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회원 1,200만 명 이상 보유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는 여전히 글로벌 MMORPG 정상에 올라 있다. 하지만 <WoW>는 나이 들고 있다. 세월 앞에 장사는 없다. 확장팩이 이어지면서 시스템은 점점 복잡해지고, 오리지널 콘텐츠와 신규 콘텐츠의 퀄리티 차이도 벌어지고 있다. 로열티가 높은 ‘하드코어 유저’를 놓치지 않으면서 새로운 유저도 계속 끌어들여야 한다.
블리자드 개발진이 세 번째 확장팩 <대격변>을 기획하면서 가졌던 고민들이다. 게임 디렉터 톰 칠튼은 GDC 2011 강연에서 <대격변>의 기획적인 고민과 개발 철학을 밝혔다. ‘도넛 이론’과 ‘1/3의 법칙’이 흥미를 끌었던 ‘대격변으로 WoW 다시 만들기’를 정리했다. /샌프란시스코(미국)=디스이즈게임 이재진 기자
블리자드는 두 번째 확장팩 <리치왕의 분노> 개발 마무리 단계에서 <대격변>의 콘셉트를 잡기 시작했다. <WoW>는 점점 나이를 먹고 있었다. 새로 만드는 콘텐츠는 이전 콘텐츠에 비해 퀄리티가 좋았지만, 문제는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WoW> 개발진은 블리자드 내부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개발 철학 ‘도넛 이론’을 바탕으로 <대격변>을 준비했다.
콘텐츠가 나이를 먹으면서 <WoW> 개발진의 고민도 늘어났다.
도넛 안의 핵심 유저를 놓치지 않으면서 대중적인 신규 유저를 계속 끌어들이는 것.
코어 시장 + 캐주얼 시장을 모두 가져가려는 것이 블리자드의 도넛 이론이다.
<대격변>의 개발 철학은 크게 세 가지. 플레이 패턴에 상관 없이 대부분의 유저에게 레벨업에 따른 효과와 혜택을 주고 싶었다. 아울러 핵심 시스템이 쌓이면서 너무 복잡해진 콘텐츠의 ‘나뭇가지’를 칠 필요도 있었다. 그렇다고 몽땅 뒤집어 엎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래서 세운 기준이 1/3은 옛날 것으로, 1/3은 개선된 것으로, 1/3은 새로운 것으로 만드는 ‘1/3의 법칙’이었다.
<대격변>을 만들면서 세운 블리자드의 개발 철학.
확장팩의 이름처럼 ‘대격변’을 일으켜야 했지만, <WoW>가 가진 고유의 장점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WoW>의 ‘세계’는 분명 높은 경쟁력을 갖고 있다. 아제로스는 매력적이고 여전히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힘이 있다. 위험과 모험이 공존하는 멋진 지역으로, <WoW> ‘오리지널의 정신’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WoW> 오리지널의 매력을 유지하면서 대격변을 일으키는 것이 과제였다.
그렇다고 아제로스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존(zone) 콘텐츠와 게임구조는 오래된 것들이다. (옛날에 만든 것이다 보니) 결국 누굴 죽이거나, 무엇인가 모아 오거나, 배달하는 심부름 퀘스트들이 대부분이다. (이제 와서 보니) 게임의 동선도 나빴다. 톰 칠튼은 “오리지널은 별로였다”며 지금 와서 보면 아쉬운 것이 많다고 했다. 심지어 “(W 키만 눌러서) 직진만 해도 된다”며 일직선 형태의 밋밋한 흐름이 문제였다고 꼬집어 말했다.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오리지널 콘텐츠들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대격변’이 필요했다. 오리지널의 정신을 유지하면서 게임의 동선과 구조를 개선하고, 이야기를 발전시켜야 했다. 물론 모든 존을 개편하는 건 물리적으로 힘드니 ‘우선순위’를 정하는 작업도 중요했다. 그래서 개발진은 아제로스에서 개편이 시급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을 나눴다.
빨간색/노란색/녹색으로 나눠진 월드맵. 개편 대상 지역을 정하는 작업이었다.
<대격변>의 대상 지역을 결정하는 회의를 하던 당시의 개발진.
낡은 게임구조를 개선할 부분이 많이 눈에 띄었다.
■ 잊혀진 땅과 서부몰락지대의 대격변
톰 칠튼은 <대격변>에서 이루어진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대표적인 지역과 콘텐츠를 예로 들었다.
첫 번째 사례는 ‘잊혀진 땅(Desolace)’. 문제가 쌓여 있었다. 단조롭고 답답했다. 유저가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기보다 짜증 나게 만드는 부분이 많았다. 돌아다니고 게임을 진행하는 흐름도 나빴다.
개발진은 <대격변>을 위해 잊혀진 땅의 비주얼을 업그레이드했다. 동시에 세나리온의 재성장으로 스토리가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과연 맞는 결정이었을까? 톰 칠튼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더 심하게 잊혀진 땅’이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례는 ‘서부몰락지대(Westfall)’. 데피아즈단 스토리의 정점을 찍는 지역이다. 엘윈 숲에서 이어지는 흐름도 좋았다. 그래서 전체적인 윤곽을 유지하면서, ‘대격변’에 따른 지형 변화를 조금만 적용했다. 다만 구닥다리 구조와 흐름에 문제가 있었다. 퀘스트 구조를 고치고, 스토리 라인을 다듬었다. 결과는 옳았을까? 톰 칠튼은 “그렇다”고 자신 있게 자문자답했다.
서부몰락지대는 원형을 유지하면서 내부 콘텐츠의 품질만 다듬어졌다.
■ <모던 워페어>에서 영감을 얻은 특성 개편
세 번째 사례는 지역이 아닌 ‘특성(Talent)’이다. 특성은 일종의 선택 시스템으로 유저가 같은 직업을 선택한 다른 유저와 똑같은 ‘판박이’가 아님을 느끼게 만드는 콘텐츠였다. 이는 게임의 생명력과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확장팩이 계속 나오다 보니 이것도 복잡해졌다. 사람으로 따지면 마치 ‘부어 있는’ 느낌이었다.
더 많은 선택은 얼핏 좋아 보였지만, 반복하다 보니 결국 유저들은 효율성이 좋은 3%만 선택했다. 왜? 던전에 갈 때 안 끼워주니까. 블리자드는 <대격변>을 준비하면서 “특성이 선택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나?”를 반문해 보았다. 심지어 ‘혹시 더 나은 시스템은 없는 걸까?’ 하는 고민도 하게 됐다.
비대해진 특성 시스템의 군살을 덜어내는 것도 중요한 ‘대격변’이었다.
하지만 특성이라는 시스템은 <WoW>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장르는 다르지만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의 멀티플레이 특전(perk)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면서 개선에 착수했다.
같은 회사(액티비전블리자드)의 형제 게임 <모던 워페어> 시리즈에서
<WoW> 특성 시스템 개편의 영감을 얻었다.
톰 칠튼은 “(특성의) 트리가 크다고 좋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커스터마이징 옵션이 다양해지지 않는다”며 한때 과거의 오류를 반성했다.
■ “최선의 기획이 꼭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톰 칠튼은 “오리지널에서 위대했던 것을 깊이 있게,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싸울(고칠) 곳을 제대로 골라야 한다”고도 조언했다.
무조건 다 바꾼다고 좋은 것도 아니며, 최선의 기획안이라고 생각한 것이 반드시 최선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끝으로 그는 “1/3의 법칙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지 말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