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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인간 심리 이용하는 과금 디자인, '선' 넘지 않으려면

UX 전략가 겸 인지과학자 실리아 호덴트 강연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방승언(톤톤) 2022-08-24 18:08:35

아무리 신체를 혹독하게 단련해도, 모든 근육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무의식적 영역까지 빈틈없이 제어할 방법 또한 없다. 그저 정도상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어느 한 부분에서는 비합리적 심리에 지배당하며 살아간다.

 

만약 기업들이 이렇게 통제하기 어려운 인간 심리를 교묘하게 공략해 수익을 창출한다면 어떨까? 한편으로는 다소 부도덕하게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적 모습이다. 스마트폰에 갑자기 뜬 ‘마감 임박’ 알림에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구매한 경험이 있다면, 소비자 심리를 파고드는 마케팅 전략에 공략당해 본 셈이다.

 

게임 업계에서는 어떨까? 특히 '과금형' 게임의 경우 고객 심리를 이용하는 방식의 BM은 과연 어느 수준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2022 데브컴 강연자로 나선 게임 UX 전략가 겸 심리학 박사이자 인지과학 전문가인 실리아 호덴트는 그 구체적 기준, 그리고 그 기준을 준수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하고 나섰다. ‘게임과 윤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호덴트의 강연을 간추려 소개한다.

 

실리아 호덴트(출처: 데브컴 홈페이지)

 

 

# 게임 개발의 ‘회색지대’

 

호덴트는 어떠한 과금 정책이 윤리적 '선'을 넘었는지 구분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제는 업계가 이러한 '회색지대'와 불순한(shady) 게임디자인을 식별하고 지양하고자 노력할 시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호덴트는 “이러한 경계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적당한 선을 찾는 노력을 시작해 접근성과 포용성을 갖춘, 그리고 유저를 존중하는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선'을 넘은 과금 디자인의 예시로는 무엇이 있을까? 호덴트는 업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UX 디자인 관행들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 확률형 아이템에 더 강하게 빠지는 심리학적 이유

 

호덴트는 특히 확률형 아이템의 과금 디자인이 어떤 경우 선을 넘는지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다. 우선 심리학적 관점에서 확률형 아이템은 ‘변동비율 강화계획’(variable ratio reinforcement schedule)에 기반한 ‘간헐적 보상’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교육심리학에 따르면 생물의 행동은 보상에 의해 강화(reinforce)될 수 있다. 여기서 강화란 생물에게 외부 자극을 주어 미래의 행동에 변화를 주는 것을 말한다. 흔히 동물들에게 먹이를 보상으로 주면서 특정 동작을 훈련시키는 행위를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때 행동에 대한 보상은 매번의 시행마다 꾸준히 주어지는 ‘연속 보상’과 확률에 따라 주어지는 ‘간헐적 보상’으로 나뉜다. 그런데 연속 보상보다 간헐적 보상의 강화 효과가 더 강력하고 오래 유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상을 확정적으로 줄 때보다 일정 확률로 지급할 때, 유저의 과금 가능성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가장 성공적 가챠게임 중 하나인 <원신>

 

호덴트는 “행동에 따른 보상 지급 확률을 ‘비율’이라고 얘기한다. (게임 디자인에서) ‘고정 비율’에 해당하는 직접적 예시로는 ‘도전과제’가 있다. 예를 들어 ‘잔디깎기로 좀비 10마리 죽이기’ 도전과제가 있다고 가정하자. 게이머는 보상(도전과제)을 얻기 위해 정확히 몇 회의 행동을 수행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이렇듯 행동에 따른 보상 획득 여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경우는 ‘고정 비율'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반면 확률형 아이템으로 분류되는 모든 종류의 인게임 메카닉은 ‘변동 비율'에 해당한다. 실제로 아이템의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 보상 내용을 알 수 없는 모든 형태의 보상이 여기 속한다. 변동 비율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유저 몰입감을 높이는 요소로 널리 활용되어왔다. 문제는 이를 이용해 수익을 창출하려 시도할 때부터다.

 

호덴트는 “체스 같은 드문 경우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게임에 몰입감을 위한 무작위성이 존재한다. 이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전환율과 수익성 증대를 목적으로 무작위성을 활용하는 시점부터는  문제가 시작된다. 게임이 이러한 선을 넘는 순간 ‘비윤리적’으로 볼 여지가 생긴다”고 전했다.

 

특히 이것이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대뇌에서 감정과 감정 통제를 관장하는 영역인 전두엽 피질은 성숙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전두엽 피질은 대뇌에서 가장 나중에 성숙해지는 영역이다. 25세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완전히 자라는 것으로 연구되어왔다. 간단히 말해, 어린 사람일수록 감정 통제가 어렵다는 얘기다.

 

인간의 감정통제 능력은 만 2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숙해진다.

 

 

# 또 다른 ‘회색 영역’들

 

확률형 아이템 말고도 게임 디자인에서 인간 사고의 한계를 이용하는 ‘회색 영역’은 몇몇 더 존재한다.

