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들은 갈 곳이 마땅치 않고, 개발사들은 인재를 뽑기 힘들다. 모순 같은 이야기지만 현재 국내 게임산업 전반에 걸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7년차 개발자 A씨는 N사에서 개발을 총괄하던 이른바 ‘메인 개발자’였다. 그러나 최근 프로젝트가 취소되고 퇴직 권유를 받으면서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선뜻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프로젝트가 취소돼도 사내에서 새로운 프로젝트 팀으로 이동했지만, 이번에는 퇴사를 권유받았다. 남을 수는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개발을 계속 하기는 힘들다. 이직을 생각해 보니 한때 이직을 희망했던 업체들은 대부분 인수합병을 통해 대형 게임업체의 계열사로 편입됐다.
■ A씨의 고민 “갈 곳도 받아줄 곳도 마땅치 않다”
한때 자랑으로 여겼던 자신의 경력도 이번에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N사에서 차장급 대우를 받았던 A씨는 몇 번의 이직과 경력을 쌓으면서 억대 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이직을 고려하는 단계에서 자신의 높은 몸값을 만족시켜줄 개발사는 드물다.
분당에 위치한 소규모 개발사의 입장에서 A씨는 좋은 인재지만 수준을 맞춰줄 여력이 없다. 차라리 같은 비용을 들이더라도 두세 명을 채용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결국 A씨는 가고 싶어도 갈 데가 딱히 나오지 않는 상황에 처했다.
A씨는 “지금은 국내에서 인력들을 수용할 상황이 아니다. 대형 업체위주로 통합되거나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나와 같은 경력을 가진 개발자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자리(TO)는 한정돼 있는데 고급인력이 넘쳐난다. 눈높이를 낮춰도 현실은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실무자급들은 이직할 업체가 많은 편이다. 몸집을 키우는 스마트폰게임 개발사나 신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개발사가 어느 정도는 있다. 그렇다고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들도 너무 많이 시장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고 상황을 전했다.
■ B사의 고민 “받아들이고 싶어도 자리가 없다”
국내 대형업체들은 자체적으로 강도 높은 조직개편을 단행하고 있기 때문에 구인을 할 상황이 아니다. 네오위즈게임즈가 올해 들어 개발조직을 개편하면서 스튜디오 분사와 인력 재배치를 통해 몸집을 줄였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개발자들이 회사를 떠났다. 엔씨소프트도 조직개편에 들어가면서 최소 200여 명, 최대 800여 명의 감원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실상 시장이 나와 있는 인력을 흡수할 수 있는 업체는 위메이드, 액토즈소프트, 아이덴티티게임즈, 스마일게이트 등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이들 업체도 최근 스마트폰게임 개발에 집중하고 있거나, 대규모 인력채용 계획을 갖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렇다고 중국 등 해외의 러브콜을 받아들이자니 미래가 불투명하다. 조건은 괜찮은 경우가 많지만, 2~3년 뒤를 보장받는다고 장담하기 힘들고 가족 전체가 움직여야 하는 등 부담이 따른다.
경력자들의 구직 활동. 눈높이를 낮추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물론 분당 및 지방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개발사에서는 여전히 좋은 인력을 채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좋은 인재를 찾기 힘든 경우가 많다. 고급인력들은 소규모 개발사에 대해 경력과 연봉, 사내복지 등에서 이른바 ‘조건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강남에 위치한 B사에는 요즘 경력 개발자들의 이력서가 쌓여 가고 있다. 대부분 구조조정을 했거나 예정인 업체들에서 일하는 개발자들이 지원한 경우다. 한 달 사이에 벌써 100여 통에 가까운 이력서를 받아 봤다. 하지만 B사가 채용할 수 있는 인원은 직종별로 한두 명, 최대 10명 안팎이다.
B사의 인사담당 관계자는 “이미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필요한 인원은 서버, 클라이언트, 그래픽 등의 분야에서 많아야 한두 명이다. 그나마 이력서 상당수가 이른바 메인급 인력으로 5~6년차 개발자들이다. 우리가 필요한 인력은 실무진이다. 과장급 이상의 인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구인을 원하는 개발사는 실무진을 원하고 있는 상태.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창업 열풍 부나?
A씨의 고민은 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 깊어진다. 같이 일하던 팀원들도 챙겨야 한다. 결과적으로 A씨는 창업을 고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자신이 이끌고 갈 팀원은 6명 정도. 이들 모두를 받아줄 개발사가 없다면 스스로 개발사를 차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최근 업계 판도가 스마트폰게임으로 넘어가면서 과거에 비해 창업의 부담도 덜하다. 비용이 많이 들고 오래 걸리는 MMORPG보다 스마트폰게임에 비중을 두는 투자자들이 많은 것도 A씨의 창업 결심에 한몫했다.
초기 창업비용은 퇴직금과 위로금 명복으로 받은 돈으로 충분하다. PC 기반의 온라인게임이 아니다 보니 개발 투자비도 적다. 게다가 <롤더스카이>처럼 적은 비용으로 개발해 월 10억 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사례도 있다.
A 씨는 “스마트폰게임은 이른바 비용 대비 개발 효율이 좋다. 처음부터 대박을 꿈꾸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크게 열려 있다. 투자 시장도 스마트폰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벌써 수십 억 원대의 투자도 권유받았다. 아마 대다수의 경력직 개발자라면 지금 창업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창업 열풍이 분다면 시장에 나와 있는 개발자들도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퇴직자 중에서는 기존 스마트폰게임 개발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사람도 있다. 이름 있는 개발자라면 개발에 도움이 되고, 투자 유치에서 유리한 점도 있기 때문인 듯하다. 앞으로 유명 MMORPG 개발자들이 만든 스마트폰게임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