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 ID/PW 찾기

취재

가상 회의, 커머스 다 있었다…'원조 메타버스' 어떻게 됐나

20년 된 플랫폼 '세컨드 라이프'의 상승과 하락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방승언(톤톤) 2022-01-26 17:00:36

메타버스가 '원래 있던' 개념의 리뉴얼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은 많다. 심지어는 MMORPG의 일종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둘 사이에는 실제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 가상공간에 여러 사람이 접속해 아바타로 소통한다는 점, 이용자가 접속하지 않은 시점에도 가상 세계가 연속성을 지닌다는 점 등 몇 가지 핵심 특성을 공유한다.

 

그러나 메타버스와 MMORPG에는 무시 못할 차이가 있다. 자유도, 그리고 현실과의 연계성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1월 발표한 ‘게임을 통한 메타버스 속 사회심리적 특성 연구’ 보고서에서 기존 온라인 게임(특히 MMORPG)과 메타버스형 게임을 구별 짓는 차이점 중 하나로 “이용자의 무한성에 가까운 자유도, 그리고 게임 내부의 경제와 현실 경제와의 연결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렇듯 MMORPG를 근거로 들어 메타버스의 낡음을 지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메타버스가 ‘새롭지 않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다. 20여년 전부터 현재까지 서비스 중인 원조 메타버스 플랫폼 <세컨드 라이프>의 예시 때문이다.

과거 <세컨드 라이프>는 그 파급력과 자유도, 경제성이나 현실 연계성 등 측면에서 현재 무수하게 시도되는 메타버스 프로젝트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던 듯하다. 오히려 오늘날의 메타버스가 갖춰야 한다는 주요한 '기능' 대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성공적 메타버스'를 논하는 맥락에서 <세컨드 라이프>가 거론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이유는 무엇일지, <세컨드 라이프>의 역사를 살펴봤다.



# <세컨드 라이프>의 화려한 전성기

<세컨드 라이프>는 미국 사업가 필립 로즈데일이 1999년 설립한 기업 ‘린든 랩’의 작품이다. 원래는 가상현실 하드웨어를 목표로 했던 기업이지만, 경영에 위기를 겪으며 소프트웨어 사업으로 전환해 <린든 월드>라는 이름의 서비스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린든 월드>는 유저들이 공동의 목표를 수행하며 서로 교류하는 MMORPG에 가까운 소프트웨어였다. 그러나 점차 유저가 주도하는 소셜형 서비스로 기획을 변경해 나갔고, 2003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세컨드 라이프>로서 세상에 나왔다.

2005년 경부터 <세컨드 라이프>는 막대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경제지 비즈니스위크가 “가상현실, 진짜 돈”이라는 표지 기사와 함께 <세컨드 라이프> 속 사업가 ‘앤쉬 청’을 표지모델 삼은 일이 특히 이목을 끌었다. 이렇듯 <세컨드 라이프>의 '경제성'이 조명을 받으면서 빠르게 유저층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향후 몇 년 동안 린든 랩은 여러 가지 인상적인 지표를 보여줬다. 2006년 <세컨드 라이프>의 유저 ‘GDP’는 6,400만 달러(약 766억 원)에 달했다. 2008년의 누적 이용자는 1,600만 명으로, 한 해 동안 1억 800만 달러(1,292억)가 인게임 화폐 ‘린든 달러’로 환전됐다.

2006년 5월 '비즈니스 위크' 표지 (출처: 위키피디아)


# 현실 경제와의 연계

<세컨드 라이프>에는 현존 메타버스 프로젝트 대부분에서 이야기하는 ‘유저 생산 콘텐츠’ 기반 경제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었다. 유저들은 게임이 제공하는 어셋 제작 툴을 이용해 의류 등을 생산, 다른 유저들에 판매하고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2018년 출시한 국내 대표적 메타버스 서비스 <제페토>에도 구현된 기능이다. 2008년 기준 이러한 유저 콘텐츠 거래액은 3억 6,100만 달러(약 4320억 원)를 기록했다.

