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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칼럼] 절망의 세계에서도 노래가 있다면

젠레스 존 제로 '아스트라'와 라제폰, 마크로스, 더블오

김승준(음주도치) 2025-02-06 18:05:52

역시 진짜 오타쿠가 만든 게임은 오타쿠의 심장 깊숙한 곳을 정확히 저격한다. 


기자는 <젠레스 존 제로>를 너무 좋아하지만, '아스트라'라는 캐릭터가 처음 예고됐을 때까지만 해도 사실 심장이 저릿하다는 느낌을 받진 않았다. '노래로 싸운다'는 콘셉트도 이 작품에 어울리는지 의아했다. 다른 캐릭터들이 아크로바틱 기예에 가까운 동작으로 눈을 사로잡는 동안, 스탠딩 마이크를 세워 옆에서 노래를 부르며 지원해주는 '아스트라'의 모습은 심심한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아스트라'의 일본 성우를 보는 순간 모든 의문이 단번에 해소됐다. <마크로스 프론티어>에서 '셰릴 놈' 역을 맡았던 '엔도 아야'가 아닌가. 이 분야에선 상징적인, 말 그대로 레전드 성우다. 단순히 호요버스가 돈을 많이 투자했다거나, 개발자의 팬심을 투영한 것을 넘어, '아스트라'라는 캐릭터를 바라보는 서브컬처 팬들의 시선 자체를 바꿀만한 캐스팅이었다. 호요버스가 남긴 일종의 힌트였던 셈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잊고 있던 옛 기억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그래, '노래로 맞서고 평화를 외치는 것'은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 그래, 심지어 '노래로 물리적인 싸움'을 하는 작품도 있었지. 그러자, 처음엔 취향이 아니었던 '아스트라'의 외모까지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저린 심장을 부여잡고 나니 그제서야 알게 됐다. '아스트라'는 단순히 캐릭터 하나의 매력을 어필하는 것을 넘어, <젠레스 존 제로>의 세계를 확장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 이번 칼럼에는 <젠레스 존 제로>, <라제폰>​, <마크로스>,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해당 작품들을 알면 이 글을 더 재밌게 감상할 수 있겠지만, 본문의 설명만으로도 내용 이해에 무리가 없게 구성했습니다. 


▲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일단, 아스트라의 전투 장면을 한 번 보고 시작하자.



# 절망 속에 남겨진 희망의 도시, 뉴에리두

<젠레스 존 제로>에는 '공동'(空洞, Hollows)이라는 블랙홀과 유사한 재해가 존재한다. 주로 검은 구형의 겉모습을 하고 있으며, 공동 내부로 삼켜진 공간은 다른 차원으로 왜곡되어 내부 구조가 계속해서 바뀌는 일종의 '미로'가 된다. 현실의 방사능과 유사한 '에테르'에 오래 노출되어 침식되면, 생물(또는 지능을 가진 존재)가 '에테리얼'이라는 괴물로 변한다. 즉, 공동 내부에선 '에테르'와 '에테리얼'에 맞서 싸워야만 생존할 수 있다.


미로 같은 공동에서 탈출할 수 있게 경로를 찾아주는 자들이 '로프꾼'으로, <젠레스 존 제로>의 주인공 '벨'과 '와이즈' 남매는 전설의 로프꾼 '파에톤'의 신분을 숨기고 있다.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배경은 '뉴에리두'로, 기존에 있던 도시 '에리두'가 '제로 공동'이라는 거대한 공동 재해에 삼켜지는 비극을 겪고 난 후 재건한 최후의 도시다. 


<젠레스 존 제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공동'으로 인해 사랑하는 존재를 잃거나(사망 또는 에테리얼화되는 비극을 겪는 경우가 많다), 생존을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공동의 폭주를 막고 도시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공동 안에선 외부의 추적을 피할 수 있고, 희소 자원도 존재해 자진해서 들어가는 이들도 있다.

에테르에 침식되어 에테리얼(괴물)이 되거나, 공동 안에 있던 에테리얼과 맞서 싸우거나 어느 쪽도 쉽지 않은 길이다.
탈출 자체가 어려운 공간이다.

잠시 2002년에 방영된 애니메이션 <라제폰>의 이야기를 해보자. 깊게 들어가면 <에반게리온>과는 결이 다르긴 하나, 이 작품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는 <에반게리온>의 예시를 드는 편이 이해가 훨씬 빠르다. <에반게리온>이 '나'와 '내가 아닌 타자' 사이의 경계를 'AT필드'로 표현한다면, <라제폰>은 '우리'와 '우리가 아닌 존재(작중에선 미지의 존재 MU)'의 차이를 붉은색, 푸른색 피를 비롯한 여러 소재를 통해 보여준다.


미지의 존재 MU에 의해 습격당한 도쿄는 거대한 구형의 경계 안팎으로 분단됐고, 그 경계의 모습이 마치 목성과 비슷해 '도쿄 주피터'라고 불리게 된다. '도쿄 주피터' 안에선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이 안에서 생존한 이들은 기억이 왜곡되어 경계 밖의 세상은 모두 멸망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 이쯤 되면 눈치 채셨겠지만 <젠레스 존 제로>의 '공동'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매력을 가진 설정이다.


