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EBS TV에서 인기를 끌었던 밥(Bob Ross) 아저씨 기억나시나요? 붓끝에서 예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준 분이셨죠. 아마도 그 방송 보고 문방구로 그림 도구를 사러 달려가셨던 분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서울 대학로에서 또 다른 밥 아저씨들이 등장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직접 그림 그리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었죠. 우리가 즐기는 게임들의 멋진 그림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 많으시죠?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호기심을 안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디스이즈게임
이 날의 주인공들은 덥수룩한 수염과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의,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쌩쌩한’ 청년들이었는데요, 레드5 스튜디오의 컨셉트 아티스트 록산 님과 <슬랩샷> 개발에 참여중인 익쓰맨 님(제이드)이었습니다. 두 분이 진행하는 시연회는 혜화동 대학로에 위치한 커뮤니티 카페 '토즈(TOZ)'의 한 회의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왼쪽부터 서버 님, 록산 님. 약간 긴장한 듯 보이네요.
시연회 시작 전 록산 님의 소개.
(록산 님은 현재 <WoW>를 개발했던 마크 컨 및 블리자드 코리아에 몸 담았던 윤태원 씨가 설립한 레드5 스튜디오에서 신작 MMO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레드5의 신작은 웹젠이 퍼블리싱합니다.)
이어서 익쓰맨 님(제이드)의 소개.
(익쓰맨 님은 현재 온라인 하키게임 <슬랩샷 언더그라운드>를 개발중인 누믹스에서 캐릭터 및 배경 원화, 일러스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오후 2시에 록산 님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여성형 안드로이드 컨셉트였습니다. 현직 개발자로부터 지망생에 이르기까지 30여명의 사람들이 진지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는데,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열기가 무척 뜨거웠습니다.
스크린 속에는 처음에 대충대충, 슬쩍슬쩍 무언가 형태가 잡힌다 싶더니 어느새 사람모양이 나오더군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차 멋지게 모습을 잡아나가는 게 무척 신기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와~ 나도 포토샵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요, 여러 가지 기술적인 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그림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 글로는 그 느낌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록산 님의 일러스트 그리는 과정 (플래시)
다 그리고 나니 굉장하지요? ^^
약 1시간 40여 분에 걸친 록산 님의 시연회가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진 후에 TIG에서 익쓰맨(<익쓰맨의 완전삽질> 바로가기)을 연재했던 제이드 님의 시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에서 록산 님이 캐릭터 그리기 시연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배경 그리기를 했는데요, 제이드 님은 평소에 <둠>(DOOM)을 좋아하고 자주 플레이하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록산 님이 완전한 백지에서 그림을 완성했는데 반해 익쓰맨 님은 여러 가지 준비를 많이 해왔더군요. 배경에 들어갈 여러 스타일의 텍스처(질감을 드러내는 무늬의 패턴)들을 꼼꼼히 챙겨오셨습니다. 일단, 어떻게 그림이 완성되어가는지 한번 보시죠.
익쓰맨 님의 배경 원화 그리는 과정 (플래시)
음침하고 괴기스러운 <둠>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준비를 너무 잘해서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림이 완성된 느낌이었습니다. 너무 빨리 그려버렸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참석자들로부터 무엇을 그릴 것인지 요청을 받았는데, ‘시체를 하나 더 그리자’, ‘바닥에 왜 피가 없나?’ 등등 살벌한(?) 주문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한 여자분은 피를 무척이나 강조하시더군요. 결국 여기저기 피가 튀기고 팔다리 잘린 시체가 굴러다니는 살벌한(?) 그림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그림을 따라 그릴 만큼 진지한 분위기였지만 예기치 않은 사고(?)도 있었죠.
익쓰맨 님의 시연이 끝나고 간단한 질문과 답변 시간을 끝으로 오후 6시에 행사가 끝났습니다. 모두들 빠져나간 후 익쓰맨 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중간의 쉬는 시간 동안 시연회 진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서버 님, 그리고 록산 님과 조금씩 나눈 대화를 함께 재구성했습니다.
TIG> 그 동안 이런 행사에 자주 참석했는가? 이 행사를 통해서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서버> 이번이 세 번째이다. 2개월마다 한 번씩 하기로 했다.
록산(레드5)> 처음부터 참여했다. 친목과 재미, 교육적인 효과를 기대했다. 실제로 일을 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익쓰맨(누믹스)> 같은 그림쟁이들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론을 보고서 그들에게 이론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TIG> 이런 행사를 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떤 것이 힘들었나?
서버> 참여자를 모으는 것은 인맥이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활용하면 되니 문제가 없었지만 장소 물색이 힘들었다. 큰 규모로 상업적인 행사를 하는 경우에는 강연자와 관객 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고, 작은 규모에서는 강연자를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록산> 제대로 시연회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잘 없다. 그리고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좀 부담된다. (Shiraz : 말을 조리 있게 잘 하셨는데 겸손하시네요. ^^)
익쓰맨> 장소도 문제지만 시연회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될 때가 있다. 오늘 같은 경우는 준비한 노트북의 ALT 키가 먹지 않았다. 컴퓨터 모니터와 시연화면의 색이나 비율이 안 맞기도 하다. 예전에는 비슷한 문제로 시연회가 30분 넘게 지연된 경우도 있었다. 또 바쁜 개인 스케쥴의 조정도 어렵다.
TIG>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록산> 앞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게 되어 행사에 참여가 힘들 것 같다. 다른 분들이 뒤를 이어나갔으면 한다.
서버> 7월부터 포토샵 뿐만 아니라 페인터를 이용한 시연회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앞으로도 이 행사가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으면 한다.
익쓰맨> 국내에는 이런 행사가 드물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끼리 각자의 스킬을 공유하는 활동을 통해 현업 종사자나 지망생 전체에게 그 혜택이 돌아갔으면 좋겠다. 나는 그림쟁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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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대화였지만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과 간결한 말 속에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무언가 뜨거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 같이 느껴져 부럽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에 익쓰맨님이 말한 ‘나는 그림쟁이다’라는 말이 계속해서 기억에 남았는데요, 그 마음 그대로 다음에 있을 시연회에서도 보여주시길 기대합니다. 이런 행사가 좀더 활발해져서 다른 게임계의 ‘그림쟁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