<세컨드 라이프>의 화제성과 경제 규모를 확인한 여러 기업은 <세컨드 라이프>에 빠르게 가상 사업을 꾸려나갔다. 2006년 로이터는 <세컨드 라이프> 전담 보도팀을 신설, 가상의 기자 ‘아담 로이터’를 게임 월드에 파견해 인게임 사건들을 보도했다. 이외에도 아메리칸 어페럴, 리복, 아디다스, 델, 아마존, 디즈니 등, 의류에서부터 테크, 콘텐츠 업계까지 분야를 막론하며 <세컨드 라이프> 속에 매장을 마련했다.

한편 <세컨드 라이프> 안에서 자체적으로 설립, 운영된 사업체도 많다. 이들은 <세컨드 라이프>에 몰린 자금력을 보여주는 예시이지만, <세컨드 라이프>에 대한 현실 규제 필요성을 대두시켰던 원인이기도 하다. 2007년의 사례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당시 린든 랩은 <세컨드 라이프> 내 운영되는 카지노들로 인해 FBI 조사를 받았다. 결국, 같은 해 8월 약관 개정을 통해 게임 내 모든 도박 행위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인게임 금융 기업들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발단이 된 것은 <세컨드 라이프> 속 투자은행 ‘긴코 파이낸셜’이다. 긴코 파이낸셜은 상당한 수익을 약속하며 투자자를 끌어모았지만, 75만 달러(8억 9,700만 원)에 달하는 자본을 상환하지 못한 채 파산했다. 당시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는 인게임 투자은행은 30여 개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세컨드 라이프>에 대한 현실 정부의 개입 필요성을 목소리가 높아졌으나 많은 <세컨드 라이프> 유저들은 게임 고유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에 유저들은 미국의 감시관청 증권거래위원회(SEC)를 벤치마킹한 ‘<세컨드 라이프> 거래위원회(SEC)를 발족해 자체적인 감시에 나서는 등 ‘자정’을 시도하기도 했다.

<세컨드 라이프> 인게임 화면 (출처: 위키피디아)

# 가상 부동산, 공연, 미팅까지

이외에도 현재의 대동소이한 메타버스 플랫폼들이 ‘피처’로 내세우는 여러 기능이 당시에 이미 구현되어 있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를테면 유저들은 린든 랩에 '린든 달러'를 내고 인게임 토지를 임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부동산을 다시 한 번 다른 유저들에게 분양해 집세를 받는 일도 가능했다.

가상 공연이나 미술품 전시도 흔하게 일어났다. 2009년 CNN은 <세컨드 라이프>에서 공연 팁 등으로 연간 1만 달러 수익을 올리는 가상 아티스트의 사연을 보도했다. 당시 기준으로 <세컨드 라이프> 상에 존재하는 아트 갤러리의 숫자는 600여 개가 넘었던 것으로 전한다.

비대면 필요성으로 인해 최근 메타버스의 ‘대표적 순기능’으로 자주 꼽히는 ‘가상현실 기업활동’ 역시 <세컨드 라이프>에서 이미 대규모로 시도된 바 있다.

2009년 린든 랩은 1,400개 이상 기업이 <세컨드 라이프> 내에서 회의, 교육, 기술 시연 등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시스코, 델, 제록스, 인텔, 유니레버 등 대형 기업들이 포함된다. 미국 컨설팅 기업 액센추어는 가상 신입사원 모집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렇듯 수많은 기업의 참여를 목격한 린든 랩은 기업용 보안 네트워크를 유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도 운영했고 IBM 등 14개 회사가 해당 서비스를 이용했다. 특히 IBM은 8만 달러를 투자해  가상 컨퍼런스 센터를 짓고 250여 명이 참여하는 가상 회의를 여는 등 적극 참여했다. 이를 통해 IBM은 35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절감 효과를 볼 수 있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세컨드 라이프>의 2020년 '가상 교육 컨퍼런스' 홍보 영상 중 (출처: 유튜브)


# 닥쳐온 위기, 버팀목 된 ‘충성 이용자’

이렇듯 ‘잘 나가던’ <세컨드 라이프>는 2000년대 말부터 새롭게 떠오르던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 플랫폼 때문에 위기를 맞는다. 다양한 콘텐츠와 높은 자유도를 자랑하는 <세컨드 라이프>였지만, 비용, 접근성, 보편성 측면에서 월등했던 소셜 미디어에 빠르게 이용자를 빼앗기기 시작했다.

