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개발 조직은 어떤 면에서 보면 방대하다. 그 조직과 관련해 명확한 구성이나 조직도가 확립된 것도 없다. 한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프로젝트마다 ‘그 때 그 때 달라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직도는 달라도 조직의 직책은 존재한다. 직책과 관련해 무엇을 하는지, 어떤 책임과 권한이 있는지는 또 애매하다. 디렉터와 프로듀서(PD)의 차이, 그리고 역량과 책임, 권한 등은 알쏭달쏭하다. 그중에서 게임 디렉터란 무엇인가?
한 개발 조직의 정점에 서 있는 디렉터가 하는 일과 역량, 조직을 이끄는 법은 무얼까? 넥슨 N스퀘어개발본부 이은석 실장은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실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고, 또 자신이 생각하는 시스템이 정답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디스이즈게임 정우철 기자
N스퀘어개발본부 2실에서 신작 <프로젝트 K>를 개발 중인 이은석 실장.
■ 게임 디렉터란 무엇인가?
게임 디렉터라고 하면 과연 어떤 일을 하는 직종이라는 생각이 들까? 팀원들은 실무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반면 사회에서는 교육에 방해되는 폭력 혹은 악성 콘텐츠 제작자를 떠올릴 것이고, 와이프는 게임 중독자처럼 본다.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이용자의 돈을 쓸어담기 위해 다양한 과금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디렉터 자신이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고상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실제로 하는 일은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일일 뿐인데 말이다.
게임 디렉터가 하는 일은 매우 다양하다. 실무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거의 모든 일을 해야 한다. 게임은 콘텐츠, 정보기술, 서비스라는 복합 지식의 집합체로, 책임자에게는 까다로운 역량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디렉터의 위치는 프로젝트의 규모에 따라서 묘하게 달라진다. 어떤 중형 프로젝트의 경우 디렉터가 실질적인 개발팀의 책임자가 된다. 개발업무의 결정과 책임을 지고, 이에 따라 디렉터의 ‘색’이 반영된 게임이 나온다. 즉 디렉터의 개인 역량에 따라서 프로젝트의 성패가 좌우될 수도 있다.
대형 프로젝트에서는 디렉터 없이 프로듀서만 있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프로듀서 밑에 콘텐츠 디렉터, 테크니컬 디렉터, 아트 디렉터 등으로 전문화가 이루어지고, 이들 디렉터는 서로 수평적인 관계에서 맡은 업무만 진행한다. 전체적으로 평범한 결과물이 나오기 쉽지만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
이은석 실장은 디렉터에 대해 “게임의 내용에 책임을 갖는 직책이다”고 말했다. 물론 규모가 커지면 보다 전문화된 직종이 나오겠지만 가장 먼저 권한과 책임을 갖고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가는 상위 직종이 디렉터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 권위주의와 라인조직의 함정
개발조직에서 디렉터는 게임의 색을 가져가고, 책임과 권한을 가지면서 하나의 중앙집중형 지휘계통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조직은 동양의 위계문화와 맞물려 권위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한다. 보통 디렉터는 경험이 많고 능력 있는 상급자가 맡게 된다. 이들의 판단은 대개 옳지만 늘 옳지는 않는다. 위계질서에 눌려 팀원들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의사표현을 못해 실패하는 프로젝트로 흘러갈 수도 있다.
이은석 실장은 “대한항공 여객기 괌 추락 사건의 비극을 보면 기장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을 안 부기장이 이를 에둘러 말하다가 제대로 된 통제의 기회를 놓쳤다. 게임 개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경험이 적고 직책이 낮은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채널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물론 중앙 집중형의 장점도 있다. 강력하고 비전 있는 리더를 만나면 뚜렷한 성과를 보인다. 대표적으로 세종대왕의 수많은 혁신들, 한국 대기업 창업주의 신화 등이다. 미국에서도 애플과 아마존 등에서의 절대권력을 가진 CEO가 중앙 집중형 경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밝혔다.
한편 라인구조는 개선돼야 할 대상이다. 상하관계를 갖는 게임업계의 프로듀서-디렉터 시스템은 일본에서 시작됐다. 위계문화가 있는 동양권에서는 시키면 그래도 하는, 잘 통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안 되면서 경쟁력을 잃기 쉽다.
이은석 실장은 “라인조직은 복잡하고 커진 게임업계에서 혁신을 이루기에는 낡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고 심정을 밝혔다. 고전적인 라인조직은 책임이 명확한 반면 효율이 저하되는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문제는 상급자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책임을 지면서 권한을 위임하면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 이는 데브캣 스튜디오에서도 실제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데브캣에서는 전용 그룹웨어로 전체가 문서와 채팅 커뮤니케이션을 가져간다. 실무자, 팀장, 디렉터 등 모두가 관련 이슈의 진행을 공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말할 수 있다.
즉 혁신 경쟁력을 뒤떨어지게 만드는 권위주의와 라인조직의 함정을 주의한다면 디렉터 시스템은 여전히 유용하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권한은 위임해도 책임은 같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 디렉터가 하는 일, 역량. 그리고 이끄는 법
그렇다면 디렉터에게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 이은석 실장은 리더십, 비전 전파, 디자인이라는 세 가지 범주를 들었고, 이 역량이 혼합돼야 좋은 게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리더십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리더십 외에 부족한 역량은 다른 전문가를 두어 보충할 수 있는데,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리더십이다. 리더십을 키우는 방법은 평생 수련하는 것 외에는 정답이 없다. 이은석 실장은 자신도 리더십이 높은 편은 아니라고 밝혔다.
통찰력, 즉 문제 정의 능력도 중요하다. 디렉터는 실무가 아닌 관리자로서 사물의 현상과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꿰뚫어 봐야 한다. 이는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고 전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키우라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 무작위한 현상의 관계를 파악하고 구조화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물론 디렉터 자신이 리더십을 갖췄다면 이에 능통한 조력자를 가까이에 둘 수 있다. 창의력과 설계력은 문제 해결능력인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구조와 메커니즘을 구상하고 이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역시 디렉터 스스로 하면 좋지만 못해도 조력자를 두면 된다.
이은석 실장은 “최소한 리더십이 있다면 비전 전파와 디자인 등의 다른 역량은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행력이다. 앞서 위임에 대한 이야기도 했지만, 생각을 현실로 만들고 일을 추진하는 것은 디렉터의 영역으로 위임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실행에 대해서는 우선순위를 두고, 한정된 자원(인력과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디렉터의 중요 업무 중 하나다. 이은석 실장은 이 우선순위를 중요도, 시급도, 비용으로 구분하고 처리했다. 실제로 <마비노기 영웅전>을 개발하면서 파트간 선행, 후행 업무를 표시하고 중요한 일부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이 실장은 “리더는 시드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 팀에서 일한다고 하는 동기부여. 완성될 게임의 모습에 대해 상상하고 꿈꾸게 만드는 것이 리더가 할 일이다. 자신에게 맞는 리더십을 찾고 개발해야 한다. 리더십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하며 강연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