TVA나 극장판을 본 사람보다 <슈로대>(슈퍼로봇대전)에서 <라제폰>을 먼저 접한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렇다, <라제폰>에는 '거대 메카'가 등장하는데, 말 그대로 '노래하며 음파로 싸운다'. 마치 무협의 음공(音攻)처럼, 커다란 메카가 성악 발성을 하듯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일종의 컬처쇼크를 겪게 된다. 참고로 메카 전투보다는 세계관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훨씬 흥미로운 <라제폰>이다.


당연하게도 <젠레스 존 제로>의 '아스트라'가 노래를 부르며 싸우는 모습은 <라제폰> 속 '메카 대전' 비하면 훨씬 더 아름답고 멋지게 그려진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절망'의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노래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노래는 누군가(<젠레스 존 제로>에서는 뉴에리두의 시민들, <라제폰>에서는 적으로 등장하는 메카나 다른 인물들)에게 '희망의 공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라제폰>의 '도쿄 주피터'
그 경계를 바라보는 <라제폰>의 주인공 아야토

귀에 날개가 달린 메카 '라제폰'이다. 물리적인 전투에 더불어 '노래'(소리)가 전투의 핵심에 있다.

다시 <젠레스 존 제로>의 '아스트라'. 
공동으로 인한 피해는 도시 전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재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지만 
뉴에리두는 '아스트라'의 노래와 같은 '희망'을 바라본다.



# "노래는 언어를 넘어선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언어는 국경을 넘기 힘들죠. 하지만 노래, 음악은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즐기고, 또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크로스> 시리즈의 오리지널 크리에이터 카와모리 쇼지 감독 인터뷰 답변 중 일부다. <우주세기> 때부터 <건담> 시리즈가 쭉 그랬듯, <마크로스> 시리즈의 근간은 '반전'(反戰)의 메시지에 있다. 여기에 핵심 소재 중 하나인 '노래'를 더해 <마크로스> 시리즈는 전례 없던 독보적인 길을 걸어왔다.


<젠레스 존 제로>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마크로스>냐 싶겠지만, '아스트라'라는 캐릭터는 <마크로스>에 대한 오마주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두 작품을 함께 언급할 수밖에 없다.


호요버스는 <젠레스 존 제로>에서 <마크로스>에 대한 팬심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일단, <젠레스>의 '아스트라' 일본 성우는 <마크로스 프론티어>에서 '셰릴 놈' 역으로 유명한 '엔도 아야'다. <마크로스> 시리즈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스트라'의 일본어 음성을 듣는 순간 감동을 느끼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다.


또한 인게임 스토리에서 '아스트라'가 추진체를 활용해 공연장 전체를 공중에 부양시켜 '하늘에서 노래하는' 장면 또한 전투기를 타고 공중을 나는 <마크로스>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다. <마크로스7>에서 노래가 일종의 에너지로 활용되던 설정도, <젠레스>의 '아스트라'가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모습과 함께 실제 마법 에너지처럼 사용하는 장면으로 재해석했다.


<마크로스 프론티어>. 좌상단 금발의 캐릭터가 '셰릴 놈'으로 '엔도 아야' 성우가 연기했다.

<젠레스 존 제로> '아스트라'의 일본 성우도 '엔도 아야'다. 당연히 의도된 캐스팅이다.

노래와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호요버스는 <젠레스 존 제로>에서 '아스트라 야오'의 노래 부분을 (홍콩과 마카오 등에서 주로 사용하는) '광둥어'로만 담아냈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현지화에서도 캐릭터 연기 음성만 각 국가의 언어로 더빙하고, 노래는 광둥어 버전 그대로 담았다. 스토리 진행 중간이 아닌 전투 중에도 '아스트라'의 노래가 등장하기 때문에, 일부 유저들 사이에선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젠레스 존 제로>의 세계를 조금만 더 깊게 파고들어 보면, 이 또한 호요버스가 의도한 경험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뉴에리두'는 '공동 재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재건한 신도시다. 이곳엔 (현실 세계를 기준으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공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호시비 미야비'는 일본 문화에서 모티프를 따왔고, '버니스 화이트'는 미국 문화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버니스' 등장 당시에도 <젠레스 존 제로>는 큰 화제가 된 노래와 댄스 영상에서 '영어'로 된 노래만 글로벌 권역에 동일하게 제공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뉴에리두'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젠레스 존 제로>는 꾸준히 어필해왔던 셈이다.


기자도 광둥어엔 그리 밝지 못한 터라, 자막 없이 듣는 것만으론 '아스트라'의 노래를 모두 이해할 순 없다. 이 지점에서 <마크로스> 원작자 카와모리 쇼지 감독의 말을 다시 새겨보자. 언어는 국경을 넘기 힘들지만, 노래와 음악은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즐기고 느낄 수 있다. '아스트라'로 인게임 플레이를 직접 해본 분들은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궁극기를 사용할 때마다, 이전과는 달라진 분위기 덕에 노래에 몸을 싣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곳은 인류 문명 최후의 희망인 뉴에리두잖아. 우린 절망 속에서도, 이유 없는 즐거움으로 버티며 몇 번이고 살아남았어."
작중에서 나온 '아스트라'의 대사다.
인게임에 등장하는 아스트라의 노래들도 '희망'에 대한 주제를 일관되게 다루고 있다.