린든 랩은 결국 2010년 11월 직원 30%를 해고하는 구조조정에 나선다. <세컨드 라이프>를 ‘브라우저 기반의 소셜 미디어 중심’ 서비스로 개편하는 체질개선의 일환이었다. 이는 물론 페이스북을 의식한 시도였다. 2011년 린든 랩은 <세컨드 라이프> 월간 접속자가 여전히 100만 명에 달한다고 밝혔지만, 동일 시기 페이스북의 월간 접속자는 그 다섯 배인 500만 명이었다.

이러한 ‘쇠퇴’에도 불구하고 <세컨드 라이프>의 충성 이용자층은 한동안 건재했다. <세컨드 라이프> 가 10주년을 맞은 2013년 발표된 여러 수치에서 알 수 있다. 2013년 기준 지속해서 서비스를 이용하는 유저 베이스는 60만 명에 달했고, 월간 누적 접속자는 이때도 100만 명 이상을 유지했다.

2013년 <세컨드 라이프> 유저 간 거래액은 32억 달러(약 3조 8,307억 원)이며, 이용자들의 거주하는 가상 부동산의 총면적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시의 14배 규모에 달한다고 린든 랩은 밝혔다. 이후 거래량은 꾸준히 줄어들었지만, 2022년 현재도 연간 6억 5,000만 달러(약 7,781 억 원) 가량이 거래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세컨드 라이프>의 2022년 '이용자 제작 명소' 홍보 영상 (출처: 유튜브)


# 우후죽순 메타버스 프로젝트, <세컨드 라이프> 넘어설 수 있을까

이처럼 <세컨드 라이프>의 이용자 수와 및 수익 규모는 비록 과거와 비교해 매우 줄어들었지만 ‘린든 랩’이 살아남기엔 충분한 수준으로 유지됐다.

그러나 <세컨드 라이프>가 가지고 있던 메타버스 플랫폼으로서의 위상과 잠재력은 전성기를 구가하던 2~3년이 지난 시점에 사실상 힘을 다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일반 대중이 <세컨드 라이프>에 불편함과 지루함을 느끼고 이탈하면서, 플랫폼이 현실 산업과의 연계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기업들로서는 투자 가치가 없는 사업 환경이 된 셈이다.

실제로 2008년 로이터는 <세컨드 라이프> 보도팀을 철수시켰다. 이미 해당 시점 수개월 이전부터 전혀 뉴스 보도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9년 경에는 여러 대기업이 앞다투어 마련했던 가상 매장들 역시 고객을 완전히 잃었다고 당시 유저들은 증언했다.

<세컨드 라이프>는 전 세계적 관심, 산업의 참여, 높은 자유도, 인게임 상거래 시스템 등 현세대 메타버스 담론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조건 중 상당수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 각계가 참여하는 종합 플랫폼으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충성 이용자들의 ‘소셜 플랫폼’으로서 더 많이 기능하고 있다. <세컨드 라이프>와 비교해 현격히 작은 규모로 기획되고 있는 국내 대다수 기관·기업의 ‘메타버스 수립 프로젝트’가 지니는 장래성에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대목이다. 

'메타'의 오큘러스 자문 존 카맥

또한 <세컨드 라이프>의 사례는 ‘단일 소프트웨어’로서 구현하는 메타버스 프로젝트의 여실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메타’의 존 카멕은 최근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이러한 접근법의 한계를 설명했다. 그는 “현재 대부분 메타버스 구현에 있어 <로블록스>와 같은 단일한 통합 앱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애플리케이션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관점에 의구심을 느낀다. 하나의 기업이 모든 선택을 올바르게 내릴 것이라고 믿기 힘들기 때문이다”고 전했다.

카맥의 말처럼, 린든 랩은 편의성이 점차 중시되는 IT 소비 트렌드를 다소 늦게 알아챘고, 그 잠깐의 지체는 페이스북에 밀려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편 국내 메타버스 프로젝트는 여러 주체의 합동 프로젝트가 아닌 단일 기업의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다. 우후죽순 돋아나고 있는 메타버스. 이 중 <세컨드 라이프>가 보여준 한계를 극복하고 수 년 후 온전히 기능하고 있을 플랫폼은 과연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