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저 피드백을 잘 반영하고, 콘텐츠를 끊임없이 공급하겠다.' <디아블로 4>의 출시를 앞둔 블리자드가 유저·미디어를 대상으로 강조하는 정식 출시 후 운영 방침이다.
대형 게임사가 라이브서비스 차기작에 대해 내놓은 공약으로는 진부하다고 할 정도의 평범한 말이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블리자드의 다른 주력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오버워치 2> 개발진 역시 거의 똑같은 철학을 최근 반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않았을 뿐, 블리자드 개발팀 간의 통일된 기조가 마련된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 다른 두 게임의 현재를 통해 <디아블로 4>의 미래, 더 나아가 블리자드의 앞날도 짐작해 볼 수 있을까?
3월 있었던 <디아블로 4> OBT 직전, 한국을 찾아 기자들을 만난 로드 퍼거슨 총괄 매니저와 조 셸리 디렉터는 “이번 테스트는 진정한 의미의 테스트”라고 거듭 강조했다. 동어반복으로 들리지만, 속뜻은 조금 더 복잡하다. 두 사람은 최근 업계에서 베타 테스트가 게임 개선을 위한 실용적 방법론이 아닌, 마케팅 도구로 변질됐다고 짚었다.
한편 <디아블로 4> OBT는 정식 출시 시점까지 서버 상태 및 밸런스 등을 완벽하게 준비하기 위한 ‘진짜 테스트’라는 것이 이들의 이야기다. 이런 기조는 베타 종료 후 발표된 패치노트에서 좀 더 분명히 드러났다.
4월 14일, 공식 홈페이지에 올린 패치노트에서 개발진은 던전, 직업, UI, 기타 편의성 등에 대한 다수의 변경사항을 공개했다. 해당 패치에 대한 유저 반응은 꽤 호의적인데, 열거된 개선점 중 상당수가 실제 피드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던전 관련 패치를 살펴보면 개발진은 ‘공략 과정이 지루하다’는 피드백을 반영하기 위해 다각적 접근을 했다. 유저들이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총 9개 던전의 구조를 변경했고, 맵 어딘가 남은 소수의 적 때문에 던전이 클리어되지 않는 상황을 방지하고자, 무리에서 떨어진 몬스터들이 스스로 유저에게 찾아오게끔 했다.
또 눈길 가는 지점은, 제작진이 콘텐츠 플레이 템포를 바꾸는 근본적 차원의 변화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직접 들고 옮기는 퀘스트 오브젝트는 소지 중 이동속도가 25% 증가하며, 목적지에 내려놓고 나면 생명력·자원·물약이 한 번에 모두 회복되어 다음 전투를 속개하기 위한 탄력을 제공한다.
물론 지루함은 시간대비 할 일이 충분치 않을 때 발생하므로, 소요 시간 단축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그래서 개발진은 새로운 과제들도 유저들에게 던져줬다. 이제 던전 내에서 구조물(레버, 철창 등)을 작동할 때는 매번 전투 콘텐츠를 거쳐야 한다. 또한, 던전 내에서 이벤트가 등장할 확률이 10%에서 60%로 6배 증가해, 돌발적 경험을 훨씬 자주 겪을 수 있게 됐다.
개발진이 베타 단계에서 보여준 부지런함에도 <디아블로 4>를 기다리는 유저들은 완전히 마음을 놓지 못한 상태다. 개발진과 유저 모두 알고 있는 바, <디아블로 4>의 코어 경험은 엔드게임에 무게가 실려 있기 때문. 이에 관련해 블리자드는 '콘텐츠가 끊이지 않는' 장밋빛 미래를 약속으로 내걸었지만,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는 것이 요즘 게임 소비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더 나아가 <디아블로 4>는 통상적인 라이브서비스형 게임들과 달리 패키지게임의 풀 프라이스에 해당하는 69.99달러 가격(국내 84,500원)이 책정된 상황이다. 즉, 마음속으로 가격 대비 효용을 열심히 저울질하고 있을 유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블리자드는 사후 지원을 단단히 약속해 놓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정말 블리자드는 일각의 우려처럼 약속된 만큼의 콘텐츠 제공에 실패할까? 물론 확신할 수 없지만 최근 다른 블리자드 주력 게임들의 라이브서비스 기조를 살펴보는 것이 예측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최신 확장팩 <용군단>은 유저들이 오랜 시간 지적한 각종 편의성 문제를 대폭 개선하면서 출시 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시작부터 이용할 수 있는 ‘용 조련술’, 편리해진 퀘스트 구조, 빠른 육성, HUD 개선 등을 통해 불편함으로 꼽히던 문제 대부분이 보완되면서, 기존 유저들은 <용군단>을 ‘신규 유저가 진입하기 가장 좋은 확장팩’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콘텐츠 추가 사이클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올해 총 6회에 걸친 대형 콘텐츠 업데이트를 단행할 예정이다. 이전 확장팩 <어둠땅>의 경우 2020~2022년에 걸쳐 대형/소형 콘텐츠 업데이트와 일반 패치 노트를 모두 합쳐 9회였던 것에 비해 크게 늘었다. 블리자드는 “유저가 현재 즐기는 콘텐츠가 다 소모될 때쯤 새로운 업데이트가 출시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힌 바 있다.
이를 위해 제작 파이프라인을 조정하는 등 제작 프로세스에 변화를 줬다는 사실을 유념할 만하다. 지난 3월 <용군단> 10.1 업데이트 인터뷰에서 제작진은 기존 대비 지속적 콘텐츠 공급이 가능해진 비결에 대해 “변화된 점 중 하나는 팀 인원이 전부 현행 콘텐츠 작업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일부 인원은 다음 콘텐츠, 혹은 그 다음 콘텐츠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답했다.