# 전쟁보다는 대화 그리고 포용

이번엔 <건담>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에서 주인공 '세츠나'는 강력한 모빌슈트인 건담으로 전쟁의 악순환을 근절하고자 한다. 시리즈의 일관된 메시지인 '반전'(反戰)은, 히로인 '마리나'의 '노래'를 통해, 세츠나에게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 잡는다. 


엑시아에서 더블오를 거쳐 최종장의 퀀터에 탑승했을 때, 세츠나는 건담으로 적을 구축(제거)해 평화를 유지하던 아군의 구세주이자 적군의 파괴자인 모습에서,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던 존재(<더블오> 작중에선 ELS)들과 진정한 '대화'와 '이해'의 단계로 넘어서 새로운 미래를 연다. 이런 전개 안에선 주인공 세츠나와 건담의 역할이 당연히 크게 부각되지만, '마리나'의 '노래' 또한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을 한다.


마리나의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퍼져
<더블오> 작중에서 매우 중요한 연출로 등장한다.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 시즌 2 마지막화. 가장 중요한 최종 결전에서도 '마리나'의 '노래'가 등장한다.
<더블오>를 봤던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사진 출처: 선라이즈 & 건담인포)


다시 <젠레스 존 제로>의 세계로 돌아와 보자. 인게임엔 등장하지 않았지만 공식 채널에 올라온 PV에서 '아스트라'는 공동 재해 추모 공연에 위로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가수로 선다. PV 안에선 공동 재해가 얼마나 잔혹한 현상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과거 공동 안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경험이 있던 '아스트라'는 자신의 진심을 담아 노래한다. 하지만 '아스트라'는 재해에서 자신만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해서 읊조린다.


인게임 스토리에서도 천재 아티스트 '아스트라'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곤 한다. 모두가 절망스런 삶을 살아가는 중에 '너는 뭐가 그리 잘 나서 혼자 희망을 부르짖냐'는 비아냥이 그녀를 향해 쏟아진다. 모두의 사랑을 받는 스타의 삶엔, 그보다 더 짙은 그늘이 함께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트라'는 노래를 통한 마법 같은 치유의 힘을 끝까지 믿는다.





호요버스는 이런 서사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전투 능력을 '아스트라'에게 줬다. 


'아스트라'는 현 시점에서 <젠레스 존 제로>의 유일한 S급 지원 캐릭터로, 모든 파티원의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궁극기를 보유하고 있다. 기존의 방어 캐릭터가 제공하는 '실드'와 아보카도 같은 특정 방부가 제공하던 소량의 '힐'을 제외하면, 최초의 힐러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공격력 버프 능력도 있어, 후반 콘텐츠로 갈수록 생존 자체가 매우 어려운 게임 특성을 고려하면, '아스트라'는 매우 큰 도움이 되는 캐릭터다. 


<젠레스 존 제로>는 3명의 캐릭터를 필요한 순간마다 계속해서 교체하며 싸우는 전투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3명의 파티를 짤 때, 최대의 시너지를 내기 위해선 캐릭터마다 다른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주로 같은 진영의 캐릭터가 파티에 존재하거나, 같은 속성의 캐릭터가 존재하는 것으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아스트라'는 파티 안에 '강공' 또는 '이상' 캐릭터 하나만 존재하면 조건이 만족되어 매우 수월하게 파티를 구성할 수 있다.


기자가 다른 여러 작품의 특징을 인용하며 반전(反戰), 평화, 대화, 포용 등의 주제를 언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젠레스 존 제로> 인게임 스토리에서도 그랬듯, '아스트라'는 '노래로 싸우는' 특유의 전투 과정에서도 다른 캐릭터들 사이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전투 한가운데서도 평화를 노래하기 때문이다. 긴박함과 경쾌함의 상징이었던 <젠레스 존 제로> 특유의 EDM 베이스 BGM에, 산뜻함을 더한 '아스트라'다.


다른 캐릭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역동적일 뿐, '아스트라'의 온필드 전투도 꽤 매력적이다.

다른 두 캐릭터들의 '빠른 지원' 사이클을 계속 활용할 수 있게 해서 전투 템포가 달라지는 것도 특징이다.

▲ 인게임 스토리에서도 나온 '아스트라'의 노래 '낙원 유람기'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캐릭터 '미야비'​가 직전 업데이트에서 등장한 이후 

<젠레스 존 제로>가 신규 캐릭터의 매력을 잘 어필하는 게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미야비'가 <젠레스 존 제로>의 재미와 깊이를 종으로 확장시킨 캐릭터였다면

'아스트라'는 뉴에리두가 가진 아픔과 희망의 의미를 매력적인 설정과 함께 횡으로 확장시킨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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