 의거, A국은 C국의 관세를 B국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
‘스팀 MFN’은 판매자가 스팀 이외 플랫폼에서 게임을 판매할 경우, 그 가격이 스팀 스토어에서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는 조항이다. 이를테면 에픽 스토어에서 59.99달러에 판매되고 있는 게임은 스팀에서도 반드시 59.99달러로 판매해야 한다.
19세기부터 국제 조약에 도입된 MFN은 국가 간 차별을 방지, 유럽 내 자유무역체제를 본격화했다. 이후 1947년 제네바에서 23개국이 조인한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의 기본 원칙이 됐으며, GATT을 대체한 WTO 역시 MFN을 원칙 삼는다.
이렇듯 무역에서 MFN은 국가 간 상호 지위를 동등하게 하고 차별을 막아주는 장치다. 반면 민간 시장에서 MFN 조항은 종종 법정 공방의 대상이 된다. 시장 과점의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주장 때문이다. 이번 소송에서도 원고는 ‘스팀 MFN’이 게이밍 플랫폼 간의 공정한 가격 경쟁을 차단한다고 주장했다.
스팀과 MS 스토어를 비교해보자. 스팀의 판매 수수료는 30%다. MS 스토어의 수수료는 15%다. 한 개발자가 두 플랫폼에 게임을 내놓았다면 MS 스토어에서는 조금 더 낮은 가격에 판매를 원할 수 있다. 저렴한 수수료 덕에 개당 판매수익을 스팀 수준으로 낮춰 가격을 내리고 판매량을 크게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시나리오에서 스팀 판매가격이 5만 원이라면, MS 스토어에서는 게임을 약 4만 1,000원에 팔아도 똑같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에픽 게임즈 스토어(수수료 12%)에서는 약 3만 9,000원까지 내려도 된다.
그러나 스팀 MFN 조항 때문에 이런 전략은 불가능하다. 개발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MS 스토어의 판매가를 스팀스토어 가격과 동일하게 맞추거나, 스팀 입점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후자를 선택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스팀의 압도적 시장점유율 때문이다. 스팀은 전체 PC게임 판매량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개발사로서는 스팀을 무시하고 다른 플랫폼에서만 게임을 출시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게임 가격은 스팀의 30% 수수료에 알맞은 수준으로 형성된다. MS스토어, 에픽 스토어 등 수수료가 비교적 낮은 플랫폼도 ‘낮은 가격’을 내세워 스팀과 경쟁할 수 없는 이유다.
원고에 따르면 이 현상은 현재 미국 게임시장의 경쟁을 차단할 뿐만 아니라 새 플랫폼의 진입을 막고 결과적으로 업계 혁신을 저해하고 있다. 이들은 고소장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스팀 MFN은 ‘인공 방어벽’을 만들어 다른 플랫폼들의 시장 진입을 막고, 혁신을 방해한다. 게임 시장과 같이 밀도가 높은 시장에서는 신규 기업이 기존에 형성된 가격대를 낮추는 역할을 수행하며 소비자에 혜택을 줄 수 있다. 저렴하게 게임을 공급하는 능력은 현재 시장에서 새 기업이 점유율을 가져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원고는 스팀 MFN이 개발사 이익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스팀 MFN이 없다면, 다른 시장에서처럼 더 활발한 가격경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전체 상품의 판매량도 늘어나기 마련이라고 이들은 전했다. 이번 소송에 대해 스팀은 아직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