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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AI 발전이 남긴 찌꺼기 '슬롭', 게임 시장 덮쳤다

짝퉁 게임과 자기복제 게임이 플랫폼 점령…관련 대책 필요해

한지훈(퀴온) 2025-02-05 18:21:14
여기, 한 게임을 소개하려 한다. 영화 <주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동물 캐릭터들이 테이블에 모여 목숨을 건 도박을 즐긴다는 내용의 게임이다. <라이어스 바>라는 이 게임은 지난해 10월 스팀 얼리 엑세스로 출시된 후 게이머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인기를 얻었다.

얼마 전 기자는 우연히 PS 스토어에서 비슷한 게임을 발견했다. 거친 바이커 스타일의 동물 캐릭터들이 술집에서 카드 게임을 즐기는 모습은 <라이어스 바>와 흡사했지만, 분명히 달랐다. 게임 제목은 <풀스 펍>이었고, 개발사도 달랐다. 무엇보다 게임 썸네일의 그래픽은 AI가 생성한 듯한 독특한 화풍이 특징이었다. 이른바 '짝퉁 게임'인 셈이다.


화제가 된 <라이어스 바>와,


이를 그대로 복제한 <풀스 펍>. 퀼리티 차이가 상당하다.

취재 과정에서 확인한 결과, 비슷한 이름으로 출시된 게임이 또 있었다.


# AI가 남긴 저급한 찌꺼기, ‘슬롭’


이러한 AI 이미지로 포장된 짝퉁 게임을 'AI 슬롭' 또는 간단히 '슬롭'이라 부른다. 슬롭(slop)은 본래 가축용 음식 찌꺼기를 의미했으나, 최근에는 AI로 제작되어 소비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저품질 콘텐츠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되었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스팸과 유사한 개념이다.

<풀스 펍>과 같은 사례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모여봐요 동물의 숲>의 모방작부터, 공포 게임 <마우스워싱>의 이름과 이미지를 도용한 게임이 PS 스토어에 올라와 있다. 심지어 닌텐도 e숍에서는 <TCG 카드 숍 시뮬레이터>를 노골적으로 모방한 게임이 판매 중이다.

이러한 짝퉁 게임으로 인한 피해 사례도 있다. 인디 게임 <언패킹>의 개발자 렌 브라이어(Wren Brier)는 최근 SNS를 통해 닌텐도 e숍에서 자신의 게임을 표절한 사례를 공개했다. 이 복제 게임들은 <언패킹>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디럭스 에디션', '뉴 챕터' 등의 부제를 추가해 소비자들을 현혹했다. 브라이어가 닌텐도에 해당 게임의 판매 중단을 요청했으나, 실제 조치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기존 게임 도용 외에도,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특정 기념일을 겨냥해 AI 생성 이미지를 활용한 게임들도 슬롭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게임들은 대부분 게임의 실제 내용과 무관한 이미지로 포장되어 있으며, 게임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완성도가 낮다. 이들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대량 생산되어 PS 스토어와 닌텐도 e숍 같은 플랫폼의 질을 저하시키고 있다.


<언패킹>의 복제 게임은 원본 게임과 함께 나란히 닌텐도 e숍에 등록되어 소비자들을 현혹했다.


특정 게임을 복제한 게임이 아니더라도 이런 게임들 역시 슬롭에 속한다.


# 쏟아지는 슬롭, 대책은 있나?

이러한 슬롭의 생산을 근절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대부분의 슬롭이 소수의 개발사(실제 회사인지는 확인할 수 없는)에 의해 제작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보를 철저히 숨기고,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개발사명을 수시로 변경하며 활동하여 추적이 어렵다. 조사 결과, 한 슬롭 전문 개발사는 10개가 넘는 개발사명을 번갈아 사용하며 슬롭을 대량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대응 방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슬롭은 결국 플랫폼을 통해 유통되므로, 플랫폼 차원의 조치로 피해를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플랫폼들은 이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언패킹>의 복제 게임 사례처럼 신고가 접수된 경우에만 대응할 뿐, 다수의 해외 언론이 입장을 요청했음에도 공식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IGN의 조사에 의하면, 대부분의 게임 유통 플랫폼은 게임 등록 시 개발자나 퍼블리셔로부터 기본적인 정보만 확인한다. 싱글플레이어 또는 멀티플레이어 여부, 지원 컨트롤러 종류, 등급 분류 여부 정도만 검토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많은 사람들이 플랫폼의 게임 등록 과정에 QA 검수가 포함되어 있다고 오해한다"며, "플랫폼은 단순히 하드웨어 사양 준수 여부만 확인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3대 콘솔 스토어 모두 플랫폼 내 AI 활용 여부를 표시하지 않고 있다. 스팀은 게임 등록 시 개발자에게 AI 활용 여부를 확인하고 이를 공개하지만, AI 사용 자체를 제한하지는 않는다.

다만 Xbox는 슬롭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타 플랫폼보다 엄격한 게임 심사 기준을 적용하고, 출시 후에도 스토어 페이지를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게임 개발자들의 평가다. 반면 PS 스토어와 닌텐도 e숍은 세일과 DLC 출시를 통해 스토어 상단에 게임을 노출시키는 편법이 공공연히 알려져 있을 만큼 관리가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Xbox의 경우 없진 않지만 노출되는 슬롭의 개수가 비교적 적은 편이다.


플랫폼의 미흡한 대처에 이용자들이 직접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닌텐도 커뮤니티인 닌텐도 라이프는 최근 슬롭 문제 해결을 위해 자체 유통 서비스 '베터 e숍'을 출시했다. "더 나은 (닌텐도) e숍"을 표방하는 이 서비스는 자체 개발한 도구로 AI 생성 이미지를 검수하고 이를 명시하며, 이용자 신고를 통해 슬롭 의심 게임의 판매를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강화된 검수 기준으로 인해 AI를 정당하게 활용한 게임이 슬롭으로 오인되거나, 제보 내용을 바탕으로 게임 장르가 잘못 분류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베터 e숍은 슬롭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AI 생성 이미지를 표시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슬롭 문제의 책임 소재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앞서 언급한 플랫폼의 기준과 조치를 고려할 때 플랫폼이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플랫폼 역시 슬롭으로 인한 피해자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IGN과 만난 한 업계 관계자는 "플랫폼의 역할이 등록된 게임을 '좋은 게임'과 '나쁜 게임'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플랫폼도 저품질 게임의 범람을 원치 않지만, 어떤 게임이 슬롭이고 어떤 게임이 순수한 창작물인지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슬롭은 AI 발전이 남긴 '디지털 찌꺼기'로 우리 곁에 자리 잡았다. 30년 전과 달리 국내 게임의 해외 진출이 용이해진 현재, 창작자와 게임 이용자 보호를 위한 국내 차원의 대응 방안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AI를 활용해 게임을 개발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요청하자 챗GPT가 생성한 이미지다.
AI의 발전으로 누구든 원하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게 됐으나, 반대급부로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에 현혹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