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사람들은 이 ‘뻥’들을 믿게 된 걸까? 게임 시나리오와 일반 시나리오는 무엇이 다를까? 유지근 과장의 강연을 정리했다.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 좋은 시나리오를 위한 다섯 가지 성분
유지근 과장은 먼저 ‘좋은 시나리오를 위한 5가지 성분’을 언급했다. 단순성, 의외성, 구체성, 신뢰성, 그리고 감성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는 일단 이야기가 단순해야 한다. 대표적인 게 속담이다. ‘세 가지를 말하는 것은 한 가지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듯 이야기는 단순할수록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좋은 이야기에는 상식을 부수는 의외성도 필요하다. 영화 <식스센스>는 ‘브루스 윌리스가 ○○’이라는 반전 하나로 기억 속에 남았고, 자신을 끌어안은 애인 뒤에서 그 친구의 손을 잡은 여자의 사진은 전설로 남았다. 이야기의 의외성 때문이다.
세 번째는 구체성이다. 막연한 설명보다는 구체적인 메시지가 기억에 남는다. 예를 들어, 펩시콜라가 업계 1위로 압도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해보자. 하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의 콜라에 몰래 펩시콜라를 붓고 있는 코카콜라 종업원의 사진 한 장이 더 기억에 남는다. 복잡한 숫자나 막연한 설명보다는 ‘더 맛있는 콜라를 마시고 싶다’는 구체적인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신뢰성이다. 말 그대로 어떤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것’이다. 지상파방송 9시 뉴스에서 매번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는 이유도 신뢰성 때문이다. ‘내 친구의 친구에게 들었는데~’로 시작하는 이야기도 친구의 친구라는 구체적인 대상 덕분에 기억에 오래 남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중에 실패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것. 아이들 사이에서 각종 괴담이 폭풍처럼 번지는 것도 그 구체성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가 가져야 할 성분 중 마지막은 감성이다.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는 그렇지 않은 이야기에 비해 몰입도가 훨씬 높다. 실제로 카네기 대학의 실험결과, 아프리카의 현황을 들은 학생은 평균 1.14 달러를 기부한 반면, 아프리카에 사는 7살 소녀 로키아의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평균 2.28 달러를 기부했다.
“하나의 감성적인 이미지 하나가 수 천 마디의 말보다 낫다”는 게 유지근 과장의 이야기다.
■ 게임 시나리오는 시나리오가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냥’ 시나리오의 사례다. 그렇다면 게임 시나리오는 뭐가 다를까? 유지근 과장은 “게임시나리오는 시나리오가 아니다”고 정의했다.
게임 시나리오에는 제약이 많다. 다양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다른 매체와 달리 게임은 NPC와의 대화로만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 전달도 쉽지 않다. 이야기가 길면 플레이어는 대화창을 넘겨버리고, 억지로 대화를 보게 만들면 아예 클라이언트를 종료해버린다. 그만큼 시나리오와 기획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다.
우선 가급적 기존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느낌표는 퀘스트가 있다는 표시고, 물음표는 보상을 주겠다는 표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유저들에게 친숙하기 때문이다. 이미 익숙한 부분을 버리고 억지로 새로운 것을 주입시킬 필요는 없다.
부족한 설명을 위해서는 배경을 활용한다. 숨어서 잠을 자는 작업자, 노래하며 춤추는 사람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곳의 분위기를 알려준다. 저레벨 지역에서 기계몬스터가 나왔다면 고레벨 지역에서는 로봇생산 공장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개연성을 살릴 수 있다. 말투도 캐릭터는 나타내는 방법 중 하나다.
텍스트를 잘 읽지 않는 유저를 위해서는 중요한 부분에 색을 넣어 보기 쉽게 만들어주면 된다. 퀘스트의 임무도 명확해야 한다. 다만 기획자의 편의를 위해 반복 퀘스트를 만들거나 의미 없는 배달 퀘스트를 넣는 것, 시나리오의 내용을 확실히 전달하겠다고 길게 텍스트를 나열하는 것 등은 금물이다.
‘다른 게임도 그렇게 하잖아?’ 같은 의문은 도움이 안 된다. “게임의 경쟁상대는 다른 게임이 아니다. 영화나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애완동물과의 산책 등 시간을 써서 즐기는 놀이문화들이다”라는 게 유지근 과장의 주장이다.
■ 까다로운 게임 시나리오 작가의 조건
까다로운 과제들이 산적한 만큼 게임 시나리오 작가에게 필요한 조건도 많다. 국어를 잘해야 하고, 게임도 잘해야 한다. 당연히 다른 게임도 즐길 줄 알아야 하고, 국가·연령·시대 등 게임의 대상도 고려해야 한다. 공감을 줄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특히 ‘수익’을 내야 하는 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쓸 필요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아니다. 이 밖에도 집단창작과정을 매끄럽게 견디기 위해 소통에도 능해야 한다.
해야 할 것도 많다. 최초 설정부터 기획, NPC 설정, 성우 녹음 의뢰, 퀘스트 구조 설명, 시나리오 작성, 시나리오 입력, 리소스 작업, 그래픽 리소스와 소스 연결 작업, 테스트 및 디버깅, NPC 및 몬스터 배치 요청, 던전게이트 오픈 요청 및 자동이동 설정, 인터넷 서버 패치 후 테스트, QA 의뢰까지 거쳐야 퀘스트 1개가 완성된다.
여기에 쏟아지는 요청자료, 각종 간담회 진행, 개발이야기 작성, 공식 홈페이지 소설 연재까지 해야 한다.
실제로 엔도어즈는 <아틀란티카>의 게임 시나리오 작가를 뽑기 위해 ‘<아틀란티카> 레벨 100 이상, 국어능력 인증시험 4급 이상, 만화 혹은 스토리 작가 출신 우대’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마땅한 지원자조차 찾기 어려웠다. 결국 6개월이 걸려서야 1명의 시나리오 작가를 확보할 수 있었다.
■ 게임에서 시나리오는 양념과 같다
게임 시나리오 작성에 있어서 아직 남아 있는 과제는 많다. 현재 게임 시나리오 전달은 오직 텍스트에만 의존한다. 간혹 영상을 쓸 때도 있지만 모든 퀘스트를 그렇게 만들어서는 도저히 비용이 맞지 않는다. 다양한 루트로 시나리오를 전달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게임 개발의 한계도 크다. 아무리 멋진 던전을 구상해도 유저들이 가지 않으면 낭비가 될 뿐이다. 같은 던전에 유저를 반복해서 보내기 위해 퀘스트를 억지로 늘리거나, 무슨 이야기에서 시작했든 언제나 사냥으로 끝나는 퀘스트 방식도 아쉽다.
취향의 차이가 크다 보니 요구조건도 넘친다. 이래서는 최초의 기획의도를 살리기도 어렵다. 전문적인 소양도 너무나 많이 필요하다. 앞으로 게임 시나리오 작가들이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들이다.
유지근 과장이 생각하는 시나리오는 ‘양념’이다. 양념 자체로는 요리가 될 수 없지만, 요리의 풍미를 돋울 수는 있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스토리만 보려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스토리는 게임의 재미를 끌어올려준다.
잘 만든 시나리오 하나만으로 게임을 흥행시킬 수는 없지만, 게임의 재미를 한 단계 올려줄 수는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