 

예를 들어 NFT 상품의 수요를 높이기 위해 ‘희소성의 환상’을 부추기는 경우, 제품 세일 기간을 매우 짧게 설정해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FOMO)을 자극하는 경우 등의 게임 설계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손실 회피성’(loss aversion)을 이용하는 사례도 있다. 인간의 정신은 실제로는 같은 값어치라 할지라도 이익보다 손해를 훨씬 크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같은 가치의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기존 소유물을 잃지 않으려는 심리적 경향을 더 강하게 느낀다. 어떤 게임이 “진척도를 잃지 않으려면 결제하라”고 유저의 과금을 요구한다면, 이는 손실 회피 심리를 악용해 돈을 번 사례로 볼 수 있다.

 

 

# ‘선’을 찾아내려면?

 

그런데 앞서 말했지만, 심리를 이용하는 게임 디자인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이런 디자인의 윤리성을 체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시스템이 ‘어째서’ 게임에 도입됐는지를 따져봄으로써 문제적 시간제한 디자인을 우리는 식별해낼 수 있다.​ 호덴트가 예시로 든 것은 ‘시간제한’ 유형의 콘텐츠들이다. 시간제한은 게임 디자인에서 매우 광폭하게 사용되는, 그 자체로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시스템이다.


호덴트는 “시간제한을 게임에서 제거하더라도 게임이 성립할 수 있는지, 시간제한 도입이 정말 게임플레이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주로 사업적 이유를 위한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시간제한 압박 없이도 게임플레이가 재미있을 수 있는지를 말이다. 또한, 이러한 압박이 특히 어린이들의 경우 더욱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설명했다.

 

즉 시간제한 시스템이 게임플레이에 필수적이며 도움이 될 수단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오로지 수익 창출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경우라면 인간의 보편적 약점을 악용해 돈을 벌었다는 측면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호덴트는 온라인 게임에 매우 흔한, 1회성 이벤트, 일일 이벤트, 시즌 한정 이벤트, 월간 이벤트 등도 모두 선을 넘은 디자인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간제한 콘텐츠는 무수한 게임에 등장하지만, 무엇을 위한 디자인인지에 따라 '선을 넘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 선을 넘지 않으려면

 

호덴트가 업계 전반에 요청하는 것은, 개발자들이 자신의 게임을 통해 유저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어넣고 있는지 스스로 더 잘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사업적 결정에 있어서 유저의 동의(consent)가 중요하다는 사실 또한 유념할 것을 촉구한다.

 

게임디자인 단계에서 모든 피처에 대해 유저들의 찬반의견을 구하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유저의 '동의'란 무슨 의미일까? 게임의 내용이 다소 괴팍하거나 일반적이지 않더라도, 이것을 유저가 사전에 알고만 있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의미다.

 

호덴트는 “유저가 끊임없이 죽어야 하는 게임이라 하더라도 유저들이 이 사실을 구매 전에 미리 알았다면, 구매를 통해 여기에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저가 해당 게임에서 무엇을 겪게 될지 미리 알고 있는지의 문제다”라고 전한다. 거꾸로 말해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기 전에는 알 수 없던 여러 BM들을 통해 결제를 유도한다면 이것은 동의를 구하지 않은 디자인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동의는 대상이 어린 게이머들일수록 복잡해질 수 있다. 어린이들은 게임 내용을 사전에 잘 이해하기 어렵고, 또한 일단 게임에 발을 들이고 난 뒤에는 특정 감정이나 압박감을 더 견디기 힘들어할 수 있어서다.

 

호덴트는 “그러므로 개발자들은 자신이 게임에 어떤 유형의 압박을 구현하고 있는지, 즉, 유저가 어떤 유형의 좌절(frustration)을 느끼도록 설계하고 있는지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자기 게임 디자인이 심리학적으로 유저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분명히 이해하고 선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불순한(shady) 디자인 관행들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하며, 확률형 아이템이 어떤 종류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지, 이때 이용되는 심리 현상은 무엇인지 등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할 때는 유료 확률형 아이템이나 앞서 언급된 심리 활용 디자인을 아예 재고하거나 포기해야 할 수도 있어야 한다.

 

 

감정 통제가 힘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게임일수록 디자인에서 윤리적 선을 넘지 않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한다.

 

 

# ‘리스크’ 될 수 있는 게임 디자인

 

호덴트는 “이러한 게임 디자인은 결국 부작용을 일으켜 개발사의 사업에 리스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발사들은 게임에 구현된 심리적 압박이 과연 게임플레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오로지 사업적 목표를 완수하기 위한 것인지를 스스로 자문해봐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처럼, 실제 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확률형 아이템 BM은 각종 규제에 직면하고 있다. 벨기에는 2018년부터 확률형 아이템 판매를 도박으로 규정해 금지했다. 2020년 여름 영국 상원은 확률형 아이템을 도박법으로 관리하라며 정부에 권고했고, 2021년 3월엔 독일 연방의회가 미성년자 대상 확률형 아이템 판매 금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2022년 6월에는 18개 유럽 국가의 20여 소비자단체가 확률형 아이템 규제법안 추진 통과를 위한 단체행동에 나섰고, 7월에는 네덜란드 여야 의원들이 확률형 아이템 전면 금지 법안 마련 촉구 성명문을 발표했다. 같은 달 스페인 정부 당국은 확률형 아이템의 광고 형태·시간부터 판매 대상 연령까지를 일신하는 강력한 규제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