또한 <용군단> 10.0 버전에서 유저들은 기존대비 빈번한 직업 밸런스 패치 등, 작지만 지속적인 게임 개선에도 긍정적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이 또한 전담 팀원을 두는 등의 노력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다. 제작진은 “개발팀 일부는 커뮤니티와 유저 반응을 살피면서 유의미한 변화를 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한다”고 전했다.
콘텐츠 운영에 있어 더 극적인 변화를 보인 블리자드 타이틀은 <오버워치>다.
<오버워치>는 1편의 마지막 2~3년 동안 콘텐츠 가뭄과 소극적 밸런스 변경으로 인해 유저 경험에 유의미한 변화를 주지 못하면서 팬덤 대부분을 잃었던 전력이 있다.
그랬던 블리자드는 <오버워치 2> 베타 서비스에 접어들어 운영 기조를 바꾸면서 앞선 두 게임과 마찬가지로 '잦은 콘텐츠 공급과 밸런스 변화'를 예고했던 바 있다. 단적인 예시로 2022년 4월 베타부터 현재까지 약 1년여간 추가된 신규 캐릭터 수는 5명으로, 2020년부터 2022년까지 2~3년 동안 추가된 캐릭터가 ‘에코’ 하나뿐이었음을 생각하면 큰 차이를 보인다.
다만 <오버워치> 1편의 기나긴 업데이트 공백기를 고려할 때, <오버워치 2>의 초기 신규 캐릭터 수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더 나아가 5대5 시스템으로 인한 1편과의 게임성 차이 문제까지 중첩되면서, 서비스 초반 상당수 복귀 유저가 게임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2편은-기대에 못 미치는 캐릭터 수에도 불구하고-게임 경험의 유의미한 변화 측면에서는 여전히 1편과 비교해 큰 차이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훨씬 더 가변적이고 다양화된 PvP 메타에 기인한다. 먼저 약 2개월에 걸쳐 진행되는 시즌 동안 4~5번의 밸런스 패치를 계속하고 있다. 1편의 밸런스 패치가 2021년 말부터 월간 1회가량 이뤄졌던 것과 대조를 보인다.
더 주목할 것은 패치의 영향력이다. 출시 전 개발진은 “시즌마다 메타를 달리해, 유저들이 각각의 시즌을 해당 메타로 추억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시즌마다의 밸런스 구성을 서로 확연히 구분하겠다는 취지인데, 실제로 현재<오버워치 2>는 대형 밸런스 패치가 이뤄질 때마다 영웅 인기도가 달라지면서 메타도 따라 변경되는 추세다.
메타 내의 선택 폭도 기존 대비 넓어진 편이다. 1편 내내 비주류 신세를 면치 못했던 ‘시메트라’, ‘토르비욘’ 등 캐릭터가 유저 매치와 프로 경기 등에서 등장하는 현상이 눈에 띄고 있다. 2편 들어 역할이 강화된 탱커 영웅군은 한 라운드 안에서도 4~5번 픽 전환이 이뤄질 정도로 각자의 활용도가 강화됐다.
그러나 유저들의 불만이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던 '1편의 악몽'을 되새기게 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2편에 '얼리기'가 삭제되면서 크게 외면당하고 있는 ‘메이’, 그리고 너프로 ‘한방 킬’이 어려워지면서 마찬가지로 찬밥 신세가 된 ‘로드호그’ 등 캐릭터의 밸런스 문제 해결은 1편에서처럼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 속에서도 유저들의 부정적 반응은 훨씬 덜 한데, 1편과 달라진 개발진의 개방된 태도 때문이다. 메이와 유사하게 스턴 능력이 삭제되면서 2편에 들어 거의 쓰이지 못했던 지원가 ‘브리기테’의 사례를 통해 이를 살펴볼 수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진행된 2시즌 당시 블리자드는 브리기테를 ‘리워크’(재설계)해 다시 메타에 복귀시킬 예정이라고 밝히고, 그 시점은 4시즌 전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투명하게 털어놓았다. 유저의 불만 인식과 해결 방향, 예상 해결 시점까지 공개하는 이러한 의사 전달은 1편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던 유형이다.
실제로 4시즌 들어 브리기테는 궁극기에서 큰 버프를 받으면서 다시 매칭에서 눈에 띄고 있다. 블리자드는 메이와 로드호그에도 ‘리워크’를 예고한 상태다.
물론 위에 나열된 블리자드의 최근 태도 변화가 유저들의 불만 혹은 게임의 문제점을 일거에 해소해 주는 ‘마법 포션’은 아니다. 예를 들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국내 유저들은 지속적인 렉 문제를 호소하고 있으며, <오버워치 2> 유저들의 경우 경쟁전에서 티어 격차가 큰 플레이어끼리 한 팀에 배정되는 ‘하이큐/로우큐’ 현상을 큰 문제로 꼽고 있지만, 아직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더 나아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오버워치> 두 게임 모두 인기 절정의 순간이 꽤 오래 지난 현재 시점에 이르러 적극적 개선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블리자드의 현재 태도를 마냥 긍정적으로 칭찬하기 어렵게 만드는 더 큰 원인이다.
'있을 때 잘하지'라는 해묵은 표현이 머릿속에 절로 맴돈다. 실제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유저들은 '역대급' 확장팩의 등장에도 복귀/신규 유저가 충분치 않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오버워치 2>도 이전의 영광을 아직 되찾지 못한 사정은 마찬가지다. '콘텐츠 공급과 기민한 피드백'을 골자로 유저 마음 되찾기에 골몰하는 듯한 블리자드,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