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배가 항구를 떠나는 그 순간의 방향이 전체 항해의 운명을 결정하는 법이다. 어떤 단체든 그 첫 대외 행사는 그 단체의 정체성과 지향을 천명하는 중요한 이정표다. 특히 첫 기조연설은 나침반과 같아서 지향점과 결의가 담기기 마련이다. 이는 학문의 세계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21일, 세계 최대 게임 학회인 디그라의 한국 지회가 첫 항해의 닻을 올렸다. 초대 학회장인 윤태진 연세대 교수는 게임의 본질적 가치인 '즐거움'을 재조명하며, 게임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윤태진 교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 중 하나로 본다.
그의 발표에 따르면, 인간을 이해하는 기존의 관점들은 주로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해왔다. '지혜로운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와 사고능력을 통해 인간을 정의했고, '도구를 만드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 파베르는 노동과 생산 활동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관점들은 각각 인간의 지적 능력과 생산 능력을 강조하며 근대 산업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 교수는 '놀이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 루덴스에 주목한다. 호모 루덴스는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가 1938년에 발표한 저서이자, '놀이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이 책에서 하위징아는 놀이가 문화의 근원이며, 인간의 모든 문화 활동(예술, 철학, 법, 전쟁 등)이 본질적으로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호모 사피엔스)나 도구를 만드는 존재(호모 파베르)를 넘어, 놀이를 통해 의미와 즐거움을 창조하는 존재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다.
윤 교수는 이러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순수하게 반영하는 발명품이 바로 게임이라고 말한다. 디지털 게임에서는 게임 세계와 현실 세계가 서로 맞닿아 있으며, 게임을 즐기는 행위는 외부의 보상이 아닌 순수한 재미 자체를 추구하고, 이는 정해진 규칙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윤 교수는 근대 자본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 '놀이'로서의 게임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게임의 정체성은 인간 본성의 발현이란 측면에서 여러 특성을 지닌다. 먼저 게임의 즐거움은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인 층위를 가지고 있으며, 게임이 제공하는 자유도는 플레이어에게 즉각적인 재미와 창의적 표현의 기회를 준다.
하지만 게임 세계는 가학성, 사행성, 폭력성과 같은 사악한 즐거움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윤 교수는 '에피쿠로스적 사고'가 게임의 사악한 즐거움을 극복하는 계기가 된다고 말한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기원전 4세기 말 아테네에서 창설되었다. 이들은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봤다 하여 쾌락주의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는 큰 오해다. 이들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주장했던 '아타락시아' 개념을 보면 알 수 있다. '아타락시아'는 육체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불안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를 최소한으로 충족한 상태다. 단기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이 아니다.
윤 교수는 "즐겁게 살지 않고서는 지혜롭고 고귀하고 정의롭게 살 수 없으며, 지혜롭고 고귀하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서는 즐겁게 살 수 없다"라는 에피쿠로스의 통찰을 인용하며, 게임이 주는 즐거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넘어설 것을 역설했다.

그는 "진정한 즐거움은 육체적 쾌락이나 명예가 아닌, 평온한 마음과 절제된 삶에서 비롯된다"는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게임 연구에 접목하며 연설을 마무리한다.
에피쿠로스와 그의 제자들이 아테네 교외의 정원에서 함께 모여 철학을 탐구하며 진정한 즐거움을 추구했듯이, 디그라는 게임을 통해 형성되는 공동체적 즐거움, 함께 나누는 기쁨의 가치를 재발견하고자 한다. 윤 교수는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게임이 제공하는 즐거움의 본질을 탐구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윤 교수는 "게임 연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연구하는 것"이라는 핵심 메시지를 강조했다. 이는 게임 연구가 단순한 기술이나 산업 연구를 넘어, 인간의 본질과 행위, 그리고 공동체적 가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2024년 3월 출범한 디그라 한국 학회는 이러한 비전을 바탕으로, 게임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윤 교수는 "국제적 교류와 학문 후속세대 양성을 통해, 게임 연구의 학제적 접근을 지향하는 학문공동체를 만들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