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게임시장, 특히 MMORPG 경쟁은 그야말로 치열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게임이 등장하죠. 무조건 대작이라고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뚜렷한 특징이 있거나 남보다 나은 장점이 있어야 그나마 성공에 한 발 가까워집니다.
또한 한국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이고 아시아권에서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한국 게임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양 대비 고퀄리티 MMORPG입니다.
KGC 2010에서 나온 저사양 고퀄리티 MMORPG에 대한 이야기는 <에이카>를 만든 한빛소프트 정진호 PD가 담당했습니다. 현장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글을 풀어서 정리했습니다. /디스이즈게임 박상범 기자
■ 공존하기 힘든 딜레마, 저사양과 고퀄리티
저사양 게임은 유저의 제한이 적습니다. 모두들 고사양 PC를 갖고 있진 않기 때문이죠. 그리고 클라이언트의 다운로드 시간이 짧은 등 유저의 접근성이 좋습니다. 반대로 고사양 게임은 접근성이 나쁘다는 얘기가 되겠죠.
일례로 동남아시아나 남미 시장에서 게임을 론칭하려면 CD 1장 이내의 용량을 가진 클라이언트여야 합니다. 아직도 PC에 DVD 드라이브가 없는 나라가 많기 때문입니다. PC방에 뿌릴 홍보용 DVD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거죠.
물론 고용량 게임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유저의 애착이 저용량 게임에 비해 더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작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도 있지만, 다운로드하는 데 쓴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죠.
높은 퀄리티는 유저에게 게임의 첫인상을 심어 주는 요소입니다. 퀄리티가 낮아 보이면, 그 뒤에 아무리 재미있는 시스템을 제공해도 그곳에 도달하기도 훨씬 전에 유저가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퀄리티는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고퀄리티는 고사양을 요구하기 때문에 유저 풀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리소스가 많기 때문에 고용량을 요구하고, 그걸 개발하려면 인원이 많아지고, 그렇게 되면 개발 기간이 길어지고, 그러면 개발비가 많이 드는 악순환이 발생하죠.
물론 대형 개발사는 큰 상관이 없지만, 자금이 부족한 중소 개발사는 대작이 흥행이 안 되면 망할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사양-저용량-고퀄리티 게임의 개발이 가능하다면 정말로 이상적인 경우겠죠. 유저의 접근성도 높고, 첫인상도 좋으며, 개발기간과 개발인원, 개발비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완벽한 저사양-저용량-고퀄리티 게임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게임은 사람이 만들고, 그들이 만드는 결과물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죠. 그래도 작업할 때 이를 염두에 두면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사양 대비 고퀄리티 게임인 것입니다.
<에이카>는 지포스4 MX에서도 위 그래픽의 80%는 표현이 가능하다.
■ 사양 대비 고퀄리티 게임 <에이카>, 이렇게 개발했다
제가 사양 대비 고퀄리티 게임으로 개발을 진행한 것이 바로 <에이카>입니다. 먼저 저사양 저용량을 실현해 냈습니다. CBT 인스톨본이 203MB, OBT 인스톨본이 310MB, 올해 초 업데이트인 EPIC-1의 인스톨본이 440MB, 최근 최고의 대규모 패치가 투입된 EPIC-2가 520MB로 다른 MMORPG에 비해 상당히 적은 용량이죠.
그리고 아직도 최소 필요 메모리는 512MB, 최소 그래픽카드는 버텍스 쉐이더 1.1과 픽셀 쉐이더 1.1이 지원되는 지포스4 MX 시리즈입니다.
또한 높은 퀄리티를 끌어내기 위해 실사 스타일보다 반 실사의 그래픽을 추구했습니다. 과도한 픽셀 쉐이더를 이용한 포스트 이펙트를 자제한 대신 버텍스 쉐이더를 최대한 활용했죠.
여기에 라이트 맵을 사용해 퀄리티와 퍼포먼스를 높인 것은 물론 초당 프레임을 높여 부드러운 움직임을 이끌어내서 퀄리티가 높게 느껴지도록 했습니다. 스크린샷을 보면 좋은 게임이 실제로는 4~5 프레임이 나오면 그리 좋은 인상은 주지 못하죠.
고사양 고퀄리티 게임은 2~3년 후의 PC 사양을 예측해 개발을 진행하는데, 만약 예측보다 사양이 낮을 경우엔 개발 후반부에 최적화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사양 고퀄리티 게임은 초기부터 낮은 스펙으로 개발을 진행하기 때문에 후반부 최적화 작업이 거의 필요없어 낭비가 적습니다. 그만큼 콘텐츠나 시스템 완성도를 높이는 데 개발력을 모을 수 있죠.
<에이카>에서 유저의 동반자로 나오는 프란.
물론 우리가 완벽한 사양 대비 고퀄리티 게임을 만든 건 아닙니다. 처음에 스펙을 너무 낮게 잡아서 후회했거든요. 이게 심하면 퀄리티를 포기하는 수가 발생할 수 있고, 개발 중간에 퀄리티 상향 작업이 추가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적당한 조절이 필요합니다.
캐릭터 그래픽의 경우 개발 당시 어중간한 노멀 맵보다는 붓질이 잘 된 디퓨즈 맵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에 조금 오래됐지만 쓸만한 기술들을 사용해 호환성을 극대화했습니다. 또한 많은 캐릭터가 나와도 전쟁 플레이가 용이하도록 애니메이션 프레임과 본(Bone)의 수를 절약했습니다. 하지만 캐릭터의 눈과 입에 본이 없는 게 가장 치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어도 눈을 뜨고 있는 캐릭터를 보면 섬뜩합니다. 대신 프란에 퀄리티를 집중했습니다.
배경 그래픽에서도 리소스 절약의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게임의 콘셉트에서 비롯됐죠. <에이카>의 경우 게임의 배경이 하늘에 떠 있는 섬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5개지만, 배경 리소스를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땅이었다면 5배의 배경이 필요했겠죠.
이렇게 리소스는 적지만 정성을 들여 퀄리티를 높이는 게 중요합니다. 풀 한 포기를 심더라도 정성 들여 심는 등 평당 단가를 높이는 거죠. 그리고 각 분위기에 어울리는 물을 선택적으로 쓰는 등 필요한 부분에만 기술을 사용하는 게 좋습니다.
스플래팅 대신 고전 타일 방식을 사용한 <에이카>.
지금은 시대가 변했으니 이젠 스플래팅을 써도 될 것이라고….
그리고 메모리 절약을 위해 프로그램에선 아껴서 쓰고, 저축하는 코딩 습관이 필요합니다. 아래의 예처럼 사이즈가 4바이트 차이지만 이것이 배경이라고 한다면 그 차이는 커집니다. 오브젝트는 최대값이 정해진 메모리 풀을 이용하고, 실시간 계산을 최대한 자제하며 조금 오래됐지만 쓸 만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외에도 꼼꼼한 리소스 관리자가 필요하고, 저용량 클라이언트를 위해 사운드 포맷은 타격 부분 등에 주로 쓰는 WAV대신 MP3이나 OGG를 쓰면 좋습니다.
하지만 저사양 고퀄리티 구현에도 난제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작업은 아티스트들이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죠. 이를 위해선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만약 그것이 힘들다면 잠재력이 있는 신인을 영입하고, 이들을 잘 키워 줄 명인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에이카>는 고퀄리티보다 저사양 저용량 게임에 조금 더 치우쳤지만 나름대로 목표를 달성했다고 봅니다. 퀄리티는 개발비와 직결되는데, 개발비 대비 버는 돈이 많으면 그것이 효자 게임이거든요.
따라서 저사양 고퀄리티 게임을 개발하려면 최적화를 위해 퀄리티를 얼마나 희생할지, 퀄리티를 위해 최적화를 얼마나 희생할지를 잘 선택해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